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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사건 뒷얘기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 용의자 조승희

성장과정, 가족 관계, 전문가가 본 정신세계

글·송화선 기자

2007. 05. 21

미국 버지니아공대 기숙사와 강의실에 총을 난사해 32명을 사망케 한 조승희씨는 평소 정신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으며 극도로 폐쇄된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같은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게 했는지, 조씨의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평소 모습, 전문가가 진단한 그의 정신세계까지 알아봤다.

지난 4월16일 오전(현지 시간)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벌어진 끔찍한 총격사건의 용의자 조승희씨(23)는 외견상 평범한 청년이었다. 한국계 이민 1.5세대인 그는 180cm의 건장한 체격에 아버지, 어머니,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누나가 있는 가정의 막내였고, 지역에서 명문으로 알려진 버지니아공대 영문학과에 입학한 ‘모범생’이었다. 그의 집이 있는 버지니아주 센터빌은 워싱턴 DC 근교의 신흥 중산층 주거지로, 조씨는 부자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안정적인 가정환경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본 이들은 조씨가 정신적으로 문제를 갖고 있었으며, 종종 이유없는 증오와 적개심을 표출하곤 했다고 밝혔다.
84년 서울에서 태어난 조씨는 8세 때인 92년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어린 시절 한국에서 매우 가난하게 생활했다는 것. 조씨 가족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은 서울 도봉구 창동의 한 다세대 주택이었는데, 방 두 칸에 화장실 하나가 있는 10평 남짓한 반 지하였다. 원래 20여 평 규모로 지어진 지하실을 두 가구가 나눠 쓰는 형태로,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아 지금도 벽마다 곰팡이가 끼어 있다. 이곳에 사는 동안 조씨의 아버지는 헌책방을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 시절 S건설 기능공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했고, 식료품점 등을 운영하기도 했던 조씨 아버지는 헌책방이 잘되지 않고 생활이 계속 어려워지자 이민을 결심했다고 한다.
집주인 임모씨(67)는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에 조씨 가족이 미국으로 떠났다”고 말했다. 당시 조씨 어머니는 “한국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어 미국으로 가야겠다”며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지만, 미국이 한국보다는 돈 벌기가 쉽지 않겠느냐. 아이들은 좋은 곳에서 공부를 시키고 싶다”고 울먹였다고 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조씨 가족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공항을 통해 입국했고, 조씨 부모는 먼저 한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착실히 일한 끝에 5년 만에 주거환경이 훨씬 좋은 버지니아주 센터빌에 자리를 잡았고, 이곳에서 조씨 아버지는 지인의 소개로 세탁소를 차릴 수 있었다. 어머니도 다른 세탁소나 학교 구내식당 등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고 한다.
조승희씨 희곡에 나타난 증오와 분노
‘대부분의 내용이 욕설과 살해 위협으로 채워져’

