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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딛고

양희은 여자·가수로서의 인생 풀고백

글·송화선 기자 / 사진·김성남, 지호영 기자

입력 2006.12.22 14:59:00

‘아침이슬’의 가수 양희은이 데뷔 35주년을 맞았다. 지난 세월 동안 숱한 시련을 겪으며 살아온 그는 “힘겨운 세월이었지만 그 아픔이 내게 노래를 주었다”고 말했다. “내가 겪은 고통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내 음악의 자산”이라고 말하는 양희은을 만났다.
양희은 여자·가수로서의 인생 풀고백

양희은(54)은 70년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다. 그 시절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통기타를 튕기며 노래하는 그에게선 풋풋한 젊음의 냄새가 났다. 30여년이 흐른 지금 그는 우리 시대 ‘아줌마’의 아이콘이다. 투엑스라지(XXL) 사이즈의 옷을 입고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세상 사람들의 아픔을 품고 보듬는 사람. 70년대 청년들이 모이는 곳 어디서나 그의 노래 ‘아침이슬’이 울려퍼졌듯, 이젠 비공식 집계로 하루 1천만 명이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는다. 변하지 않은 것은 그가 여전히 노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뿐이다.
“단 한 번도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제게 노래는 꼭 해야 하는 숙제 같았죠. 살기 위해 노래했고, 그래서 가끔은 무대를 떠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제와 돌아보면 노래가 있었기에 삶이 있었고, 또 제 삶이 바로 노래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노래 인생은 사실 불우한 가정사 때문에 시작됐다. 양희은은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아버지와 디자이너로 활동할 만큼 신여성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큰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에게 팝송을 배우는 등 구김살 없이 자랐다고 한다. 하지만 양희은이 열한 살 나던 해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의 행복은 무너지고 말았다. 부모가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던 이혼을 선택한 것. 소녀 양희은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아버지는 그렇게 가정을 떠난 뒤 2년 만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린 시절 저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런 존재에게 배신당한 데 대한 상처가 오랫동안 저를 따라다녔죠.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인 서른아홉을 넘기고부터였어요. 그 때가 되니 비로소 그 나이가 얼마나 어린 나이인지, 그리고 그 나이에 인생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해지는지 알게 됐거든요. 그러면서 평생 미워하고 원망했던 아버지를 용서하게 됐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에게 닥친 현실은 가혹하기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큰 빚까지 떠안으면서 졸지에 집안 살림을 꾸리는 ‘소녀 가장’이 된 것이다. 경기여고 재학시절 학교에서 가장 노래 잘 하는 아이로 손꼽혔고, 영어웅변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수상할 만큼 다방면에 두각을 나타내던 그는 대학진학을 포기한 채 입주 과외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다녔다고 한다.

큰 빚 떠안고 생계 꾸리기 위해 시작한 노래 인생
양희은 여자·가수로서의 인생 풀고백

가수 데뷔 35주년을 맞은 양희은.


“친구들이 많이 안타까워했어요. 그중 몇몇이 당시 대학생들이 주로 다니던 명동 ‘청개구리’ 카페로 절 불렀죠. 기분전환이나 하라는 뜻이었을 거예요. 거기서 우연히 노래를 했고, 그걸 본 한 방송사 PD의 권유로 방송에 출연하면서 노래를 시작했어요.”
그는 당시 서울에서 제일 잘나가는 레스토랑이던 명동 오비스 캐빈에서 노래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고 한다. 매일 출근부 도장을 찍고, 식권 30장을 받아 생활하는 ‘월급쟁이 가수’였다. 기타와 노래로 서로 뜻이 통했던 김민기, 송창식, 윤형주, 서유석 등 젊은 음악인들을 만나 함께 어울리면서 김민기의 노래 ‘아침이슬’이 실린 데뷔앨범을 낸 게 71년. 늘 배고프고 바빴던 양희은은 이 음반과 함께 그 시대 청년문화의 상징이 됐고, TV와 라디오, 대학가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스타’로 떠올랐다.
“저를 보고 ‘젊은 시절에 정말 잘나가셨잖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사실 전 전혀 몰랐어요. 자신의 삶이 가장 찬란할 때는 그걸 알지 못한다는 게 인생의 비밀이죠. 누구나 모든 것이 지나고 나야 비로소 ‘아, 그때 내가 아름다웠구나, 찬란했구나’라고 느끼듯이, 저도 그랬어요. 그때가 제 인생의 빛나는 순간이라는 걸 몰랐죠. 늘 가난하고 힘들기만 했어요.”
뒤늦게 대학에 들어갔지만, 집안을 꾸리고 빚을 갚느라 휴학과 복학을 반복한 끝에 8년 만에 졸업했다고 한다. 그 사이 세상에서 양희은은 ‘불온한’ 이름이 돼 있었다. 73년 정부에 의해 건전가요로도 선정됐던 ‘아침이슬’이 어느 날 갑자기 금지곡으로 묶이면서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 가사 속의 ‘붉은 태양’이 북쪽 인사를 암시한다는 게 이유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는 이유로, ‘작은 연못’은 ‘정권을 비꼰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서울로 가는 길’ ‘백구’ ‘늙은 군인의 노래’ 등 그가 발표한 2백여 곡 가운데 무려 30여 곡이 금지곡이 됐고, 그는 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양희은은 “어린 시절부터 늘 노래는 참여가 아니라 서정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침이슬’을 부른 것도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노래가 자신의 감수성에 와 닿았기 때문이라고. 데모 현장에서 처음 ‘아침이슬’을 들었을 때 그는 ‘같은 노래를 대하는 사람의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다니’ 하며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소녀가장이 밥줄로 부른 노래”를 사람들은 “투쟁의 도구”로 썼고, 그것은 그의 삶을 옥죄기 시작했다. ‘요주의 인물’로 찍히면서 한창 진행하던 라디오 방송에서 “네 잘못은 아니지만 당분간 쉬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도청과 감시도 뒤따랐고, TV 무대엔 아예 설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모든 상황에 지쳐가기 시작했어요. 마침 빚도 다 갚았고, 이젠 내 어깨 위에 얹힌 짐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81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어요. 14개월 동안 혼자 세상을 떠돌아다녔습니다.”
10년간 소녀가장으로 살아온 스스로에게 준 휴가였다. 그러나 “이제 내 인생에도 젊음이 시작되는구나” 느낀 바로 그 순간, 그는 삶의 마지막을 선고받는다. 암이었다.
“여행에서 갓 돌아온 82년 6월, 임신한 동생을 따라 산부인과에 갔어요. 의사가 고등학교 선배라 원래 잘 아는 분이었는데, 저를 딱 보더니 ‘너 얼굴이 이상하다. 좀 누워봐’ 하더라고요. 검사를 해보니 몸속에 종양이 세 개나 있었어요. 난소암 말기라 세 달밖에 못 산다는 진단을 받았죠.”

