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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명사의 교육법

나도선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장 ‘두 아이 명문대 보낸 자녀교육법’

글·송화선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07. 05. 18

각종 연구 성과로 대한민국 과학기술훈장 진보장, 올해의 여성과학자상 등을 받은 한국과학문화재단 나도선 이사장.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 과학자 가운데 한 명인 그는 연구자로 바쁘게 일하면서도 두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그를 만나 여성 과학자로 성공한 비결과 자녀교육법을 들었다.

나도선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장 ‘두 아이 명문대 보낸 자녀교육법’

나도선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장(58)은 과학기술부 산하 기관의 첫 여성 기관장이다. 각종 연구 성과로 대한민국 과학기술훈장 진보장과 2004 올해의 여성과학자상 등을 받은 저명한 여성 과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과학자의 길을 택했던 건 아니다. 경기여고 재학 시절 물리·화학을 가장 좋아하고 또 잘하기도 했지만, 대학에 진학할 때 그가 택한 전공은 약학이었다.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는 데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전 집이나 학교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런데 대학 진학할 때쯤 되니 사회엔 여자에 대한 차별이 있다는 걸 조금씩 알겠더라고요. 60년대였으니까 여자는 취업조차 하기 어렵던 때였죠. 약사 자격증이 있으면 좀 낫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는 서울대 약학과를 졸업한 뒤 제약회사 역시 여자는 결혼하면 그만두게 하는 불문율이 있다는 걸 알고 취업을 포기했다. 대신 고향 수원에 내려가 약국을 개업해 운영하며 결혼을 했다.
“그런데 계속 공부를 더 하고 싶더라고요(웃음). 졸업하고 2년 만인 73년 서울대 약대 대학원에 들어갔죠. 그해에 첫아이를 낳고 76년에 둘째를 낳느라 77년이 돼서야 겨우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그때 다시 대학원에 간 게 과학자가 되는 출발점이었어요.”
석사학위를 받은 뒤 우연히 미국 유학 기회가 생겼다.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원으로 있던 남편이 미국 북일리노이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게 됐는데, 이왕 함께 미국에 가는 김에 공부를 더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다른 학교에 가는 건 엄두도 못 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도 북일리노이대학에 원서를 냈죠. 그런데 운 좋게 붙은 거예요. 게다가 장학금까지 준다고 해서 저도 공부를 할 수 있게 됐어요.”
큰딸 현선양이 여섯 살, 아들 현석군이 세 살 때의 일이다. 설마 나 이사장이 합격할까 생각하던 주위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남편도 “굳이 공부를 해야겠다면 아이는 두고 가자”고 권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다 공부하면서 아이까지 키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가 일단 가서 해보고 도저히 안 되면 차라리 공부를 포기하겠다고 우겼어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유학 생활인데 아이들을 떼어놓고 갈 수는 없다고요. 결국 제 고집이 이겨서 79년 아이들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죠.”
그때부터 나 이사장은 현재 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장으로 있는 남편 강정모 박사(61)와 함께 ‘유학생 부부’ 생활을 시작됐다. 아침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낮 동안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맡겼다가 오후 3시가 되면 강 박사가 집으로 데려왔고, 나 이사장이 오후 6시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함께 저녁을 먹은 뒤 강 박사는 다시 학교로 나가 공부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나 이사장은 저녁 때 아이들을 돌보며 집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제 인생에서 그때만큼 자신감 없고 힘들던 때는 없었던 것 같아요. 영어도 잘 안되는 상황에서 대학원 공부를 해야 했으니까요. 게다가 낙제점을 받아 장학금이 취소되면 당장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죠.”
“박사를 따봤자 어차피 한국에서 취직도 안 될 걸 왜 그렇게 고생하느냐”는 주위의 시선도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미국에서 나 이사장은 생화학을 전공했는데, 당시만 해도 ‘여자 과학자’가 드물던 때였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겉으로는 웃어 넘겼지만 얼마나 불안했는지 몰라요. 정말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스스로 의심하기도 했죠. 하지만 한 1년쯤 지나니 자신이 생기더군요. 영어에 익숙해지고 공부도 점점 재미있더라고요. ‘미래는 상관 없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두 아이 기르며 시작한 유학 생활, 힘들었지만 공부하는 재미 알게 됐어요”
나도선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장 ‘두 아이 명문대 보낸 자녀교육법’