“그를 죽여버리고 싶어. 그가 우리를 피 흘리게 했듯이 그가 피 흘리는 것을 보고 싶어.”
조승희씨가 쓴 희곡 ‘미스터 브라운스톤’의 일부분이다. 17세 고교생 3명이 담당 교사를 죽이겠다고 다짐하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버지니아공대 영문과생이던 조씨는 지난해 가을 ‘희곡 창작’ 강의를 들으며 두 편의 희곡을 썼다. A4용지 10~11쪽 분량의 단막극인 두 작품은 모두 10대 주인공이 아버지나 교사를 증오하며 죽이겠다고 벼르는 내용이다.
이 희곡들은 그와 함께 수업을 들었던 이언 맥팔레인씨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전문을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맥팔레인씨는 글을 올리며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 얘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친구들에 대한 걱정이었고, 두 번째로 떠오른 것은 ‘조승희가 한 짓이 틀림없다’는 확신이었다”며 “그의 작품은 악몽처럼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내용이었다”고 썼다.
맥팔레인씨가 “이 희곡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 법에 저촉되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다”고 밝혔을 정도로 조씨의 희곡은 첫 장면부터 끝 대목까지 욕설과 기괴한 상황으로 뒤덮여 있다.
‘리처드 맥비프’에서 13세 존은 의붓아버지 리처드 맥비프를 자신의 생부를 죽인 살인자로 여긴다. 계부가 자신의 어머니를 차지하기 위해 친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이다. 어린 존은 양아버지에게 ‘개자식’ ‘입 닥치고 내 말이나 들어’라며 욕설을 퍼붓고, 어머니에게는 “그가 날 성추행하려 했다”고 말한다. 이 얘기에 생모는 남편에게 전기톱을 들고 덤벼드는데, 맥비프가 그런 아내를 달래는 방식은 “변태 성행위를 해주겠다”고 회유하는 것이다. 이 음습하고 섬뜩한 이야기는 맥비프가 아들 존을 주먹으로 내리쳐 살해하는 것으로 끝난다.
‘미스터 브라운스톤’에서는 증오의 대상이 교사다. 희곡 내용의 3분의 2 이상이 수학교사 브라운스톤에 대한 욕설로 채워져 있다.
맥팔레인씨는 “과제로 단막극을 쓰면 동료와 교수가 함께 돌려 읽으며 논평을 하고 글을 쓴 학생이 답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조씨의 글은 너무 뒤틀려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글을 논평하는 날 우리는 ‘그가 총기난사범 같은 사람이 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얘기를 나눴고, 조씨의 글에 대해 논평할 때 조심했다. 교수도 그의 코멘트를 요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8세 때 미국행 비행기 오른 이민 1.5세대
조씨 가족이 현재 살고 있는 센터빌의 방 3개짜리 2층 규모 타운하우스는 우리 돈으로 시가 4억~5억원 선. 이 집이 조씨 가족 소유인지, 아니면 임대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웃 역시 대부분 중산층인 좋은 주거환경이다. 이 집에서 조씨는 인근 스톤 중학교와 근처 섄틸리 소재 웨스트필드 고등학교에 다녔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자신이 운영하는 세탁소에 조씨의 어머니를 고용했던 교포 양모씨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이들 졸업식이나 방학 때는 꼭 부부가 같이 학교를 방문할 만큼 가정적인 집이었다. 조씨 어머니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말을 한 적은 있지만, 한 번도 남편이나 아이를 원망하지는 않았다”며 “그는 조용하고 차분한 전형적인 한국 여성이었다”고 말했다.
조씨 가족의 이웃 주민 압둘 샤시씨도 “조씨 부모는 열심히 일하는 조용하고 겸손한 사람들이었다”면서 “눈이 올 때면 이웃집 자동차에 쌓인 눈까지 치워주곤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특히 아이들에게 헌신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의 누나는 이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며 잘 자랐다. 양씨는 조씨 어머니가 종종 “딸은 학교 선생님들에게서 적극적이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는 칭찬을 무척 많이 듣는다”고 자랑하곤 했다고 말했다.
조씨의 누나는 2000년 명문 프린스턴대에 입학했고, 미 국무부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등 성실하고 모범적인 대학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발간된 프린스턴대 학보에는 조씨의 누나가 미 국무부 인턴십 프로그램 지원을 받아 동남아시아의 노동조건을 현지 조사한 경험담이 소개돼 있다. 미얀마 이주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을 가슴 아파하고 이국적인 문물에 감탄하는 그의 글에는 젊은이다운 열정이 잘 드러나 있다.
반면, 조씨는 말수가 거의 없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피해 부모의 애를 태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0년부터 2년 동안 센터빌의 한 한인교회에서 당시 고교생이던 조씨를 지도한 한 목사는 “승희는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교회에서 간식을 제공할 때도 따로 구석에 앉아 먹었다”며 “승희 어머니가 ‘아들의 성격을 바꿔달라’고 특별히 부탁해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도 했다. “매주 토요일 내 차에 승희를 태우고 집과 교회를 왕복했는데 승희는 먼저 말을 꺼내는 법이 없었고, 내 질문에도 ‘예, 아니요’ 이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씨는 학교에서도 외로운 학생이었다. 그가 졸업한 웨스트필드 고등학교에는 조씨와 관련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학교 관계자는 “웬만한 학생은 졸업앨범(yearbook)에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고, 친구끼리 앨범에 글도 남기기 마련인데 조씨의 경우엔 그런 게 없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은 학생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2002년 버지니아공대에 들어갔을 때 그의 부모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폐쇄적인 조씨의 성격을 고치기 위해 대학 기숙사에 찾아가 친구들에게 “아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조씨와 함께 기숙사에 살았던 수 첸씨는 누나가 동행해 동생을 부탁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가 본 조승희씨의 정신세계
“과대망상과 편집증, 폭력성의 참혹한 결합”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 용의자 조승희씨에 대해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과대망상과 편집증 증세가 있다”고 진단했다.