서른한 살 나이에 3개월 시한부 인생 선고 받고, 두 차례 암 수술로 아이 낳을 수 없게 돼
양희은 여자·가수로서의 인생 풀고백

양희은은 “여러 시련을 통해 비로소 진정으로 노래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서른한 살 때의 일이다. 의사는 결혼하지 않은 그를 위해 최대한 난소를 살리는 방향으로 수술했고, 양희은은 기적적으로 병을 이겨냈다고 한다. 하지만 암은 89년, 결혼한 지 2년 만에 재발하고 말았다. 그는 두 번째 수술과정에서 자궁을 제거해야 했고,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됐다.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이주한 상태였던 그는 낯선 나라에서 홀로 몸을 추스르며 고독과 마음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보보와 미미라고 이름 붙인 개 두 마리 외에는 하루 종일 말할 사람 한 명 없는 나날이었다. 양희은은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www.yangheeun.co.kr)에 보보와 미미의 사진을 올리고는 “외롭고 친정 식구 하나 없는 내게 얘네 둘은 참으로 많은 웃음을 주었다. 어떤 땐 종일토록 한마디 말도 안 한 채 하루를 나는데 이놈들 덕분에 입에서 군내도 안 나고 산책도 같이 하고…”라고 쓴 적이 있다. 후배가 “난 이담에 죽으면 언니네 집 보보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라고 말했을 만큼 개들에게 끔찍한 사랑을 베풀었다고. 양희은과 함께 16년, 17년을 살다가 2004년과 2005년 차례로 세상을 뜬 이 개들은 아이가 없는 그에게 자식이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말벗이었다.
“암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사람이 정리가 됐거든요. 그전에는 참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을 했는데, 아픈 뒤부터 집에 머무르면서 관심을 내 안에 있는 것들로 돌리게 됐죠. 그런 면에서 병을 일찍 앓은 건 어쩌면 제게 축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한결 평화롭고 여유로워진 모습으로 양희은은 93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병마와 싸우며 몸무게가 20kg 이상 불어난 ‘아줌마’의 모습이었지만, 사람들은 아픔을 이겨낸 뒤 더 깊고 맑아진 그의 목소리를 반가워했다. 그러나 라디오 방송, 콘서트 등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하던 무렵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이번엔 남편이 쓰러진 것이다.
“97년 여름, 갑자기 남편에게 다발성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왔어요. 운동선수 출신이라 그때까지도 일주일에 닷새씩 테니스를 칠 만큼 건강했는데, 갑자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돼버렸죠. 온몸의 관절이 다 아프니까, 숟가락도 못 들고, 변기에도 못 앉고, 심지어 치약도 못 짜는 거예요. 어느 날 아침, 남편이 침대에서 혼자 일어나보려고 꿈틀꿈틀, 정말 벌레처럼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전 완전히 무너져내렸어요.”
‘차라리 내가 아프고 싶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생각할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고 한다. 유명하다는 병원을 다 찾아다녔지만 차도가 없었다. 진통제도 듣지 않아, 아픔이 찾아올 때면 몸이 데일 정도로 뜨거운 물에 통증 부위를 담그고 그 고통으로 관절염의 통증을 잊는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양희은은 CBS 라디오 ‘양희은의 정보시대’와 SBS 라디오 ‘2시의 친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방송을 하기 위해 집을 나오면 늘 운전대를 잡고는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제가 일하러 나가있는 동안엔 친정어머니가 남편을 돌봤어요. 모든 일을 그만두고 남편 곁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죠.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제가 버티지 않으면, 우리 둘 다 무너져버릴 것 같았으니까요.”
양희은은 “아내가 신장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면 남편은 두말없이 신장 한쪽을 떼어주지만, 아내는 그러지 않는다더라”고 말했다.
“내가 아프면 내 새끼는 어떡하나, 저 사람은 이미 저렇게 아픈 사람인데 신장 한쪽 주고 나까지 비실거리면 우리 아이는 어떻게 먹여 살리나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래요. 그 말을 듣고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까지 일을 놓고 들어앉아버리면, 우리 둘 다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전 속상해 엉엉 울다가도 때 되면 밥 챙겨 먹고, 밤이면 잤어요. 그리고 아침이면 다시 일을 하러 집을 나섰죠.”

