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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책을 펴는 즐거움

아멜리 노통브의 기상천외한 희곡 ‘불쏘시개’

기획·김동희 기자 글·민지일‘문화에세이스트’ 그림·남홍‘서양화가’

입력 2007.05.07 18:57:00

아멜리 노통브의 기상천외한 희곡 ‘불쏘시개’

남홍, 우리는 나비다!, 200×250cm, 캔버스에 아크릴, 2005


# 2004년에 개봉한 영화 ‘투모로우’의 한 장면: 지구온난화가 끝내 재앙을 불러 북반구에 새로운 빙하기가 도래했다. 엄청난 해일과 뒤이은 혹한에 쫓겨 뉴욕 국립도서관으로 피신한 주인공의 아들과 친구들. 추위를 달래려고 서가의 장서를 꺼내 불태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늙은 사서는 두툼한 책 한 권을 끌어안고 내놓을 생각을 않는다. “당장 얼어 죽을 판인데 그까짓 책 한 권이 뭐라고…” 주위에서 핀잔하자 사서는 안경까지 벗어들고 단호하게 대꾸한다. “이건 구텐베르크 초판본 성서야. 인류의 이성시대를 연 최초의 인쇄물이란 말이야. 연기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어. 나는 죽더라도 책만은 살려야해. 그게 언제든 후세 사람들이 보아야만 할 테니까…”

# 책이 우리 내면에서 활동할 때 우리는 조금도 수동적이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들로부터 만들어진다. 까맣고 하얀, 차원이 없는 철자들이 줄 서 있는 데서 우린 색깔을 만든다. 냄새와 동작, 그리고 울림을 만들어낸다. 책에서 아픔과 불안이 나타날 경우 그것이 우리가 경험했던 아픔과 불안과 더불어 인생에 자극을 주지 못하면 책은 단지 종이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마틴 발저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에서)

간단한 듯하지만 참 어려운 질문 중 하나가 ‘책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다. 수천 년에 걸쳐 지금까지 많은 시인과 작가 철학자들이 다양한 정의를 내렸다. 그 어느 것 하나 틀린 정의가 없을 터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책이란 인간에게 정말 무엇인가’란 명제를 놓고 씨름하고 있다. 누구는 그것이 밥이고 생명이며 인간 그 자체라고도 한다. 반면 어떤 이는 그건 허섭스레기에 불과하며 심지어 인간의 뇌에 기생하는 나쁜 종양이라고 깎아내린다. 지금도 문학청년들이 즐겨 찾는 어느 소설의 허무주의자 주인공은 “책을 읽어 알게 된 것은 책이 쓸모없다는 것이 전부였다”고 독백하기도 한다.

교수가 책을 불쏘시개로 사용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은 라면이나 김치찌개 냄비받침으로 유용하며 파리, 모기, 바퀴벌레를 때려잡는 데도 일품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책을 장식품이나 고급 액세서리로 이용하기도 하며 수험생들은 다급한 나머지 책을 태운 재를 물에 타 마시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연애편지 대신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도구로 둔갑하기도 하고 선생님이 아이들을 때리는 몽둥이 대용품이 될 때도 있다. 한마디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책과 관련한 나름의 상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신동섭 ‘책의 이면’)

자칭‘글쓰기 광(狂)’이라는 벨기에 작가 아멜리 노통브의 희곡 ‘불쏘시개’도 책 관련 상념의 맨 꼭대기쯤 올려놓은들 큰 문제가 없는 작품이다. 기상천외한 구성에 대화는 발랄하다. 상황은 춥고 어둡지만 책을 읽는 독자의 머리엔 지적 즐거움이 가득 차는 기쁨을 준다. “잘 쓰인 희곡은 극장에서 상연되는 것보다 서재에서 상연되는 게 훨씬 아름답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다.



