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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가정의 달’ 이벤트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여성동아’가 마련한 테마 에세이 공모 우수작 발표

기획·이기숙 기자

입력 2006.05.23 15:30:00

‘가정의 달’ 5월에 ‘여성동아’에서 마련한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공모’에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많은 사연이 접수됐다. “미처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친정엄마에 대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돼 좋았다”며 감사의 말을 함께 적어 보내준 독자도 많았다.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공모에 참여해준 방송인 오영실씨, 영어강사 이보영씨, 동화작가 강민경씨의 글과 선정된 우수작 7편을 소개한다.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여성동아’에서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친정엄마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마련한 특별 이벤트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공모’에 많은 주부들이 애틋한 사연을 보내왔다. 평소 가슴 속에 담아두고 표현하지 못했던 친정엄마에 대한 사랑을 한자 한자 채워 보낸 것.
응모자들은 사연과 함께 “밤새 쓴 글을 엄마에게 읽어드리며 우리 모녀는 한동안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비로소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엄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만 있었는데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 등 에세이를 쓰게 된 소감을 덧붙여 보내왔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친정엄마에 대한 애틋함은 한결같이 ‘가슴 저린 것’이고 ‘눈물 솟게 하는 것’이었다. “친정엄마란 말만 떠올려도 가슴이 저리고 아파온다” “엄마~, 생각만 해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눈물부터 쏟아진다” “글을 쓰면서 엄마 생각에 내내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등의 말이 빠지질 않았다. 친정엄마를 생각하면 여전히 ‘아픔’ ‘희생’ ‘눈물’과 같은 표현 없이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운 현실이지만, 역시 시대를 초월해 영원히 감동을 주는 테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친정엄마가 아픔보다는 ‘기쁨’으로, 절대적인 희생보다는 ‘든든한 삶의 멘토’로, 눈물보다는 ‘미소’로 떠올려지는 날을 기대해본다.

방송인 오영실 ‘멋쟁이 여인에서 뻔뻔한 아줌마가 된 울 엄마’
재치 있는 말솜씨로 사랑받는 방송인 오영실씨(41).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은 그에게 어머니는 더욱 애틋한 존재다. 오영실씨가 억척스럽게 삼남매를 키워준 홀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담은 에세이를 보내왔다.
글·오영실’방송인‘
“아버지 잃은 철부지 삼남매를 억척스럽게 뒷바라지해준 엄마, 사랑합니다”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초여름 장마가 끝날 무렵이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찾아온 화창한 날씨에 새로 지은 한복을 입고 나선 우리 삼남매는 마냥 들떠 있었다. 우리는 참으로 오랜만에 푸른 잔디(?)에서 비행기도 날리고 술래잡기도 하면서 마음껏 뛰어다녔다. 잔디밭은 꽤나 넓어서 우리가 아무리 뛰어다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깔깔거리며 즐거워하는 우리와 달리, 한편에선 망연자실한 표정의 엄마와 엄마를 부둥켜 잡고 우는 이모, 그들을 에워싼 어두운 표정의 사람들이 있었다. 야릇하게 남아 있는 기억, 내 나이 일곱 살 때 일이다.
시간이 흘러 머리가 커져서야 나는 새로 지은 한복이란 상복이었고, 태어나 처음 가본 푸른 잔디밭은 국립묘지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철없던 우리가 신나게 놀았던 그날은 아빠의 장례식이었던 것이다.
월남에 가셨던 아빠는 조그만 상자에 하얀 뼛가루가 돼 돌아오셨다. 아빠가 몇 년에 한 번씩 통조림 과일과 장난감, 신기한 가전제품들을 싸들고 집으로 돌아오시는 날이면 우리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자식들을 보면 예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자상한 우리 아빠는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그렇게 훌쩍 떠나셨다.
