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양(18)은 영어방송을 우리말 방송처럼 즐겨 듣고 영어소설을 술술 읽으며 인터넷 메신저를 통해 여러 나라의 친구들과 채팅할 정도의 영어실력을 갖췄다.
그런데 그의 영어실력은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외국에 나가본 적도 없이 순전히 엄마의 지도로 일궈낸 결과라고 한다. ‘토종’ 실력이 이 정도라면 일부에서 ‘쯧쯧,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얼마나 아이를 잡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 서석영씨는 “오히려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보다 훨씬 자유롭게 뛰어놀 시간이 많았다”고 말한다.
동화작가인 원양의 엄마 서석영씨(46)의 영어실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그럼에도 서씨가 아이를 스스로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사교육에 의존하는 기존 영어교육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 그렇다고 그에게 불안감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다른 아이들이 학원에 다니느라 바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원양이 과학고에 진학하고, 영어에 있어서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게 되자 서씨는 마음을 놓고 ‘엄마식 영어공부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여섯 살 때부터 영어단어 카드로 워밍업
서씨의 영어교육법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건 아이가 비교적 시간이 많은 초등학교 때 집중적으로 영어공부를 시켰다는 점. 서씨는 초등학교 때가 영어교육의 최적기라고 주장한다.
“‘아이가 배속에 있을 때부터 해야 한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말과 영어를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 ‘한글을 가르치기 전에 영어부터 해야 한다’ 등 영어를 언제 시작해야 좋을지에 대해 사람마다 주장하는 내용이 달라요. 그래서 원이를 키울 때 무척 혼란스러웠죠.”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서씨에게 영어교육법의 방향을 잡아준 건 뜻밖에도 보건소였다. 당시 여섯 살인 원양을 데리고 DPT 예방접종을 위해 보건소를 찾았던 서씨는 한 주부가 깜빡 잊고 아이의 예방접종 시기를 놓쳤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본 것. 그는 곧 ‘그래 영어공부는 예방주사야. 입시와 취업, 승진 등에서 ‘영어병’으로 고생하지 않으려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예방주사를 맞혀야 해’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울러 학업의 부담이 적은 취학 전과 초등학교 때가 가장 좋은 예방접종 시기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서씨는 주변에 널린 외래어를 이용해 딸에게 영어를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말을 가르칠 때처럼 길거리 간판이 좋은 학습 자료가 됐다고 말한다.
“몬스터는 괴물, 슈퍼마켓은 크다는 의미를 가진 슈퍼와 시장이라는 의미의 마켓이 합쳐져 ‘큰 시장’이라는 말이 됐다고 일러주니 원이가 신기해하더군요.”
어린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기 전 단계로 과즙을 한두 수저 떠먹이는 것처럼 외래어로 원이의 반응을 살폈던 그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 영어의 밑바탕인 듣기 교육을 위한 세밀한 계획을 세웠다.
“아이들이 좋아하고, 특별한 준비 없이 언제든 쉽게 접할 수 있는 TV를 이용해 영어 듣기의 기초를 다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EBS의 ‘도라도라 영어나라’나 ‘고고 기글스’ 같은 프로그램을 보여줬고, 그 다음엔 AFN에서 원어로 방송되는 ‘Sesame Street’를 보도록 했죠.”
그러나 주식을 전혀 모르는 할머니가 매일 뉴스를 보며 코스피지수, 코스닥지수를 듣는다고 해서 주식을 저절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듯, 아이 역시 보고 듣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영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래서 알파벳만은 확실히 익히도록 만 4~5세 어린이용 영어교재를 구입해 알파벳의 철자와 이름, 간단한 단어를 소리 내어 읽게 했다. 알파벳을 익힌 다음엔 게임을 통해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처음부터 원서로 가르쳐야 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 엄마들도 있지만 제 생각은 영어 기초를 닦는 데는 고전적인 책도 무방하다는 거예요. 다만 너무나 친절하게 ‘jacket(좨킷)’ ‘doctor(닥털)’ 같이 발음이 우리말로 표기가 돼 있는 것은 엄마가 걸러줘야겠죠. 발음은 가리고 철자만 보고 읽게 하는 것이 좋아요.”
아이가 철자를 보며 읽을 수 있으려면 ‘A(아) B(브) C(크)…’ 하면서 우선 알파벳 각각의 실제 발음을 일러줘야 했다. 그 다음엔 ‘I am a boy.’ ‘You are a girl.’ 같은 간단한 영어문장을 가르쳤는데 이에 앞서 ‘I, you, he, she’같이 자주 나오는 단어는 미리 카드로 만들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그래야 갑자기 길어진 문장을 접해도 영어가 어렵다는 편견을 갖지 않기 때문. 서씨는 아이가 ‘난 영어를 잘해’ 하는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다음엔 응용력 키우기 단계로 넘어갔어요. 큰 모조지에 ‘I am a ( ). You are a ( ). He is a ( ).’ 등 그동안 배운 문장을 써서 벽에 붙여두고 아침에 읽고 저녁에 다시 읽게 하는 식으로 ‘시간차 학습’을 시켰지요.”
원양의 생활 속으로 영어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자 서씨는 주저하지 않고 딸에게 원서를 내밀었다. 비교적 쉬운 책을 구해 딸에게 건네자 “엄마, 내가 영어를 술술 읽어요” 하며 기뻐했다고.
