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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궁금한 그녀

데뷔 15년 만에 문학상 수상, 일본에서 문학 한류 이끄는 최영미

글·이남희 기자 / 사진ㆍ박해윤 기자

2006. 07. 24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인 최영미씨가 데뷔 15년 만에 문학상을 받았다. 시집 ‘돼지들에게’로 지난 6월 중순 제13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한 것. 또한 지난해 일본에서 번역 출간된 그의 시집은 문학 한류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최씨의 요즘 생활 이야기를 들었다.

데뷔 15년 만에 문학상 수상, 일본에서 문학 한류 이끄는 최영미

최영미씨는 일본에서 번역 출간된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인기를 끌며 문학 한류를 주도하고 있다.


“우리의 몸은 움직이고 뛰고 환호하기 위한 것./ 서로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 놀며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 최선을 다한 패배는 승리만큼 아름다우며 / 최고의 선수는 반칙을 하지 않고 / 반칙도 게임의 일부임을 그대들은 보여주었지.” (‘정의는 축구장에만 있다’ 중)
한국 대표팀 축구선수들에게 꼭 들려주고픈 이 시를 쓴 이는 90년대 최고 베스트셀러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씨(45)다. 축구마니아인 그에게 올 6월은 잊지 못할 계절이다. 세계인의 축구 제전인 월드컵이 열리는 데 이어, 그가 7년 만에 펴낸 시집 ‘돼지들에게’로 제13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기 때문. 2006 독일월드컵 개막전이 열린 6월9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그는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들뜬 모습이었다.
“독일월드컵을 보려고 유럽으로 여행갈 준비를 하다가 수상 소식을 들었어요. 저는 학창시절 그 흔한 개근상 한 번 타지 못할 만큼 상복이 없는 사람이라 처음엔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죠. 폭풍의 80년대를 방황으로 지새우고, 서른이 넘은 늦깎이로 문단에 나와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지 15년 만에 처음 받는 상이라 더욱 감사하고 기쁩니다.”
지난해 12월 출간된 시집 ‘돼지들에게’는 한국 사회의 위선과 탐욕을 시인 특유의 대담하고 강렬한 언어로 풍자하고 있다. 심사위원 유종호 연세대 특임교수(문학평론가)는 “최영미의 시집은 한국 사회의 위선과 허위와 안일의 급소를 예리하게 찌르며 다시 한 번 시대의 양심으로서의 시인의 존재 이유를 구현한다”고 평가했다.
그의 수상은 기자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번 시집에서 대표작이라고 꼽힌 ‘대학시절 사진을 달라는 기자에게’는 바로 기자와의 인연을 계기로 탄생했기 때문. 지난해 시사월간지 ‘신동아’에서 ‘내 인생의 선생님’ 연재를 담당한 기자는 최씨에게 원고를 청탁하며 대학 때 찍은 사진을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이에 영감을 얻어 시를 써내려갔다고 한다.
“내 앨범에는 이십대가 없다 / 입학식과 졸업식만 있지 중간이 텅 비었다 / 셔터를 누르는 몇 초만이라도 편안히 멈추어 / 나를 응시할 계절이 없었으니- (중략) 우리는 우리의 싱그러운 젊은 날들을, 싱그러우며 황폐했던 청춘을 기념하지 않았다.”(‘대학시절 사진을 달라는 기자에게’ 중)
데뷔 15년 만에 문학상 수상, 일본에서 문학 한류 이끄는 최영미

지난해 12월 초 일본 ‘아사히신문’이 문화면 톱기사로 다룬 ‘최영미 특집’.


최근 최씨의 활동무대는 한국에 머물지 않는다. 지난해 가을 일본에서 번역 출간된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자유시 독자가 거의 없는 일본에서 이례적으로 재판을 찍으며 문학 한류바람을 일으켰다. 지난해 12월 일본의 유력일간지 ‘아사히신문’은 문화면 톱기사로 ‘최영미 특집’을 보도했다. ‘한류, 시집에도 오는가’라는 제목으로 그의 시집과 작품세계를 소개한 것. 일본 기자는 “사회성이 높은 시는 딱딱하기 마련인데, 최영미의 시는 논리와 감성을 두루 갖췄다”며 그의 자유롭고 강렬한 표현을 높이 평가했다. 올해 4월24일자 ‘아사히신문’은 ‘한국의 베스트셀러 시인 일본에 왔다’는 제목으로 그의 인터뷰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일본 독자들의 반응은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상기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최근 일본 독자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어요(웃음). 일본 독자들은 특히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실린 ‘과일가게에서’라는 시를 좋아한대요. 일본 문단이 제 시를 계기로 한국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니 뿌듯하죠.”