황 교수는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좌절과 불만이 쌓인 사람은 혼자 온갖 상상을 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가상의 적을 설정하고 그 존재 때문에 자신이 고통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가상의 적은 특정 인물일 수도 있지만 막연한 대상인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의 유영철이 ‘여자’를 자신의 적으로 상정해 무고한 여자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은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조씨는 이 세상 자체를 악마의 소굴로 봤고, 자신은 그 세상을 구할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망상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그의 눈앞에 있는 모든 사람은 악마의 졸개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 교수는 조씨에 대해 ‘편집증적 정신분열’이라는 진단도 내놓았다. 조씨는 NBC 방송국에 보낸 동영상에서 “너희에겐 오늘을 피할 수 있는 천억 번의 기회와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너희는 내 피를 흘리게 했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이에 대해 “이 말은 곧 조씨 자신이 이 범행을 ‘천억 번’ 생각했다는 뜻”이라며 “현실성 없는 것에 집착하고, 지나치게 몰입하는 편집증적 정신분열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과대 망상과 편집증이 폭력성향으로 발현될 경우 이번 사건과 같은 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한 집단에서 외톨이가 될수록 누군가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은 욕구가 더욱 커지는 법”이라며 “자녀가 소심하고 인간관계에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일 경우 부모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걸며 생각을 나누고, 그가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백병원 정신과 우종민 교수는 “정신질환이 심하면 계획된 범죄를 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조씨는 심각한 정신병을 갖고 있었다기보다는 인성 결함이 심한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고, 망상성 장애도 있었던 것 같다”며 “정신적인 문제는 이처럼 방치할 경우 점점 더 깊어지므로, 혹시라도 아이가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듯한 인상을 주거나 주위 사람과 자연스럽게 감정 소통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 전문가의 판단과 도움을 받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대학 진학 후 자폐적 행동에 폭력 성향 더해져
하지만 조씨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고, 언젠가부터 눈에 띄게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씨와 함께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그를 ‘외톨이’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존재로 기억한다. 그는 강의 중에도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고, 교수가 질문을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문과 4학년인 폴 김씨는 “그는 문 쪽 자리에 앉았다가 강의가 끝나면 바로 나가버렸다”고 말했다. 2005년 10월부터 12월까지 3차례에 걸쳐 그를 개인 지도한 루디다 로이 교수는 “그는 항상 선글라스와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며 “마치 선글라스 뒤에서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덧붙였다.
그의 폐쇄적인 성격은 종종 이상한 행동으로 나타났다. 조씨와 영국문학 강의를 같이 들은 샬럿 피터슨씨는 “강의 첫날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름을 적어 내라고 했는데 그가 물음표(?)만 적어냈다”며 “그래서 조씨는 한동안 ‘물음표 키드’로 불렸다”고 말했다. 한때 조씨의 룸메이트였던 카랜 그루웰씨는 “올 초 학생회 선거를 위해 한 후보가 방문해 그에게 사탕을 건네주며 한 표를 부탁했는데 그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고 전했다.
동시에 그는 잠재된 폭력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조씨와 함께 ‘희곡 창작’ 수업을 들었던 이언 맥팔레인씨는 “그가 쓴 희곡은 악몽과 같았다”며 “매우 뒤틀려 있고, 폭력적이었으며 지금까지 생각도 못한 무기들이 등장했다”고 회상했다. 조씨의 시 작문 교수였던 니키 지오바니씨는 “그가 수업시간에 휴대전화로 다른 학생들의 사진을 찍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해 학생들이 조씨를 두려워했다. 한번은 정원이 70명인 수업에 7명만 출석한 날도 있었을 정도”라며 “다른 학생들을 위해 그를 수업에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여러 명의 여학생을 스토킹하기도 했다. 웬델 플린첨 버지니아공대 경찰서장은 기자회견에서 “조승희가 2005년 여학생 2명에 대한 스토킹 사건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며 “이로 인해 대학징계위원회에 회부됐고, 이후 조승희에게 자살 징후가 있다는 룸메이트의 진술이 나와 그를 정신과 시설에 일시 구금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영문과 2년생인 엘리자베스씨(가명)는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에게 만나달라고 전화하다 계속 거절하자 기숙사 방에까지 침입한 적이 있다. 결국 교내 경찰에 신고한 끝에 그의 접근을 막을 수 있었다”며 “그는 정말 괴상한 외톨이였고, 영문과 학생 중 그를 알고 어울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사건 초기 조씨의 여자친구로 알려졌던 첫 번째 희생자 에밀리 제인 힐스처씨도 실은 스토킹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힐스처의 친구들이 “그의 남자친구는 따로 있고, 조승희와는 아무 사이도 아닌 것으로 안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씨는 이처럼 극도로 고독하고 단절된 상황에서 세상에 대한 증오를 키워온 것으로 보인다. 조씨는 사건 당일 아침 기숙사에서 2명의 학생을 살해한 뒤 강의실에서 2차 총격을 시작하기 전 2시간 사이에 총격의 이유를 밝힌 1천8백자 분량의 ‘영상 메시지’를 NBC 방송국에 보냈다.
미국 언론이 ‘선언문(manifesto)’이라고 명명한 이 영상물에서 조씨는 분노에 가득 찬 어조로 세상에 대한 증오와 부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하며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는 “시간이 됐다. 거사는 오늘이다. … 너희는 나를 괴롭히면서 즐거워했다. … 희생당한 나와 내 아이들과 내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 나는 거사를 치를 것이다. … 나는 앞으로 오랫동안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예수처럼 죽는다”고 말했다. 조씨는 권총으로 정면을 겨누고 있는 사진,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거나 망치를 들고 누군가를 가격하려는 사진 40여 장도 함께 보냈다.
전문가들은 조씨가 범행 5주 전에 권총을 구입하고, 영상물과 사진도 치밀하게 만들어두는 등 이번 범행을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32명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이번 사건의 원인은 분명히 밝혀지기 어렵지만, 전문가들은 “자기를 괴롭히는 어떤 사람을 설정하고 그 존재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상상하는 피해망상으로 인한 사건”으로 진단하고 있다. “한 집단에서 외톨이가 될수록 누군가로부터 관심을 받고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싶은 욕구가 커지는 법”이라며 “그런 욕구를 수용해줄 상대가 주변에 없었던 것이 큰 사고를 불렀다”는 견해도 있다. 이번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이민 1.5세대를 끌어안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에 남아 있는 조씨 친척 반응
“뉴스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유족들과 나라에 죄송할 뿐”