미끈한 다리에 미니스커트가 잘 어울리고, 복고풍으로 올린 머리에 선글라스를 끼면 당대 인기배우 김지미 못지않던 우리 엄마. 아빠가 돌아가시자 주변에서는 젊고 예쁜 엄마에게 재혼을 권유했다. 그러나 엄마는 한사코 재혼을 거부했다. 대신 생계를 위해 회사에 다녔고, 그 뒤로 나는 집안일을 도와주던 순이 언니와 삼촌, 이모들 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엄마가 늘 그리웠다. 날이 어두워져도 들어오지 않는 엄마가 걱정됐고, 새벽녘 푸르스름한 형광등 아래서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다듬는 엄마를 보면 엄마 없이 또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같이 살아도 그리운,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유행가의 가사가 그런 마음이겠지.
엄마 없는 집이 싫어 방과 후에도 학교에서 뱅뱅 도는 나를 본 담임선생님은 엄마를 학교로 불렀고, 계모가 아닌지 물으셨다. 다음 날 회사에 사표를 낸 엄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우리 삼남매 곁에 계신다.
그 세월 속에서 아빠의 몫까지 감당해야 했던 엄마는 많이 변했다. 혹 나나 동생들이 골목에서 맞고 온 날에는 손을 붙잡고 그 아이의 집을 찾아나섰고, 시장에서는 푼돈을 깎기 위해 장사꾼과 실랑이를 벌였다. 미술과 피아노를 공부했던 나와 내 동생의 학원비가 버거워지자 조금이라도 덜 내고 배울 수 있도록 선생님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사춘기 땐 뻔뻔한 아줌마가 된 엄마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가 없다는 것을.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아빠의 부재 속에 거칠 것 없는 아줌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엄마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고등학교 시절, 젊음을 주체 못하며 놀기에 여념 없던 나는 거짓말도 밥 먹듯이 했다. 순진하게 내 말을 다 믿어주던 엄마. 뭐가 그리 재미있었는지 공부는 내팽개쳐두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느라 바빴던 내 이중생활(?)이 절정에 이를 즈음, 어느 새벽 화장실 가려고 방문을 여니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 젊은 날을 송두리째 헌신한, 거짓말을 바보처럼 모두 믿어주는, 못된 딸을 위해 기도하는… 엄마가 가여웠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다른 학생이 돼 있었다.
그토록 강했던 엄마는 15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휴일 근무차 나온 회사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 온전하지 못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없이 집으로 뛰어갔을 때, 입이 돌아간 채 엄마가 누워 계셨다. 그리고 그날 이후, 엄마는 아이가 됐다. 목욕도 혼자 못하시니 씻겨드리고, 밥도 떠먹여드려야 했다. 글씨 쓰는 법, 단추 끼우는 법 등 모든 일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때 간절히 드렸던 기도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마침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진주로 이사를 오셨습니다. 방학이거나 주말이면 놀러갔고, 너무들 잘해주시니 외갓집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이때부터 아빠와 엄마는 자주 다투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싸우셨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말 슬펐습니다. 엄마는 더 이상 아빠랑 같이 살 수 없었는지 저희들을 데리고 외가 가까이로 가셨고, 외할머니 도움으로 포장마차를 시작했습니다. 허름한 집이었지만 우린 행복했습니다. 이모가 우리 공부를 봐주고 같이 놀아주었지요.
엄마는 힘드셔도 저희들한테 내색 한번 하지 않으시고 새벽까지 장사를 하셨습니다. 힘들게 살아도 엄마랑 있어 좋았는데 무슨 일인지 아빠가 우리를 데려갔습니다. 아빠와 친할머니와 살면서 밤마다 몰래 밖에 나와 하늘의 별을 보며 엄마 보고 싶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엄마도 우릴 떨어뜨려 놓고 많이 힘드셨나 봅니다.
결국 엄마와 아빠가 의논해서 엄마가 저희를 데리고 사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엄마랑 같이 살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엄마는 우리 삼남매를 키우시면서 포장마차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학교 갔다오면 엄마랑 같이 포장마차를 끌고 가는 시간이 어찌나 즐거웠는지 힘든 줄도 몰랐답니다. 엄마랑 같이 사는 게 너무너무 행복했으니까요.
오빠는 신문배달까지 했습니다. 저도 동생 돌보며 밥도 하고 청소도 하며 엄마를 도와드렸고요.
