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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넘어

남편과의 사별 고통 딛고 성악가로 제2 인생 꽃피우는 소프라노 유현아

글·송화선 기자 / 사진·EMI 제공

입력 2006.12.22 15:31:00

남편이 5개월 된 아들을 남겨두고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뒤늦게 음악을 시작해 세계적인 성악가로 성장한 한 재미교포 소프라노의 사연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12월 세계무대 데뷔 음반을 내는 소프라노 유현아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남편과의 사별 고통 딛고 성악가로 제2 인생 꽃피우는 소프라노 유현아

소프라노 유현아(38)는 아직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그는 12월 세계적인 음반사 EMI 클래식 본사에서 음반을 내는 최초의 한국 출신 소프라노다. 지금까지 EMI에서 음반을 낸 한국인이 장영주, 장한나, 정경화 정도에 불과한 걸 보면 유현아가 세계무대에서 갖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성악가로 뉴욕 무대에 데뷔한 것이 지난 2004년이라는 점이다. 그는 불과 2년 만인 올 여름,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린 ‘모스틀리 모차르트 페스티벌’에서 오페라 ‘자이데’ 주역을 맡으며 화제를 모았다. 미국 일간지 ‘볼티모어 선’ 지는 유현아에 대해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클래식 보컬리스트 가운데 한 사람(one of America’s fastest-rising classical vocalists)”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주목받는 것은 이처럼 놀라운 노래 실력 때문만은 아니다. 빛나는 성공 뒤에 자리 잡고 있는 가슴 아픈 사연이 알려지면서 그는 더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25세의 나이에 음악공부를 시작한 사실이 미국 한 일간지의 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
한국에서 태어난 유현아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 건 중학생 때인 지난 81년.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버지니아주로 이주했다고 한다. 5남매 가운데 둘째로 어릴 때부터 밝고 명랑한 성격이던 그는 어렵지 않게 미국생활에 적응했고, 성가대에서 늘 독창을 도맡을 만큼 노래 실력이 뛰어나 주위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내심 그가 성악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의 꿈은 따로 있었다. ‘하느님의 손’이 돼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것. 그는 의학전문대학원 진학을 위해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기로 하고, 텍사스주립대 분자생물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며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같은 대학 컴퓨터공학과 박사과정 유학생이던 유영호씨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3년 반 동안 사랑을 나눈 뒤, 91년 결혼식을 올린 이들은 남편 유씨가 취직한 보잉사가 있는 필라델피아로 이사했다. 미혼시절 ‘박현아’였던 그는 이때부터 ‘유현아’가 됐다.

남편과의 사별 고통 딛고 성악가로 제2 인생 꽃피우는 소프라노 유현아

말보로 뮤직 페스티벌 행정감독 토니 체치아와 함께 한 유현아(맨 위)와 뉴잉글랜드 바흐 뮤직 페스티벌 리허설을 하고 있는 모습(위).


결혼 2주년 기념일 앞두고 일어난 끔찍한 사고, 시련 이기기 위해 노래 시작
“92년 남편을 똑 닮은 아들 다니엘이 태어났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죠. 우린 참 잘 맞았거든요.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눠도 더 할 얘기가 샘솟을 정도로요.”
하지만 행복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이듬해 2월14일, 결혼기념일을 2주 앞둔 밸런타인데이에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날 오후 6시 반쯤 남편과 함께 다니엘을 데리고 교회에 갔어요. 성가대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죠. 이미 해가 지고 추운 날이었는데, 당시 5개월 된 다니엘이 카시트에 앉은 채 잠이 든 거예요. 남편이 자신은 다니엘을 돌보겠다며 저 먼저 교회에 들어가라고 했죠. 교회에 들어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남편은 차 밖에 나와 혼자 찬송가책을 보며 노래연습을 시작하고 있었어요.”

남편과의 사별 고통 딛고 성악가로 제2 인생 꽃피우는 소프라노 유현아

훌쩍 자란 아들 다니엘(아래), 아버지·미국 출신의 세계적 피아니스트 리처드 구드와 함께 한 유현아(맨 아래).


