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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이 넘은 나이에 왕성한 창작열 불태우는 작가 최인호

“‘정신의 비아그라’를 먹었는지, 요즘만큼 글쓰기가 재밌게 느껴진 적이 없어요”

글·이남희 기자 / 사진ㆍ조영철 기자

입력 2006.06.19 15:58:00

‘별들의 고향’에서 ‘유림’까지 40년간 수십 편의 인기 작품을 발표한 작가 최인호씨가 가야 역사를 복원한 소설 ‘제4의 제국’을 펴냈다. 이순(耳順)이 넘어 보다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는 그에게서 자신만의 문학세계와 남다른 가족사랑 이야기를 들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왕성한 창작열 불태우는 작가 최인호

역사적 지식과 직관을 동원해 7백 년 가야사를 복원한 최인호씨는 “일본인들이 내 소설을 읽고 한·일 고대사를 바로 이해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일에 평생을 걸어 일가를 이룬 사람만큼 행복한 이가 또 있을까. 그런 면에서 작가 최인호씨(61)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 하나다. 1963년 고교 2학년 때 신춘문예 최연소 당선자로 등단한 이후 그는 40여 년간 ‘문학’이란 외길을 걸어왔다. 수십 권의 베스트셀러를 발표하며, 명실공히 ‘작품이 가장 많이 영화화된 작가’가 된 그는 이 시대를 관통하는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우뚝 섰다.
‘별들의 고향’ 등을 통해 70년대 도시적 감수성을 대변했던 그가 이제 ‘역사’라는 육중한 주제를 뚝심 있게 그려내고 있다. 백제와 일본의 긴밀한 유대를 다룬 ‘잃어버린 왕국’,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고유 문장을 통해 정복왕의 영광을 다룬 ‘제왕의 문’, 통일신라의 해상왕 장보고의 생애를 다룬 ‘해신’에 이어 최근 7백 년 영화를 간직한 가야의 역사를 복원한 장편소설 ‘제4의 제국’을 발표한 것. 최인호씨는 “역사소설 연작의 완결편인 ‘제4의 제국’을 끝으로 조국에 진 빚을 다 갚았다”며 작품에 관해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이야기를 쓰면서 마음은 늘 2%가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그 공허함의 원인은 바로 가야였어요. 가야는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에서 정당한 대접을 못 받았지만, 사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독자적 역사와 문화를 누렸던 엄연한 제4의 제국이거든요. 가야에 대한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은 사실 20년 전부터 해왔습니다. 대륙의 세력과 인도에서 건너온 해양 세력의 만남으로 탄생한 가야는 일본 건국에 관한 비밀의 빗장을 여는 열쇠예요. 가야사가 바로 서야 일본과의 관계도 바로 세울 수 있어요. 일본이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며 고대사를 자꾸 왜곡하는데, 고이즈미 총리가 제 책을 꼭 한번 읽었으면 합니다.”