제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되자 등록금이 걱정이었습니다. 오빠 하나도 힘든데 나까지 더하면 엄마가 너무 힘들 거라는 생각에 저는 야간 고등학교에 가기로 했습니다. 엄마한테 말씀드렸더니 “엄마 능력이 없어서 니가 고생한다”며 많이 슬퍼하셨습니다. 저는 조금이나마 엄마의 짐을 덜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은 편했습니다.
사실 야간 고등학교가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게 생각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고생하시는 엄마를 생각하며 꾹 참고 견딘 끝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졸업하고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한 끝에 미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엄마한테 말씀드렸더니 너무 힘든 직업이라고 처음엔 반대하셨습니다. 엄마를 졸라 허락을 받고 수원 미용학원에 등록해 열심히 배운 끝에 한 해에 필기와 실기 시험에 다 붙었고, 바로 미용실에 취직을 했습니다. 이제 사회인이 됐다는 것이 뿌듯했습니다.
그러나 미용 일을 하면서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엄마와 지금의 제 신랑이 위로해준 덕분에 잘 다니며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답니다(그때부터 저의 신랑이 제 뒤를 쫓아다녔습니다. 만난 지 10년 만에 결혼에 골인했거든요).
처음으로 엄마 머리를 실습 삼아 파마를 해드렸을 때 엄마는 어설픈 파마머리를 거울에 비춰 보면서 “잘 나왔다”며 칭찬하시고 “우리 현주 때문에 머리 하는 돈은 들지 않겠다”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렇게 미용 일을 한 지 14년째. 저는 시댁 도움으로 독립해 미용실을 운영하게 되었고, 엄마는 회사 식당일을 하시고…. 이제 고생은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에 계신 아빠가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했습니다.
미웠던 아빠지만 눈물이 났습니다. “많이 다치셨으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엄마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시골에는 아빠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모시고 와야 했거든요. 엄마는 정말 아빠랑은 같이 살고 싶어하지 않으셨는데 우리를 생각해서 모든 걸 감수하고 아빠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술을 끊는다는 약속을 받고 아빠를 모시고 왔으나 첫날부터 친정집은 찬바람이 쌩 불었습니다.
삼남매가 모이기만 하면 시끌벅적 즐거웠는데 아빠가 오시니까 집안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지금껏 아빠 때문에 힘들게 살아왔는데 나이 드시고 병까지 있는 아빠를 받아주신 엄마가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습니다. 엄마는 “내 팔자야~” 하며 웃으면서 사십니다. 지난 35년의 세월을 이제까지 보상받지 못하셨지만, 엄마, 전 이제부터 엄마의 인생이 새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의 시간은 엄마가 자신을 위해 사시는 걸 보고 싶습니다. 저희가 더 열심히 살며 엄마와 아빠,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기만 바랄 뿐입니다.
제가 아직 아기가 없어 엄마 심정을 다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기가 생기지 않아 엄마가 또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아이 생기면 엄마가 다 키워 줄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만 나이드신 엄마를 뵈면 눈물이 납니다.
“엄마, 이제부터라도 재미있고 행복하게 사실 수 있게 저희 삼남매가 최선을 다할 게요.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저희 곁에 계셔주세요. 정말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출산의 아픔과 기쁨 겪으며 엄마 마음 알 수 있었어요” 이은숙(34·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결혼을하고 신혼 재미에 푹 빠져 있을 즈음 내게도 임신이라는 기쁜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죠.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잠시나마 나를 흔들어놓았습니다. 다행히 2월 말쯤 건강한 딸아이를 출산했습니다. 자연분만으로 낳긴 했으나 출혈이 심해 잠시 분만대 위에 그대로 누워 있으라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문득 조금 전까지 나의 손을 꼭 잡아주며 눈물을 훔치시던 친정엄마가 생각났습니다.
‘엄마도 나 이렇게 배 아파서 낳았을 텐데, 그치 엄마?’ 엄마가 옆에 계셨다면 직선적인 성격의 나로서는 바로 얘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를 낳으니 이전까지 친정엄마에 대해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일들이 생각나면서 맵디매운 고추라도 급하게 삼킨 듯 목이 메이고 눈물이 와락 쏟아졌습니다.