그게 유현아가 본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교회에 들어가고 채 15분도 지나지 않아 밖에서 총성이 들린 것이다. 그가 뛰쳐나왔을 때 이미 유씨는 세 발의 총을 맞고, 그 가운데 두 발에 심장을 관통당한 상태로 피를 흘린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해 필라델피아에서 일어난 최초의 차량 탈취사건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범인은 10대 청소년 두 명이었어요. 그들이 보기에 우리 차는 좋은 사냥감이었겠죠. 산 지 얼마 안된 새 차인데다 시동이 걸려있고, 운전자는 밖에 있었으니까요. 남편은 차 안에 잠들어 있는 다니엘을 지키기 위해 그들에게 덤벼들었다가 총을 맞은 거예요.”
다행히 다니엘은 몇 시간 뒤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한 어두운 뒷골목의 쓰레기통 옆에서 카시트에 태워진 채로 발견됐다고 한다. FBI까지 뛰어든 수사 끝에 범인도 나흘 만에 잡혔다. 하지만 유현아의 삶은 이미 남편이 쓰러진 순간 산산이 부서진 상태였다.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하루에 몇 번씩 울다 지쳐 기절을 했죠. 전 차라리 쓰러지는 게 좋았어요. 꿈속에서는 남편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현실처럼 생생한 꿈속에서 남편은 늘 건강한 모습으로 제 곁에 있었죠. 그래서 ‘당신 안 죽은 거지? 우리 계속 같이 사는 거지?’ 하고 얘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잠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 있는 거예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한 상태로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갔어요.”
그때 그를 다시 살린 건 가족의 사랑이었다고 한다. 애틀랜타에서 목사로 활동하던 아버지는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어머니와 함께 필라델피아로 날아왔다고. 그리고 지금까지 매일 새벽 그를 위해 기도하며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피바디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언니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노래를 해보라는 거였다.
“음악을 통해 고통을 치유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저도 어느 정도 슬픔을 추스른 뒤 다니엘을 위해서라도 무엇이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무렵이었죠. 그해 5월 추가 오디션을 통해 피바디 음대에 합격했고, 그때부터 노래를 불렀어요.”
출발은 늦었지만, 성장속도는 빨랐다. 학부 4년 과정을 3년 만에, 석사과정은 1년 만에 마친 것이다. 98년 네덜란드 국제 성악 콩쿠르와 99년 뉴욕의 월터 나움버그 콩쿠르에 잇따라 입상했고, 2003년에는 전 세계의 유망한 젊은 음악가에게 수여하는 상인 영국의 볼레티 뷰토니 트러스트 상(賞)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오는 12월, 세계적 음반사 EMI를 통해 바흐의 종교곡과 모차르트의 아리아가 담긴 데뷔 음반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노래를 부르며, 때로는 음악이 의학보다 더 큰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실 저는 노래하다 많이 울어요. 특히 바흐의 수난곡을 부를 때는 꼭 티슈를 악보 속에 넣어가죠. 예외 없이 울거든요.(웃음) 그러고 나면 그 음악의 힘이 제 안에 들어와 저를 완전히 정화시키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 그는 음악을 시작한 뒤부터 “당신의 노래를 듣고 펑펑 울었다”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이들을 자주 만난다고 한다.
유현아는 12월27·28일 첫 내한공연을 연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 음악회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협연하는 것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현아’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그는, 이번 공연을 한 뒤 자랄수록 점점 더 남편을 닮아가는 다니엘과 함께 한국에 남아있는 남편의 흔적을 돌아보고 가고 싶다고 말했다.
“전 어린 나이에 식구들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지만, 남편은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왔잖아요. 그의 마음속엔 늘 우리나라가 있었어요. 그 땅에서 공연하게 돼 마음이 새롭습니다. 이곳에서 공연하며 음악이 주는 기쁨과 희망, 치유의 힘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여성동아 2006년 12월 5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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