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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에 앞장선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

모교 서울대에서 이화여대로 옮겨 강의하는 사연

글·구가인 기자 / 사진·박해윤 기자, 동아일보 출판사진팀

입력 2006.11.24 10:59:00

지난 2000년 “여성의 시대가 오는 건 생물학적 필연” “여성의 시대에는 남성도 화장을 할 것” 등의 주장으로 화제를 모은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 호주제 폐지에도 앞장섰던 그가 올해 초 모교인 서울대를 떠나 이화여대로 옮겨 여대생을 대상으로 강의하며 느끼는 소회, 포부 등을 들려줬다.
호주제 폐지에 앞장선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

이화여대 자연사박물관에서 만난 최재천 교수(52)는 하루 전 전화통화에서 들은 것과 달리 목소리가 다소 잠긴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에 태어난 네 마리의 강아지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다고 한다. 암수 두 마리에 더해 네 마리 새끼 강아지들까지 총 여섯 마리의 개를 키우게 됐다며 “큰일났다”고 말하면서도 얼굴 가득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최 교수는 동물행동학계의 세계적 권위자다. 서울대 동물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대학과 미시건대에서 교수생활을 한 뒤 지난 94년 한국으로 돌아와 올해 초 이화여대로 옮기기 전까지 10여 년간 서울대에서 강의를 해왔다.
일반인들에게 그는 TV 강연과 신문 칼럼 등을 통해 흥미로운 동물의 세계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는 친숙한 과학자이자, 페미니스트다. 지난 2000년 EBS ‘여성의 세기가 밝았다’라는 프로에서 “여성의 시대가 오는 건 생물학적 필연” “여성의 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할 것” 등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사회의 여성화에 대해 사회생물학적으로 명쾌하게 풀이했던 그는 2003년에는 헌법재판소에 ‘호주제 존폐에 대한 생물학적 의견서’를 제출해 호주제를 폐지시키는 데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거창한 이념이 있어서 호주제 문제에 뛰어든 건 아니었어요. 사실 자연계는 암컷이 번식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암컷 세상이거든요. 그래서 자연계에서 수컷은 잉여 존재인데 동물행동학을 공부하면서 우리 인간이 참 예외적인 문화를 가졌고, 신기한 동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중에서도 한국사회는 대단히 신기했고요.”
그러나 그의 “사회생물학적으로 호주제만큼 치명적인 모순이 있는 제도가 없다”는 발언은 열띤 반응을 불러왔다. 당시 최 교수는 그 때문에 많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
“방송에서 ‘자연계에 나가봐라, 만일 호주제를 자연계에 적용했다면 그 호주는 암컷이다’ 뭐 그런 종류의 얘기를 했더니, 그 다음 날부터 제 연구실에 비난과 욕이 섞인 전화가 쏟아졌어요. 그렇게 며칠을 시달리다가 어떤 전화를 받았죠. 50대 주부라고 자신을 소개하시는 분이었는데, ‘선생님은 어디 있다 오셨느냐, 내가 진작 이런 얘길 들었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다’며 몇 마디 하시더니 전화에 대고 대성통곡을 하셨어요. 그 뒤에도 남성들의 비난 전화와 함께 간간이 이런 여성분들의 전화가 왔고 그 과정에서 ‘아, 이게(호주제) 참 심각한 문제구나’ 하고 깨닫게 됐죠.”
보수적인 시골집안의 장손으로 자신 역시 “굉장히 진보적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기 전까지 완벽한 마초였다”고 말하는 최 교수에게 미국 유학시절 만난 부인 채현경 교수(53)는 그의 가부장적인 사고와 함께 몸에 배어있는 생활습관까지 바꿔준 인물이다.
“당시 유학 갔던 학교에 한국 남성이 스무 명 정도라면 여성은 제 아내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어요. 제 인생에서 그렇게 치열한 경쟁률을 뚫어본 일도 드물어요(웃음). 하지만 결혼 초에는 많이 싸웠죠. 제 아내는 그 옛날 한국에서 어떻게 그런 가정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남녀 차별이 없는 집안에서 자란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반면 저는 장손이라고 할아버지와 따로 겸상을 받는 걸 당연히 여기는 집안에서 자랐으니 굉장히 달랐죠. 진보적인 여성과 살면서 저도 많이 변하게 됐어요(웃음).”
최 교수는 실제 한국의 전통적인 가부장제도와는 거리가 먼 가정생활을 해왔다. 지난 20여 년간 도맡아온 설거지를 어쩌다 아내가 할 때는 “성에 차지 않아 다시 한다”며 웃는 그는 미국에서 대학교수가 되자마자 아이를 키우느라 학업을 중단했던 아내를 학교로 돌려보냈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지방대 교수로 부임한 아내를 대신해 아들을 키우고 집안 살림을 꾸렸다고 한다.