“늘 가족의 행복을 위해 기도했는데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다니, 나라에 죄송할 뿐입니다.” 조승희씨의 외가 쪽 가족은 큰 충격 속에 “사건 희생자들의 유족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전했다. 경기도 고양시 외곽의 허름한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거주하고 있는 조씨의 외조부 김모씨(81)는 4월18일 “승희가 어릴 때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아 부모 속을 무척 썩였지만 얌전했다”면서 “자식을 잘못 키운 죄를 어찌 갚아야 할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먹고살기 힘들어 먼 남의 나라까지 가서 험한 일을 한 부모를 생각하면 그 녀석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아내와 사별한 뒤 성당에 나가 늘 기도하며 위안을 삼았는데 이젠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조씨 가족은 이민을 간 이후 외가 쪽과 연락을 끊다시피 해 이들은 조씨 가족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김씨는 “뉴스를 본 뒤에야 딸이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했고 승희가 대학에 다닌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조씨의 큰외삼촌인 김모씨(53)는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명절 때 가끔 전화가 왔지만 안부만 묻고 끊어 어떻게 사는지, 아이들은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며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은 지난해 추석 때”라고 말했다. 그는 “서로 바쁘고 먹고살기 힘들어 누나(조씨의 어머니) 가족이 한국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우리도 미국에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서 “사건 희생자들을 위해 자숙하며 지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며 탄식했다.
김씨는 “92년 이민을 가기 전 누나를 한 번 만났는데 ‘아이들 교육 때문에 이민을 간다’고 하더라”며 “이민을 간 뒤로는 15년 가까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건 이후 뉴스를 보고도 긴가민가했다가 매형의 이름이 나오고 나서야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매형 집안은 일찍 이민을 가 우리 집안과 거의 유대관계가 없었다”며 “누나 전화번호도 몰라 답답한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조씨의 이모(49)도 이날 기자를 만나 “이민을 간 것도 떠난 뒤에 엄마에게 얘기를 듣고 나서야 알 정도로 친정식구 간에도 교류가 별로 없었다”며 “조카들은 아주 어렸을 때 봤을 뿐 그 뒤로는 본 적이 없어 사진을 보고도 조카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8년 전 엄마가 뇌출혈로 돌아가셨을 때 언니가 연락을 받고도 오지 않아 서운했다”며 “언니도 살기 팍팍해 연락을 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형부(조씨의 부친)도 말수가 적고 과묵했다”며 “언니 시집 쪽 가족이 미국에 있어 초청을 받아 이민을 간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 미국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는 아는 게 없다”고 말했다.
글·이동영 김동욱 한상준‘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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