아들 현석군, 사위, 손자, 딸 현선양과 함께한 나도선 이사장.(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나 이사장은 3년 반 만에 박사학위를 따냈다. 두 아이도 미국에 있는 동안 배탈 한 번 걸리지 않을 만큼 건강하게 자라 엄마의 짐을 덜어줬다고 한다. 그는 미국 생활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으로 “공부가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사실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몰랐어요. 왜 그랬나 했더니 재미를 느낄 만큼 많이 안 해서 그런 거더군요. 미친 듯이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어느 단계를 넘어서는 순간 공부가 재미있어져요. 그걸 깨달은 뒤부터, 전 우리 아이들한테나 제자들에게 늘 그렇게 얘기하죠. ‘공부하기 싫어? 그럼 조금만 더 해봐. 틀림없이 공부가 재미있어질 거야. 진짜라니까’ 하고요(웃음).”
대학원 졸업 후 앨라배마대학교 의과대학 연구원에서 유전자 분야와 관련한 포스트닥터(박사 후 과정) 연구원 생활을 한 나 이사장은 미국에 간 지 7년 만인 85년 금의환향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유전공학센터 생화학연구실장으로 한국에 돌아온 것이다. 여자로는 KIST 사상 두 번째 초빙 과학자였다. ‘여자가 공부해봤자…’ 하던 이들이 깜짝 놀랐고, 나 이사장은 오랜 도전이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 생활은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아직 여자 상사가 익숙하지 않은 연구소 분위기 속에서 남자 직원들과 갈등 없이 일을 해나가야 했고, 어느새 초등학교 6학년과 3학년이 된 두 아이의 교육문제도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두 아이는 그 무렵 한국어보다는 영어를 더 편하게 생각할 정도로 그쪽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딸아이는 우선 외국인 학교에 보냈어요. 주위 분들이 바로 일반 학교에 보내면 아이가 고생할 거라고들 하셨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지내다 보니 아이가 아예 한국 생활에 적응을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또 들더라고요. 어쨌든 이 아이는 한국 아이니까, 아무리 힘들더라도 이 문화에서 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아이를 한국 학교로 옮겼어요.”
그는 서툰 말과 달라진 교과 과정 때문에 힘들어하는 딸에게 “엄마도 처음 미국 갔을 때는 많이 고생했는데 1년쯤 지나니 괜찮아지더라. 무리하게 옆 사람들 따라가려 하지 말고, 한 1년 동안은 네 속도대로 배워봐. 그러고도 안 되면 엄마가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사준 뒤 찾는 법을 알려줬다고.
“그러고 한 6개월쯤 지나니 아이가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하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좀 길게 기간을 정하고 여유를 준 게 오히려 적응 시간을 단축시켜준 것 같아요. 엄마가 동동거리며 불안해했으면 본인도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나도 참 힘들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되더라’ 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니 아이가 마음을 놓은 거죠.”
나 이사장은 “아이가 어려움을 겪을 때는 엄마가 무리하게 도와주려 하기보다 스스로 해결할 때까지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게 더 좋다는 걸 알았다”며 “그때 내가 아이에게 해준 것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엄마는 너를 참 많이 믿고 사랑한다’고 말해준 것뿐”이라고 말했다.
귀국 이듬해인 86년 우리나라 최초로 유전자재조합에 의한 단백질을 개발하는 등 과학자로 한창 연구 성과를 발표하던 나 이사장은 아무리 바쁠 때라도 집에 돌아가면 철저히 ‘엄마 나도선’으로 변신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일하는 엄마로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와 남편 둘 다 공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이 교육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은 자존심 같은 게 있었어요. 그래서 과외를 시키지 않는 대신, 늘 우리가 공부했던 방법을 들려주고 스스로 공부할 수 있게 도와줬죠. 저는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 교과서를 먼저 통째로 읽은 뒤 주요 내용을 메모하고, 복습할 때는 그 메모만 보면서 교과서 내용을 연상하는 방식으로 했어요. 그렇게 하면 전체 줄기가 잡히면서 핵심이 머릿속에 남아 시험 문제를 풀 때 좋았죠. 아이에게 그런 얘기를 들려주면서 ‘너도 한 번 그렇게 공부해봐라’하고 권하곤 했어요.”