때는 현대의 어느 한 시점, 겨울. 벌써 2년째 전쟁 중이다. 밖에는 폭탄과 총알이 날아다니는데다 살을 에는 추위마저 기승을 부린다. 잦은 폭격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대학교 주변 문학담당 교수 집에 젊은 조교와 그의 여자친구 등 3명이 숨어 지낸다. 젊은 남녀는 전쟁으로 잠잘 곳을 잃었다. 이들은 그동안 폭격으로 허물어진 건물의 기둥 따위를 구해와 간신히 추위를 면했지만 이젠 그것도 다 떨어졌다. 그런 어느 날, 50대 교수와 조교 다니엘이 말다툼을 하는 서재에 조교의 여자친구 마리나가 들어와 난로에 손을 대본다.

아멜리 노통브의 기상천외한 희곡 ‘불쏘시개’

남홍, 봄, 200×250cm, 캔버스에 아크릴, 2005


# 마리나: 선생님, 난로가 꺼졌는데요.
교수: 마리나, 나도 알고 있네. 이제 더 태울 게 없네.
마리나: (서가를 바라보면서) 저건요?
교수: 저 선반을? 저건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네.
마리나: 아니요. 책이요.
…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다니엘: 그건 불쏘시개로 쓸 수 없지, 마리나.
마리나: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러긴 해. 하지만 책들은 아주 잘 타.
교수: 만일 우리가 책들을 불태우기 시작하면, 그땐 정말로 전쟁에서 질지도 몰라.
마리나: 우린 이미 전쟁에서 졌어요.

# 마리나: 선생님은 지금 제가 책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죠. 책을 불쏘시개로 쓰자고 했으니까요. 저는 오히려 선생님이 책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언제나 책을 논문을 쓰는 자료로만, 그러니까 자신이 한 단계 나아가는 도구로만 생각했을 따름이니까요.

# 교수: 우리 아가씨를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서 부담 없이 책을 불태우라는 말이군. 자네 계산은 한참 빗나가 있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살아남으려고 기를 쓴다면, 아마 우리의 저급한 야망에, 없어서는 안 될 저 책들을 불태우지는 않을 걸세, 마리나. 바로 자네를 불태워 없애는 일이 벌어질걸. 왜냐하면 마리나, 자넨 우리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까.

‘책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
위의 역설과 딜레마로 점철된 토막 대화를 통해 우리는 책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 상징성을 엿볼 수 있다. 책을 불태우면 전쟁에 진다는 상징, 책을 태우면 사람을 태우는 상황으로 갈 거라는 암시, 학자들이 책을 한 단계 나아가는 도구로만 여긴다는 지적에 이르기까지….

희곡의 끝 부분에선 상황이 역전된다. 처음 책을 태우면 안 된다고 고집했던 교수는 추위에 못이겨 마지막 한 권 남은 책마저 태우겠다고 하고 마리나는 “그건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아름다움”이라며 태우지 말 것을 간청한다. 나아가 “우리는 오랫동안 더 이상 없을 거고 이 책은 우리가 죽고 나서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절규한다. 그러나 책은 끝내 난로에 던져지고 폭탄과 총알이 난무하는 밖으로 울부짖으며 뛰쳐나가는 마리나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독자들은 다시 한 번 ‘책이란 무엇인가’란 상념에 빠져들게 될 것 같다. 열린책들 간, 함유선 옮김.
지은이 아멜리 노통브

아멜리 노통브의 기상천외한 희곡 ‘불쏘시개’
67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다. 벨기에 외교관이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중국, 미국, 방글라데시, 보르네오, 라오스 등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25세에 발표한 ‘살인자의 건강법’으로 ‘천재의 탄생’이라는 비평계의 찬사를 받으면서 상업적 성공까지 거두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프랑스 학술원 소설 대상을, ‘오후 네시’로는 파리 프르미에르상을 받았다. 현재 브뤼셀과 파리를 오가며 왕성하게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그린이 남홍

파리8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칸 국제그랑프리미술제에서 1등상을, 프랑스 문화협회로부터 황금 캔버스상을 수상했다. 불탄 한지 조각을 캔버스에 붙이는 등 전통적 소지 의식(기원을 담은 종이를 태워 하늘로 올려 보내는 행위)에서 착안한 작품을 발표해 ‘불과 재의 시인’으로 불린다.



여성동아 2007년 5월 5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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