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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해피토크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

일러스트·임혜경

2006. 06. 19

예전엔 아내가 남편에게 지나치게 곰살맞게 구는 걸 보면 닭살이 돋았다. 하지만 술자리에서도 아내의 귀가 독촉전화를 애정의 증표로 여기고, 술에 취해 애교를 부리는 아내를 귀엽다는 듯 데리고 가는 남편들을 보면 부부관계엔 이런 양념이 필요하지 않나 나 자신에 대한 반성까지 하게 된다.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

“자, 이제 전화 올 시간이다. 11시 땡!!!”
모 대학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특강을 한 후 학생(?)들과 함께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 학생들이라고 해도 대부분 기업체 사장이나 임원, 혹은 전문직 종사자들인 40~50대 중년 남성들이다. 수업이 밤 10시쯤 끝나 맥주를 한 잔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 이렇게 외치자 정말 신기하게도 전화벨이 울렸고 사람들이 까르르 웃었다.
“수업 마치고 박 사장, 김 사장이랑 맥주 마시고 있어. 곧 들어갈게.”
주인공인 모 건설회사 사장의 익숙한 답변. 의아해하는 내게 다른 학생이 자상하게 설명을 해줬다.
“이 사장 부인은 정확히 11시에 꼭 전화를 걸어요. 그리고 5분 간격으로 빨리 귀가하라는 전화를 계속하죠. 그런데도 이 사장은 전화를 계속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12시가 돼서야 일어서거든요. 서로 익숙할 법도 한데 어쩜 그리 똑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는지 신기하단 말예요.”
“뭐가 신기해. 우리 부부의 일상이지. 11시부터 경고전화를 시작해서 오늘 안으로 들어오라는 거고. 덕분에 12시에는 일어나는 거고.”
그리고 정말 5분 간격으로 부인의 귀가 경고 및 독촉 전화가 이어졌고, 그 사장은 자동응답기처럼 받자마자 “알았어, 곧 떠날 거야”란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한 모양이지만 처음 경험하는 나는 그 전화도 좀 거슬렸고 그토록 줄기차게 전화를 거는데도 태연히 맥주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그 사장의 굵은 신경도 감탄스러웠다. 그래서 물었다.
“부인이 그렇게 전화를 거는 게 귀찮거나 짜증스럽지는 않으세요? 만약 부인이 전화를 걸지 않으면 마냥 늦게 귀가하실 건가요?”
“뭐, 반갑지야 않지만 습관이 돼 짜증스럽지도 않아요.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면 늦게 갈 수도 있지만, 마누라가 징징거리는 거 듣기 싫어서 12시 전에는 집에 들어가려고 해요.”
옆자리에 앉아있던 다른 남성에게도 아내의 전화가 귀가시간에 영향을 미치는지 물어봤다. 그 사람의 전화기는 ‘캔디’ 전화처럼 외로워도 슬퍼도 울리지 않았다.
“오늘처럼 야간 수업이 있는 날은 자정쯤 들어가는 걸 집사람이 알아요. 물론 12시가 넘으면 확인 전화를 걸기도 하지만, 이젠 나한테 애정이 식었는지 전화도 잘 안 거네요.”

남편 사로잡는 애교 만점 그녀들
우리는 마치 자정이 지나면 마차는 호박으로, 화려한 드레스는 남루한 옷으로 변하는 신데렐라처럼 12시가 되기 직전 맥주집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남편도 안 걸고, 나도 남편을 찾지 않았다. 남편이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모른다. 귀가 독촉전화를 거는 것은 신혼 2, 3년 차 정도에서 끝난 것 같다. 이제는 새벽 4, 5시에 들어와도 전화를 걸지 않는다.
물론 전화를 걸 때도 있지만 귀가 길에 사달라고 부탁할 게 있다든지 뭔가 집으로 가져올 물건이 있을 때 정도. 전화를 걸면 그가 무얼 하는지 ‘소리’만 들으면 다 안다. 딱 딱 소리가 나면 고스톱을 치는 것, 쨍 쨍 소리가 나면 맥주나 술 마시는 것, 탕 탕 소리가 나면 당구장, 그 밖에 있는 곳을 밝히고 싶지 않을 경우엔 아예 전화기를 꺼놓는다.^^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

