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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Art &Culture

‘제 2의 최승희’백향주

남한에서 가정 꾸리고 새롭게 출발한 일본 조총련 출신 춤꾼

글·송화선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06. 08. 18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평가를 받으며 화제를 모은 재일교포 출신 무용가 백향주. 일본에서 태어나 조총련계 예술인으로 활동하다 남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그는 이제 한반도의 남쪽에서 새로운 춤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제 2의 최승희’백향주

재일교포 4세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무용가 백향주(31)는 북한 금강산가극단 무용수이던 아버지 백홍천씨 손에 이끌려 걸음마를 배우기 전부터 춤을 익혔다고 한다. 조총련계 학교에서 ‘무용 영재’로 인정받다 열한 살 때는 북한 김일성 전 주석 앞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이것을 계기로 떠난 평양 무용 유학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최승희의 양자이며 평양 만수대예술단 단장인 무용가 김해춘씨를 만나 최승희 춤을 전수받은 것. 이때부터 그의 춤 인생은 활짝 꽃을 피웠다. 91년 중국 전국무용 콩쿠르 주니어 부문에서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금메달을 수상했고, 전교생을 국비로 지도하는 중국 국립중앙민족대학 무용학부에 최연소이자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입학했다. 지난 98년 그가 조선 국적 무용가로는 처음으로 내한 공연을 열었을 때 한국 무용계는 “전설적인 신무용가 최승희의 재래(再來)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풍부한 표현력과 화려한 기교가 빛났다”(문화일보)며 찬사를 보냈다.
백향주를 만나기 전 알고 있던 정보는 이처럼 화려하고 빛나는 것이 전부였다. 젊고 촉망받는 세계적 무용가. 그러나 이 찬란한 명성 뒤로 드리워진 그늘이 누구보다도 짙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백향주를 떠나지 않은 그림자는 ‘고향’이었다.
백향주의 고향은 모두 세 개. 그의 증조부는 경북 경주에서 살다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 1세다.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지만, 그는 평생을 ‘경주 사람’으로 살았고 그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백향주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아버지로 이어져 내려온 ‘고향’의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 고향은 언제나 경주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의 국적은 조선. 한반도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갈라지기 전, 조선 왕조가 다스리던 그 ‘조선’을 국적으로 삼은 증조부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백향주가 태어난 75년 조선은 이미 지구상에 없는 나라였고, ‘통일 조선’을 꿈꾸며 여전히 ‘조선’ 국적을 유지한 재일교포 가운데 상당수는 당시 통일문제와 재일교포 지원에 좀 더 적극적이던 북한 계열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에 속해 있었다. 백향주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조총련 민족학교의 교사였고, 아버지는 조총련계 학생들에게 민족 무용을 가르치는 사설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백향주는 조총련 학교에 다니고, 북한에서 무용을 배웠다. 그를 ‘제2의 최승희’로 태어나게 한 평양은 그의 또 다른 고향이 됐다. 물론 백향주가 나고 자란 일본 도쿄 역시 그에게는 고향이었다.
“모든 곳에 속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아무 데도 속할 수 없는 존재였던 거죠. 전 할아버지대부터 일본에서 태어난, 어쩌면 완전한 일본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는데도 늘 이방인으로 떠돌았어요. 당시 일본에서 조선 학생들은 ‘조센징’이라는 놀림을 받거나 지나다니다 돌멩이에 맞기 일쑤였거든요. 민족적인 열등감과 차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늘 위축돼 있었죠. 고향이 그리웠어요.”
초등학교 시절 건너간 평양은 그를 ‘조선인 천재 무용수’로 환영했지만, 거기서도 백향주는 안식을 찾을 수 없었다. 일본어를 사용하던 그에게 처음 배우는 조선어는 낯설었고, 어린 시절부터 그렸던 진짜 고향 남쪽과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으로 민족과 고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열다섯 살 때. 중국 전국무용콩쿠르에 출전하기 위해 베이징을 찾으면서부터였다.
“다민족 국가 중국은 제게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었어요. 거기서는 누구도 제게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남한을 그리워하는지, 북한에서 교육받았는지 따위를 묻지 않았거든요. 저는 그저 무용인 백향주일 뿐이었어요. 진정한 자유와 해방감을 느꼈죠.”

‘제 2의 최승희’백향주

백향주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편 이용권씨와 딸 유찬이(좌).그의 공연 소식을 알리는 일본 팸플릿과 잡지들(우).