이즈음의 서씨는 TV를 이용한 영어교육법에도 약간의 변화를 줬다. 우리나라의 영어 프로그램과 원어방송을 적절하게 배합시킨 것. 리모컨을 쥐고 우리나라의 ‘도라도라 영어나라’를 보여주다가 끊고, 원어로 방송되는 AFN의 ‘Dora, The Explorer’를 틀었다. 같은 제목이고 같은 내용이라도, 원어방송은 전체가 영어이다 보니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지만 원양은 전혀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쯤 번역된 내용을 보면서 이미 그 상황과 배경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 서씨는 반대로 AFN의 원어방송을 먼저 보게 하고, 나중에 우리말로 번역된 방송을 보도록 하는 방법도 괜찮다고 말한다.
“‘Sesame Street’ 같은 어린이 영어 프로그램은 영어공부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좋은 방송이라는 생각에 원이에게 보여줬어요. 그런데 영어를 잘 못 알아들으니까 TV 앞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고민한 끝에 TV 프로그램을 녹화해 20분 정도 보여준 뒤 끊고 다른 일을 하거나 놀게 했죠. 그런 다음 다시 보여주는 식으로 했더니 원이의 집중도가 훨씬 높아졌어요.”
녹화 테이프를 볼 때는 되도록이면 엄마가 곁에 앉아 간간이 질문을 던지며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초등 고학년 때는 영어동화 소리 내어 읽고 원어민과 전화로 대화
원양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 서씨는 비로소 영어 읽기와 쓰기 단계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면 우리말 읽기와 받아쓰기를 하는 것처럼 영어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
“교보문고를 뒤져서 6단계로 돼 있는 ‘Start with English Readers’라는 책을 샀어요. 글이 짧으면서도 스토리가 있어 맘에 들었어요.”
딸에게 적당한 책을 골랐지만 그는 아이에게 선뜻 내놓지 않고 먼저 책에 있는 단어들을 카드에 적어 보여주며 익히도록 했다. 그런 다음 책을 건네자 앞서 익혀둔 단어들을 떠올리며 띄엄띄엄 읽어 내려갔다고.
“차츰 읽는 실력이 나아지자 기분이 좋았어요. 엄마가 사오신 나머지 책들도 어서 빨리 읽고 싶은 욕심이 생겼죠.”
원양이 카드연습 없이도 책을 바로 읽을 수 있게 되자 서씨는 동화책을 소리 내어 읽도록 했다. 서씨는 동화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 영어발음이 좋아질뿐더러 듣기 실력도 향상된다고 말한다.
“영어발음을 좋게 하기 위해 혀 수술을 받는 아이들도 있다고 하는데 소리 내어 읽기 연습을 꾸준히 하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요. 소리 내어 읽기는 단어와 문장은 물론 동시에 발음을 익히는 장점이 있거든요. 큰 소리로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연음이 되고 음 사이의 강약과 고저가 조절되죠. 발음이 좋아지면 듣기 능력도 자연스럽게 향상되고요.”
그는 눈으로 이해가 안 되던 문장도 소리를 내어 읽다 보면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TV 프로그램과 영어 동화책으로 각각 영어 듣기와 읽기 실력을 쌓도록 한 서씨가 다음 단계로 택한 것은 말하기와 쓰기. 서씨는 롱맨 출판사의 ‘Activity Book’과 ‘Workbook’을 구입해 말하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아이가 두 언어를 동시에 배우게 하는 이중 언어 환경을 조성한다며 우리말도 못하는 아이에게 영어부터 가르치는 엄마들도 많아요. 하지만 저는 두 가지 이유에서 반대하는 입장이에요. 첫째는 두 언어를 함께 배우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것이고, 둘째는 모국어를 배우면서 언어에 대한 이해력이 생기는데 외국어부터 배우면 언어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져 우리말을 깨치고 영어를 배울 때보다 몇 배 힘겹고 시간도 더 걸리기 때문이죠.”
서씨는 ‘How are you?’ ‘Excuse me.’ 정도의 간단한 영어를 할 때는 표가 안 나지만 수준이 높아질수록 우리말에 대한 이해력이 영어실력을 좌우한다고 주장한다. 집에서 엄마가 가르치는 영어학습법의 결과를 꼭 확인해보고 싶었던 서씨의 욕구와 뚝심은 원양의 영어공부를 일관성 있게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이 됐다.
원양이 초등학교 3, 4학년이 됐을 때는 ‘통독→내용 이해→소리 내어 읽기’의 3단계 학습법으로 ‘80일간의 세계일주’ ‘미녀와 야수’ 같은 세계 명작 스토리북 24권을 마스터했다. 5학년이 되면서는 중학교 참고서를 이용해 문법을 공부하도록 했다.
서씨는 딸의 영어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위한 방법으로 영어경시대회를 활용했다. 그는 “경시대회가 지나치게 경쟁의식을 부추기고 상업적으로 흐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학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는 아이에게는 실력을 진단하고 경쟁력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고등학교 교과과정까지 마스터하고 중학교에 들어간 원양은 ‘프리토킹’을 위해 원어민과 일주일에 세 번, 10분씩 전화로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인 교사가 원양의 발음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실전에서 말문이 터지자 원양은 인터넷의 영어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알게 된 미국인, 영국인, 호주인, 필리핀인 등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이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고,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원양의 영어 실력도 자연스럽게 향상됐다. 그러는 사이 심야에 AFN에서 내보내는 영화를 즐겨 보며 속어를 제외한 대화 내용을 대부분 알아듣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한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