호주제 폐지에 앞장선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

이화여대 음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부인 채현경 교수와 함께.


“유학 당시 아내가 아이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 적도 있고, 제 학교에 맞춰 옮겨다니는 등 많은 면에서 희생했어요. 한국에 온 뒤 아내는 지방에 있는 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니까 아이와 함께 지내는 제가 집에 일찍 가서 아이를 봐야 했죠. 다만 교수회의 같은 게 저녁에 잡혀서 초기엔 애를 먹었어요. 오후에 아들 데리러 가야 하는데 갑자기 그날 오후 5시에 회의가 있다고 하니까요. 가장 졸병 격이었던 제가 ‘저는 아이가 기다리고 있어서 가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회의에 빠지면 나이 드신 선생님들은 이해하지 못했죠. 그러다 회의가 점심으로 바뀌게 됐는데 저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다 좋아하시더라고요. 집에 일찍 들어가는 건 아이뿐 아니라 저한테도 좋은 일이었어요. 아이를 재운 뒤엔 제 공부를 했거든요. 보통 밤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이 세상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저만의 시간이 네 시간이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대놓고 말해요. 대한민국 남성들의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다 밤무대 때문이라고요.”
울산대 음대 학장을 지낸 부인 채현경 교수는 2년 전 자신의 모교인 이화여대로 옮겨왔다. 그리고 올해 초 남편인 최재천 교수까지 옮겨왔으니 부부가 한 대학에 둥지를 튼 셈이다.
“아내가 이곳(이화여대)으로 자리를 옮길 때 ‘남편도 오면 어떻겠느냐’는 얘기가 농담처럼 나왔나봐요. 말이 씨가 됐는지 지난해 가을 이화여대 측에서 연락을 해왔습니다. 처음엔 옮길 생각이 없었는데, 학교 측에서 제가 공부하는 분류학, 진화학, 생태학과 같은 분야를 키우겠다고 말했어요. 저로서야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내년에 이화여대에는 국내 처음으로 에코과학부가 생긴다. 에코과학부는 기존 생물학에서 한발 더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인 ‘생태’에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학문으로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학과의 교류도 시도할 예정이라고 한다.

패기가 펄펄 살아있는 여대생들
첫 학기에는 학부개설을 포함, 다른 준비사항으로 바빠 이번 가을학기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그에게 남녀공학에서 여대로 옮겨 강의하는 소감과 이화여대 학생들만의 특징에 대해 물었다.
“서울대에 있을 때도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많이 해서 그런지 그리 생소한 느낌은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 남녀차별적인 행동이나 발언을 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까 늘 조심하며 강의합니다. 제가 꽤 여성친화적인 남성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어려서 받은 남성중심적인 교육의 흔적을 무의식 수준에서까지 교정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니까요. 이화여대 학생들은 대단히 발랄하고 진취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왠지 모르게 남녀차별적인 사회현실을 이미 상당 부분 받아들인 듯 행동하는 남녀공학 여학생들보다, 나쁘게 말하면 아직 세상을 모르는 듯, 좋게 말하면 아직도 패기가 펄펄 살아있는 듯 보입니다. 어쩌면 이게 바로 여학교의 힘일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모른 채’ 사회에 나가면 처음에는 어려움이 크겠지요. 하지만 그걸 다 극복하고 나면 정말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많은 여성지도자가 여대 출신인 까닭도 이런 데 있는 것 같아요.”
상아탑에 틀어박혀 있는 대신 끊임없이 대중과의 소통을 지향해온 최재천 교수는 “과학자에게는 모든 대중이 과학적인 마인드를 가질 수 있도록 소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의 좌우명은 ‘알면 사랑한다’. 자연도 사람도 알고 이해하면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지금 저희 자연사박물관에서 ‘개미특별전’이 열리고 있는데 어떤 아이는 개미가 징그럽다고 막 소리 지르기도 해요. 그런데 한 시간쯤 개미에 대해 강의하고 난 뒤 개미를 보여주면서 ‘개미집을 만들고 싶은데 도와줄 사람?’ 그러면 처음엔 무서워하던 아이들까지 모두 다가와요. 모를 때는 막연한 공포감이 있지만 개미가 어떤 존재라는 걸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사랑이 싹트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저는 ‘끝까지 알아야 한다’ 주의예요. 그게 바로 과학인 거죠. 과학은 앎의 학문이니까요. 자연에 대해 끝까지 알고, 내가 알게 된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리면 언젠가는 국민 대다수가 자연에 대해 많이 알고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요?”

여성동아 2006년 11월 5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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