신혼 초에 쓴 일기를 읽어보면 ‘그이가 또 늦는다.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는 걸까. 찌개는 다 식었고 난 배가 고프다 못해 속이 쓰린데 전화 한 통 없다. 무심한 사람. 혹시 사고라도 난 게 아닐까. 너무 걱정된다’류의 전형적인 내용도 있다. 하도 상습적으로 늦으니 지쳐서 혼자 씩씩하게 밥 먹고, 내일 아침 출근을 위해 자는 게 습관이 됐다. 남편 역시 내가 늦어도 전화를 걸지 않는다.
한 후배는 술만 마시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라고 한다는 얘길 들었다. 그 후배 남편은 술에 취해 해롱거리는 아내를 위해 달려와 때론 술값을 계산하고 때론 아내를 둘러업고 집으로 간다고. 그리고 얼마 전 마침내 그 장면을 목격할 기회가 생겼다. 와인을 한 병 정도 마신 후배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헬로, 허니. 자기 뭐해? 우~ 당신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 아이러브유, 아이미스유, 허니…나 데리러 와, 빨리 응?”
평소엔 그렇게 지적이고 쿨해 보이던 후배가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콧소리를 내며 온갖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 나이 마흔이 넘었어도 남편에게 혀 짧은 소리를 하고 아이러브유를 노래하는 후배가 주책스럽다기보다는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 후배의 남편은 자신도 회식이 있어 술을 마셨다며 대리기사까지 동반해 나타났다. 후배는 남편을 보자 방실방실 웃으며 안겼고 중년의 그 남편은 “으이구, 골고루 한다”라면서도 마냥 귀여운 듯 데리고 갔다.
또 다른 친구는 밖에서 수시로 보고전화를 건다. 지금 도착했다, 아무개는 아직 안 왔다, 메뉴는 뭘 주문했다, 당신은 식사 어떻게 할 거냐, 음식이 맛있어서 당신이랑 같이 왔으면 좋을걸 그랬다 등등 거의 중계방송을 한다.
참다못해 “그만 해라. 그만해. 밥 좀 먹자. 네가 너무 기름을 뿌려대니 느끼해서 못 먹겠다”라고 소리를 질러야 “여보, 인경이가 나 야단쳐”라며 끊는다. 예전엔 그 친구의 그런 소행이 약간 꼴불견이라고 여겼는데 이젠 솔직히 좀 부럽기도 하다.

부부, 자율성과 자립심도 좋지만 약간의 양념도 필요해
올해로 결혼 20주년이지만 난 한 번도 남편에게 ‘몰라, 몰라, 깍쟁이’류의 교태나 ‘허니, 달링’ 등의 비음 섞인 말도 안 해봤고 애교는 유전자 자체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남편에게 “언제 들어올 거냐”고 독촉하는 것도 싫고 반대로 남편에게 일찍 들어오란 독촉을 듣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 너무 자율성과 자립심을 강조하다 보니 부부라기보단 사촌 오누이 사이 같기도 하고 혹은 하숙생과 주인 사이 같기도 하다.
처음엔 느끼해 닭살이 돋더라도 ‘아이이잉~’ 하는 말투를 훈련했어야 했고, 별로 궁금하지 않아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 “언제 올 거야. 당신 없어서 무서워” 등의 가증스런 대사를 날렸어야 했나 싶다. 이젠 며칠씩 서로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보내는 때도 있으니.
우황청심환이건 흥분제(!)건 약이라도 먹고 남편에게 콧소리와 눈웃음을 잔뜩 버무려 “자기 왜 안 와~? 난 당신 없으면 못살아앙” 같은 말을 해보면 남편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 감격할까, 아니면 당황할까? 어쩌면 날 당장 (정신)병원에 입원시킬지도 모른다. 아, 그래서 평소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거다.
그런데 체력도 좋은 내 남편, 새벽 유흥업소 시찰 습관은 언제나 끝이 나려나.
유인경씨는요

남편은 아내 하기 나름?
경향신문에서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편집장. 얼마 전 ‘대한민국 남자들이 원하는 것’을 펴낸 뒤 KDI, 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등 ‘아저씨’들이 많은 곳에서 강의 초빙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그의 홈페이지(www.soodasooda.com)에 가면 그의 다른 칼럼들을 읽어볼 수 있으며 진솔한 대화도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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