“전 상처를 받아야 시가 나오고, 시를 쓰고 나면 그 상처가 치유돼 행복해져요”
데뷔 15년 만에 문학상 수상, 일본에서 문학 한류 이끄는 최영미

한 문학평론가는 최영미씨에 대해 “첫 시집이 너무 성공해 문학외적 풍문에 휩싸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서울대 재학 중 학생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고, 학생 때 결혼했다가 바로 이혼한 그의 극적인 삶은 그의 단아한 외모와 더불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도발적인 첫 시집만큼, 혜성처럼 나타난 미모의 작가에 대한 관심도 각별했다. ‘여성성을 무기로 시를 판다’는 편견어린 시선이 그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는 마음에서 우러난 글을 쓰는 데 몰두할 뿐이다.
“저의 좌충우돌한 삶, 대책 없는 인생이 제 시의 자양분이죠. 제 삶이 워낙 극적이어서 웬만한 드라마나 영화가 재미없게 느껴질 정도예요. 저는 상처를 받아야 시가 나와요. 시를 쓰려고 일부러 상처받는 것은 아니지만, 시를 쓰고 나면 그 상처가 치유돼 행복해져요. 저는 아직도 시가 무엇인지, 어떤 시가 좋은 것인지 잘 몰라요. 그냥 나오는 대로 쓸 뿐이죠. 아마 좋은 시가 뭔지 알았다면 오히려 시를 쓰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2002 한일월드컵 축구협회 보고서 편집자문위원을 지냈고, 각종 매체에 축구 관련 칼럼을 싣는 등 자타가 공인하는 ‘축구애호가’. 그가 스포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국체전에 나가 2관왕을 기록한 운동선수였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축구를 통해 인생을 논하는 축구시 9편을 시집 ‘돼지들에게’에 실었고, 지난 4월에는 독일의 전국지 ‘타게스차이퉁(TAZ)’에 한국 대표로 축구와 월드컵에 관한 에세이를 기고했다. 심지어 번역본도 없는 축구전문지 ‘월드 사커’를 4년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니 그의 축구 사랑을 짐작할 만하다.
문학상 수상을 위해 귀국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독일에서 월드컵 경기를 관람했을 것이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는 한국에서 마치 소중한 의식을 치르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월드컵을 준비했다. 20인치 평면 사각 텔레비전을 사고 안테나도 고쳤다. 경기에 몰두하기 위해 미리 침대시트를 빨고 대청소도 했다. 냉장고에는 좋아하는 맥주와 냉면을 그득 채웠다. 월드컵 경기가 한국 시간으로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진행되는 만큼, 지인들에게는 “오전에 전화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오전에는 잠을 자기 위해서다.
“한국팀이 이기면 좋지만, 사실 한국팀의 성적을 크게 상관하지는 않아요. 제가 월드컵을 기다리는 진짜 이유는, 미치기 위해서예요. 세잔의 위대한 격언처럼 ‘그 순간에 그것이 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고통을 잊기 위해, 나를 열광시킬 이미지를 얻기 위해, 그리하여 다시 태어나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94년 발간된 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의 만남은 기자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진 속 시인의 차가운 이미지, 시어 하나도 까다롭게 고르는 정교함과 날카로움 때문에 기자는 그에게 다가서기 힘들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그는 예상을 뒤엎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꿈과 열정이 넘치고 수다를 즐기는 명랑한 소녀의 모습이었기 때문. “내가 20대라면 축구선수와 사랑에 빠질 거야” 하고 말하던 그에게 “연애는 안 하냐”고 물었다. 그의 마지막 대답, 역시 최영미답다.
“오는 남자 안 막아요! 제 연애 감정이 궁금하다면 ‘문학사상’ 7월호에 실릴 제 연애시를 봐주세요,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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