“50세가 넘은 뒤로 글쓰기를 제외한 모든 욕망이 없어졌어요”
작품이 시작되는 무대는 경남 김해의 대성동 제13호 고분. 일본 ‘왕들의 무덤’에서나 발굴되던 바람개비 모양의 파형동기가 이곳에서 다량 출토된 실제 사건을 계기로 최씨는 한·일 고대사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나간다. 그는 묻힌 가야의 역사를 되살리기 위해 풍부한 역사적 지식과 직관을 동원했다. 오키나와를 비롯해 일본 전역은 물론 인도까지 광범위한 현지답사를 거치고 1백 권이 넘는 역사서를 독파하며 가야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재구성했다. 한 방송사에서는 이미 이 소설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겠다고 제의했다.
“고등학교 때 역사소설을 쓰듯 공부했다면 서울대 수석도 문제없었다”고 우스개를 던지는 그가 이토록 역사탐구에 매료된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제 소설의 본령은 현대소설인데 역사에 들어갔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이죠. 인생은 예정돼 있는 건가 봐요.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는 동시대에 속한다’는 말을 했어요. 50억 년의 지구 역사에서 인류의 역사는 몇 백만 년밖에 안되거든요. 하루로 치면 몇 분밖에 안되는 셈이죠. 역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생생한 현재이기 때문에 제가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겁니다. 1천6백 년 전 인물인 광개토대왕도, 해상왕 장보고도 토인비의 말에 비춰보면 동시대 인물이죠. 그들이 이 시대에 호흡하는 인물이 아니라면, 제가 소설로 다룰 필요가 없는 거예요. ‘제4의 제국’을 쓰면서 일본 씨름인 스모의 아버지가 가야의 유민이란 것을 밝혔죠. 그러고 보니 이만기, 강호동 선수가 모두 마산, 진주 출신이더라고. 형질이라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요. 이처럼 역사를 추적하다 보면, 전혀 뜻밖의 진리가 기적처럼 나온다고. 그게 (역사소설의) 재미죠.”
‘최인호 소설’의 대표적인 특징은 바로 뛰어난 스토리 텔링이다. 그래서일까. 대중적 흡인력을 지닌 그의 로맨틱한 소설들은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됐다. 그의 작품 가운데 ‘별들의 고향’을 비롯, 30여 편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77년에는 아예 감독으로 나서 ‘걷지 말고 뛰어라’를 제작했고, 시나리오도 썼다. ‘깊고 푸른 밤’ ‘바보들의 행진’ ‘적도의 꽃’ ‘고래사냥’ 등은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왕성한 창작열 불태우는 작가 최인호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의 일대기를 다룬 ‘상도’, 통일신라의 해상왕 장보고의 생애를 다룬 ‘해신’은 TV 드라마로 제작돼 인기를 끌었다. 영화계의 러브콜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갑자기 제 작품 세 편을 영화로 만들자고해서 계약했어요. 그래서 돈이 두둑하게 들어왔죠(웃음). ‘몽유도원도’ ‘지구인’이 영화화될 것이고, ‘겨울 나그네’는 리메이크될 예정이에요. ‘사랑의 기쁨’ ‘내 마음의 풍차’ 등은 TV 드라마로 만들자는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고. 이 나이에 갑자기 사람들이 제게 ‘앵콜 앵콜!’ 하는지 행복해 죽겠다니까요.”
이제 막 이순(耳順)을 넘긴 작가는 청년 못지않은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정신의 비아그라’를 먹었는지, 요즘만큼 글쓰기가 재밌게 느껴진 적이 없다”고 할 정도다. 지난해에는 유교의 가르침을 소설로 그려낸 ‘유림’과 ‘제4의 제국’을 두 신문에 겹쳐 연재했다. 몇 개월간 휴식을 취한 후에는 7백~8백 장 정도의 현대소설 집필에 들어간다고.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은 오히려 그가 창작의 전압을 높이는 원천이 됐다.
“55세가 넘으면서 나이 드는 게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40세까지만 해도 뭘 보면 갖고 싶고 열정이 끓어오르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는데 50세가 넘으니 그런 욕망이 없어졌어요. 과거의 나는 마치 플러그가 많은 전선 같았죠. 내 마음속 플러그를 여기도 꽂아보고 저기도 꽂아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꽂고 싶은 플러그가 없어요. 술 마시는 재미도 시들해지고, 영화 제작에 대한 욕구도 없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글쓰기 위한 전압이 세진 거죠. 제 소원이 뭔 줄 알아요? 글을 쓰다 죽는 거예요. 그러면 정말 행복할 거예요.”

가톨릭 영세 받으며 여성관 변해… “외손녀를 못 보니 그리워 죽겠어요”
그는 42세가 되던 해, 가톨릭에 귀의한 후 3년간 공백기를 가지며 ‘작가는 글과 생각이 합일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공백기 이후 그의 관심은 역사와 종교, 경제로 확산됐다.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 시대’ 등 여성과 성에 대한 파격적인 묘사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그의 여성관도 종교에 귀의하면서 1백80도 달라졌다.
“지금은 ‘별들의 고향’의 주인공 경아에게 많이 미안해요.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던 나는 여성을 소유의 개념으로 봤거든요. 남성들의 쾌락과 욕망의 도구로 이용당하다 버림받는 경아는 주체적 의지가 전혀 없는 인물로 그려졌죠. 다시 소설을 쓴다면 경아가 그렇게 비극적인 죽음을 맞도록 하지 않을 거예요. 가톨릭에 귀의한 후 여성에 대한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어요. 여성이 지닌 신성함을 우러러 보게 됐거든요. 제 딸 다혜(34)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모습을 보며 여성의 위대함을 느끼곤 하죠. 모성은 인류의 영혼을 영원히 구원하지 않습니까.”
그는 이야기 도중 갑자기 “애인 사진을 보여주겠다”며 자신의 지갑을 꺼내들었다. 사진 속 주인공은 그의 외손녀 성정원양(7). 그도 어느새 예쁜 손녀 이야기만 나오면 입이 귀에 걸리는 인자한 할아버지가 됐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왕성한 창작열 불태우는 작가 최인호

요즘은 쿠바산 시가를 피우는 것이 최인호씨의 유일한 취미생활이라고 한다.


“딸 가족이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는데, 외손녀를 못 보니 그리워 죽겠어요.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딸 가족이 한국에 오기로 했다가 안 와서 얼마나 절망했다고…. 드디어 5월 중순에 딸 가족이 한국에 오는데, 정원이를 만나면 그 녀석과 꼭 붙어 지낼 거예요. 요즘은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최씨는 월간지 ‘샘터’에 소설 ‘가족’을 75년부터 30년 넘게 연재한 바 있다. 가족은 쓰고 또 써도 얘깃거리가 많은 작가의 영원한 화두라고. 그는 연세대 영문과 재학시절 부인 황정숙씨와 결혼해 첫딸 다혜씨를 낳았다. 그가 84년에 쓴 ‘겨울나그네’의 여주인공이 다혜인데, 바로 딸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는 아들 성재씨(32)는 지난해 결혼식을 올렸다. “예쁜 며느리를 맞아 마냥 기쁘다”는 그는 활짝 웃으며 가정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왕성한 창작열 불태우는 작가 최인호

일곱 살배기 외손녀 성정원양의 사진을 볼 때마다 최인호씨의 입이 귀에 걸린다.