양희은은 98년 ‘우리는 지금 한계령을 넘는다’는 제목의 콘서트를 연 적이 있다. 그때 실은 자신의 인생도 한계령을 넘고 있었던 것. 양희은이 직접 가사를 써서 35주년 기념 앨범 ‘양희은 35’에 실은 노래 ‘당신만 있어준다면’은 이 무렵 그가 겪은 아픔을 담고 있다. 그는 “세상 부귀영화도 돈과 명예도 당신, 당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죠. 세상 다 준다 해도 세상 영원타 해도 당신, 당신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죠.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세월 이젠 알아요. 그 추억 소중하단 걸. 가진 건 없어도 정말 행복했었죠. 우리 아프지 말아요. 먼저 가지 말아요. 이대로도 좋아요. 아무 바람 없어요. 당신만 있어준다면”이라고 노래했다. 이 가사는 그대로 그의 마음이었다고 한다.
“노래를 만들면서 몇 번이나 눈물이 나서 가만히 앉아있곤 했어요. 그때 생각이 나서 참을 수 없이 힘들었거든요. 남편이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 힘들다가도, 저 사람이 저러다 먼저 떠나버리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하면 덜컥 겁이 났어요.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다. 제발 먼저 가지만 말아달라’는 게 그때 제 유일한 바람이었죠.”
그런데 또 한 번 기적이 찾아왔다. 1년 반 동안 모진 고통에 시달리던 중 지인의 소개로 만난 한 봉독요법 통증 치료 전문의를 통해 남편이 병을 이겨낸 것이다. 아플 때는 차에 열쇠를 꽂아놓아도 돌릴 힘이 없어 시동조차 걸지 못하던 남편이 이제 혼자 운전을 하고 다닐 수 있을 만큼 회복됐다고 한다. 지금 그는 양희은의 앨범을 제작하는 음반사 ‘옹달샘’을 운영하면서, 그의 음악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모니터링을 해주고 있다고.

갑작스레 쓰러진 남편, 극심한 고통 함께 견뎌내며 얻은 깨달음…
“지금도 아침에 치약을 짜다가 그 시절이 떠오르면 혼자 울곤 한다”고 말하는 양희은의 눈동자는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할 때조차 씩씩함을 잃지 않던 그에게, 남편의 병은 지금껏 건너온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가장 깊은 시련이었던 것이다. “그 고통스럽던 시간을 어떻게 이겨냈느냐”고 묻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아무것도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저는 ‘시련의 끝에서 희망을 봤어요’라거나 ‘어려웠지만 최선을 다해 극복했어요’ 같은 말을 믿지 않아요. 삶과 죽음의 문제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최소한 저는 그랬어요. 아프면 아프고, 서러우면 그냥 서럽더라고요. 철퍼덕 주저앉아 ‘도대체 희망이 어디 있니’ 하면서 울기만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아파도 시간은 흘러가데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죠. 전 아픔을 이겨낸 게 아니라 그냥 견뎠을 뿐이에요.”
이 과정에서 그가 얻은 건 “내가 겪은 아픔과 시련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온전한 나의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있어 자신이 아직까지 노래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고.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으면 제 아픔이 다른 이들과 공명하는 게 느껴져요. 마치 파장처럼 은은하게 모두를 감싸는, 그런 ‘아픔의 힘’ 같은 거요. ‘아름다움은 슬픔, 아름다움은 아픔’이라는 어느 시 구절처럼, 아프고 슬픈 노래가 아름다운 건 그 안에 모두 함께 느낄 수 있는 자기만의 삶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양희은은 “꽃은 물, 바람, 햇빛이 모자랄 때 자기 생명의 최대치를 꽃 피운다”고 말했다. 결핍만큼 커다란 에너지는 세상에 없다고도 했다. 그래서 가수 인생 35주년을 맞은 오늘, 그는 여전히 노래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깊고 따뜻한 목소리로, 시련 속에서 건져올린 그만의 눈부신 힘을 모아서 말이다.
양희은은 12월14·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 35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고, 또 한 번 그의 삶을 많은 이들과 나눌 계획이다.

여성동아 2006년 12월 5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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