아이가 어려움 겪을 때는 무리하게 도와주려 하기보다 스스로 해답 찾을 때까지 기다려
나도선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장 ‘두 아이 명문대 보낸 자녀교육법’

처음에는 엄마 아빠의 공부방법을 흉내 내던 아이들은 이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성적도 꾸준히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큰딸은 고등학교에 들어가 치른 첫 시험에서 전교 1등을 차지했다고.
“그때 점수가 아직도 생각나요. 영어 100점, 수학 100점, 국어만 76점이었죠(웃음).”
좀 더 어릴 때 한국에 돌아온 아들은 학교 생활에 더 잘 적응했다. 누나와 같은 혼돈 기간 없이 바로 우등생이 됐다고. 하지만 시험 기간에도 만화책과 비디오 게임을 하는 등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종종 나 이사장의 속을 썩이곤 했다.
“제가 보면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성적은 잘 나오는 거예요. 저놈이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에 처음엔 몇 번 꾸중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공부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좋은 성적이 나오는 걸 보면 그게 바로 저 아이의 스타일 아닌가 하고요. 그렇게 아이를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고 좋더군요(웃음). 아이 역시 편안해하는 눈치였고요.”
그렇게 아이들을 인정하게 된 뒤부터 나 이사장은 매일 새벽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해준 것이 없다고 한다. 아이들이 고민이 생길 때 성실한 카운슬러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두 아이는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고, 현재는 미국에서 각자의 일을 하는 ‘인재’로 자랐다. 대학 졸업 뒤 의사와 결혼한 딸은 현재 펜실베이니아대학 병원 방사선과 레지던트로 있으며, 아들은 뉴욕주립대 조교수로 임용돼 오는 가을 학기부터 강의를 맡을 예정이라고 한다.
나 이사장은 “돌아보면 그렇게 아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줬기 때문에 스스로 더 열심히 길을 찾고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저는 단 한 번도 아이에게 뭔가를 강요한 적이 없어요. 아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기만 했죠. 한번은 딸아이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고민이 있다고 하면 엄마는 늘 네가 알아서 결정하라고 하는데, 막상 엄마와 얘기를 하고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어’라고요(웃음). 그게 아이들을 대하는 제 방식이었어요. 끝없는 대화를 통해 아이가 스스로 가장 바람직한 방향을 찾도록 하는 거죠.”
나 이사장은 중학교 교장을 지낸 친정아버지로부터 이런 교육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지금껏 자녀 모두에게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을 정도로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이라고. 어머니가 가끔 형제들을 꾸중할 때면 “그냥 놓아둬. 10년만 지나면 다 해결될 문제를 갖고 뭘 그렇게 화를 내나”라고 말릴 정도로 자유방임형이었다.
“그렇다고 저희에게 무관심하셨던 건 아니에요. 대화를 나눌 때면 늘 ‘나는 너를 100% 믿는다’는 느낌을 받게 하셨죠. 지금도 아버지 앞에 가면 전 제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인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겨요. 그 기대를 채워드리기 위해 더 열심히 하게 되고, 잘하게 되고요.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완전한 믿음과 관심을 주고 싶었어요.”
“지금껏 해온 일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건 내가 우리 아이들의 엄마라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나 이사장은 그런 뿌듯함을 더 많이 누리기 위해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았다고 한다. 한국과학문화재단은 일반인들이 과학을 친숙하게 여기고, 더 나아가 사랑하게 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펼치는 곳으로 각종 체험 및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동안 과학자로 수많은 일에 도전하며 치열하게 살아왔어요. 이제는 그 열정을 과학 대중화 분야에 쏟고 싶습니다. 저희 재단에서 진행하는 여러 사업을 통해 아이들이 과학 쪽에 관심을 갖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를 이끌 훌륭한 과학자로 성장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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