백향주는 베이징에 남았고 중국 국립중앙민족대학 무용학부에서 춤을 배웠다. 어린 나이에 언어도, 기후도 낯선 중국 땅에서 혼자 살아가며 겪은 고생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백향주는 “아무 걱정 없이 오로지 춤만 추던 그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가 진짜 고향, 한반도의 남쪽을 찾은 건 훨씬 뒤의 일이다. 97년 일본 도쿄TV에서 그의 남다른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한국에 가보고 싶지 않냐’고 제안한 것이다.
“가고 싶었지만 조선 국적을 가진 ‘조총련계’ 무용수였기 때문에 한국에 들어오는 게 거의 불가능했어요.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한 입국’이라고 설명하며 행정적인 일을 다 맡아 해결해줬죠. 제가 북한 국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입국을 불허할 근거는 없었거든요.”
비자는 나왔지만, 한국행의 난관은 아직 남아있었다. 집안의 반대였다. 당시 재일교포 사회는 조총련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으로 양분돼 있었고, 조총련계 동포들은 남한을 “남쪽 사람들이 북쪽 사람을 ‘빨갱이’라고 생각했듯” 왜곡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남쪽에 가려면 나와 인연을 끊고 가라”고 할 정도로 격렬히 그의 한국행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토록 어렵게 온 고향이었는데, 정작 서울에서의 며칠은 무척이나 평안했다. 그에게 ‘빨갱이’라고 달려드는 사람도 없었고, 돌도 날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98년 백향주가 처음으로 한국 무대에 선 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머니는 평생 직업이던 조총련 민족학교 교원 자리를 잃었고, 아버지의 무용연구소 역시 모든 ‘조선인’ 수강생이 그만둬 ‘개점휴업’ 상태가 된 것이다. 친척과 후원자들은 백향주를 ‘배신자’로 여겼고, 그는 졸지에 가정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돼야 했다.
“중립을 지키려고 하니 양쪽에서 압력이 들어왔어요. 다들 ‘넌 어느 쪽이냐’고 물었죠. 하지만 전 어느 한쪽에 소속되는 걸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어요. 그건 그저 살아남기 위한 비겁한 일같이 여겨졌거든요. 중국에서 이미 민족도 고향도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를 맛본 다음이었기 때문이죠. 공존과 평화, 자유로움에 대한 깨달음이 제겐 너무 소중해요. 제 마음속에서 한반도는, 동아시아는 다 하나예요.”

“남편, 아이와 함께하는 제2의 인생, ‘동북아시아 공동의 무용’ 만드는 게 꿈”
그런 백향주를 사랑한 남자는 그에게 ‘흐르는 섬’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울산 사나이’ 이용권씨(39). 두 사람은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예종) 전통예술원에서 처음 만났다. 남쪽에 남아있는 우리 춤의 뿌리와 이론적 기반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 2000년 말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예종에 입학한 백향주와 예술이론을 공부하기 위해 역시 같은 대학에 들어간 늦깎이 학생 이씨가 ‘예술사’ 강의실에서 마주친 것이다. 이씨가 본 백향주의 첫인상은 “참 공부에 열심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중국어와 일본어, 북한식 사투리가 뒤섞인 언어를 쓰는, 아직 우리말도 글도 서툰 사람이 항상 강의실에서 제일 눈에 띌 만큼 수업에 집중하고, 리포트를 제출할 때면 온갖 자료를 뒤져 40~50쪽씩 적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그의 학교생활을 도와주며 이씨는 자연스레 백향주가 “남다른 향기를 지닌,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때까지 한반도에 드리워진 역사의 무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 적 없던 이씨는 백향주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상처와 아픔까지 알게 되면서 그와 사랑에 빠졌다. 이씨의 사랑이 이렇게 자연스러웠던 것과 달리 백향주에게 이씨는 일종의 운명이었다고 한다.
“저한테 예지력 같은 게 좀 있거든요. 한국에 유학올 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이 많고 예술이론을 공부하는 한국 남자와 결혼할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어요. 학교에 가보니 그런 사람은 남편 한 사람뿐이더라고요(웃음).”
두 사람은 2004년 결혼식을 올렸다. 일본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공부하고 세계를 떠돌며 공연하던 백향주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과 함께 한국에 정착했다. 지난해 4월에는 귀염둥이 딸 유찬이도 낳았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무용수로서의 삶을 포기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하지만 최승희 선생님은 ‘여자에게 결혼과 출산은 권리’라고 말씀하셨죠. 저도 제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고요. 제가 춤을 추는 건 행복하기 위해서고, 결혼과 출산만큼 저를 행복하게 해주는 건 없으니까요. 유찬이를 낳은 건 제가 인생에서 한 일 가운데 가장 자랑스럽고 보람된 일이에요. 아직도 유찬이에게 모유를 먹이고 있는데, 아이가 절 꼭 안고 미소지을 때 느껴지는 그 벅찬 느낌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어요.”
결혼과 출산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해 백향주는 요즘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 연 ‘백향주 동아시아 춤 컴퍼니’ 연습실에서 하루 종일 춤에 매달리고 있다. 이씨는 아내를 돕기 위해 공부를 잠시 중단하고 그의 매니저를 맡았다. 이들 부부가 함께 만드는 첫 공연은 오는 9월 백암아트홀에서 열릴 예정. 백향주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기 위해 전통춤과 힙합댄스가 결합된 파격적인 무대를 꾸밀 계획이라고 한다.
“한국 국적을 얻고 새로운 가족과 함께 이곳에 정착했지만, 민족과 국적의 경계를 넘어 훨훨 날고 싶은 제 꿈은 아직 그대로예요. 북한에서는 지금도 공연 요청이 들어오고 있죠. 몸을 추스르고 다시 공연을 시작하면 북한 무대에도 꼭 설 겁니다. 남편이 지어준 ‘흐르는 섬’이라는 별명이 제겐 잘 맞는 것 같아요. 전 끊임없이 여행하니까요. 남한도 북한도 일본도 아닌, 하지만 그 모든 것의 힘이 살아있는 백향주만의 춤을 보여드릴게요.”
빛과 어둠을 동시에 안고 있는 백향주의 미소는 그의 의지만큼이나 깊고 단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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