“아이들을 시집, 장가 보내고 나서 저는 아내에게 젖은 낙엽처럼 붙어 지내요. 집사람이 없다면 정말 곤란해질 것 같아요. 젊었을 땐 죄도 짓고 그랬는데, 아내가 이사 갈 때 나를 버리지 않고 더구나 나랑 같이 잘 돌아다녀주는 걸 보니 아직 내게 매력이 남아있는 모양이에요(웃음). 대학교 때부터 연애를 해와서 그런지 아내와 나는 말이 잘 통해요. 아내는 제 인생의 가장 절친한 동반자죠.”



그는 “가정은 하늘이 내려준 꽃밭”이라며 “사람들이 가정을 잘 가꾸며 모두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가치관이 충돌하고 어려움에 닥칠 때 부부가 서로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면 문제는 풀리게 마련이라고.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돼 있다”는 그의 확신에 찬 발언에 짜릿한 전율이 전해져온다.
“옛날에는 모든 걸 이루는 게 행복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원칙을 정하고, 나머지는 홀연히 버릴 줄 아는 것이 더 큰 행복이더라고. 자신을 억누르는 욕망, 욕심에서 벗어나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쓰기 위해 올 9월 이스라엘로 순례 여행 떠나
최인호씨는 진로를 택하는 데 혼란을 겪는 후배들에게 “한길을 가라”고 충고한다. 또한 “작가의 가난과 글쓰기의 고통이 두려워 글을 쓰지 못하겠다”는 이들에게 “가난과 고통은 작가의 특권”이라 잘라말한다. 이는 출판사가 제때 원고료를 안 줘서 딸의 분유값조차 없었던 그의 순수한 경험에서 우러난 충고다. 순수 창작활동으로만 살아남기 어려워 다른 일을 겸업하는 작가들을 보며 그는 우려를 감추지 않는다.
“‘괜찮게 쓴다’ 싶은 후배작가들이 다들 교수를 하던데,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나한테도 수차례 (교수직을 제안하는) 연락이 왔는데, ‘뿌리치는 통쾌함’을 즐겼지. 예술가라는 것은 극도의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인 만큼, 글 쓰는 데 방해되는 일은 절대 안 했으면 해요. 작가는 그저 좋은 작품을 쓰면 되는 것이고, 한 분야에 올인하면 남들이 언젠가는 알아주거든요. 한우물을 파니까 돈도 결국 따라오게 마련이더라고요.”
요즘 그의 유일한 취미는 ‘시가 피우기’다. 20년 전 담배를 끊은 후 ‘왕도의 비밀’을 쓸 때 중국 취재여행에서 알게 된 시가를 10년 전부터 ‘애첩’처럼 여기기 시작했다고. 쿠바산 시가에 ‘순자’라는 이름을 붙여준 그는 집을 나설 때 “순자야, 같이 가자”고 말을 건넨다.
아내와 서울 청계산에 오르는 것도 그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공비처럼 잽싸게 산에 오른다”는 그는 정상에 서면 엔도르핀이 샘솟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최근엔 아내와 영화 ‘왕의 남자’와 ‘매치포인트’ 등을 감상하며 오랜만에 찾아온 자유를 만끽했다고.
“요즘은 아무리 재미난 영화를 봐도 30분 지나면 그저 그래요. 특히 베드신을 봐도 이제 아무런 감흥이 없어요. 물고 빨고 이미 다 해본 짓인데, 거기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큰 의미를 두니까 재미가 없더라고. 허허.”
갓 잡아 올린 활어처럼 생동감 있게 펄떡이는 그의 언어에 흠뻑 빠져있을 때쯤, 인터뷰는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이야기 말미에 중요한 계획을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소설로 쓰기 위해 올 9월 이스라엘로 순례 여행을 떠난다는 것. 최씨는 “예수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자신이 직접 만나고 느낀 예수를 오롯이 그려내겠다”고 말한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스라엘 지역 순례가 환갑이 넘은 작가에게 힘겨운 작업은 아닐까. 그는 “보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반드시 보여준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난 ‘빽’이 많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전지전능하다면, 내가 자신에 대한 소설을 쓰는데 총이나 폭격에 맞게 내버려두겠습니까? ‘길 없는 길’을 통해 경허 스님의 삶을 추적했으니 부처님도 내 편입니다. ‘제왕의 문’을 쓰기 위해 현장답사를 떠났을 땐, 광개토대왕의 유물을 찾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히기도 했죠. 그때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더군요. 마치 ‘1천6백 년 후손이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애쓴다’며 광대토대왕이 내려준 비 같았어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저를 항상 지켜주고 있기에 조금의 두려움도 없습니다.”

여성동아 2006년 6월 5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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