엄마의 인생은 평생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내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갈 무렵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얘기처럼 덜컥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당시로선 손을 써볼 수 없는, 뼈에 생긴 암이었습니다.
백방으로 알아봐도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하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삼뿌리처럼 생긴 생약을 달여 먹이고, 효험이 있다고 해 밤새도록 뜨거운 밀을 동생의 부은 허벅지 위에 붙여도 보고, 민간요법으로 나았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물어 물어 찾아가 알아보기도 하고, 급기야는 성황당에 빌면 정성이 하늘에 닿지 않을까 싶어 이름난 무당들을 불러 굿도 여러 번 해봤지만 이미 때는 늦어 동생은 허망하게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동생을 잃은 슬픔에 한동안 술에 의지하다시피하시고 엄마 또한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숨죽이며 사셨습니다. 동생이 가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친정엄마는 불혹의 나이에 임신을 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가족 모두가 슬픔에 잠겨 있었고 나는 사춘기를 겪고 있을 때라 엄마의 임신이 못마땅했습니다.
지금은 늦둥이를 낳는 것이 유행이고 자연스럽기까지 한 일이지만 내가 중학교 다닐 적만 해도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엄마의 임신이 창피하고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엄마 나이 마흔에 임신을 해서 어떡하려고 하냐”고, “주책이지 애는 왜 낳느냐”고 대놓고 화를 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모진 말로 엄마 가슴에 못을 박고 엄마의 고통은 모른다는 식의 태도로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어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야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됐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엄마는 임신 초기에 입덧이 심해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나에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생쌀을 어금니 악물고 씹어 드셨다고 합니다. 또 배가 불러오면서부터는 변변한 임신복 한 번 입어 보지 못하고 밭일 나가실 때에는 흔히 말하는 몸뻬로 배부른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쓰셨다는 엄마. 엄마의 그 시간들은 가슴 아픈 기억이라는 감옥 속에서 한줌의 햇살을 받아 새싹이 움트는 것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그때는 미처 엄마도 여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철부지인 딸은 엄마가 영원히 내 엄마로만 머물러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를 낳은 지금에서야 엄마도 여자고, 임신이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큰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어려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이기적으로 내 입장만 앞세웠던 게 크게 후회됩니다.

그 당시 새 생명의 탄생은 다시금 우리 가족에게 활기를 되찾아주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아픈 과거까지 치유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지나온 시간들은 캄캄하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 나오는 것처럼 막막했지만 앞으로의 시간들은 행복으로만 예약돼 있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나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엄마는 남들 보기에 원더우먼처럼 키도 훤칠하시고 중년 부인답지 않게 옷의 태가 고우셨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그간의 힘들었던 시간들이 마음의 병이 됐는지, 내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상선 수술을 하시게 됐고 그후 평생 약에 의지하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엄마의 몸은 서서히 몸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좀 편하게 즐기며 살아야 할 연세에 병든 몸으로 나와는 16년 차이가 나는 늦둥이 뒷바라지하느라 농사일을 잠시도 놓을 수 없으니 엄마의 삶은 잠시도 편히 쉴 새가 없는가 봅니다. 요사이는 손 관절과 팔 부위에 류머티즘 관절염까지 생겨 손을 자유로이 사용하지 못할 때가 많고 잦은 주사로 혈관 부위의 뭉친 부위를 풀어야 하는 경우가 반복되고 있어 더욱 걱정입니다.
그래서 따뜻한 봄이 오면 반가우면서도 친정엄마를 생각하면 걱정이 앞서곤 합니다. 농부의 아낙인 엄마에게는 씨앗을 뿌려야 하는 고된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 부지런함이 몸에 밴 분이시라 늘 손에서 일이 떠나지 않는 엄마의 갈라터진 손이며 발뒤꿈치가 늘 안쓰러워도 멀리 있다는 핑계로 아무런 보탬도 드릴 수 없어 마음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올해 초에도 시댁에서 설을 보내고 친정에 들렀을 때 엄마는 혹시라도 빠뜨리는 게 있을까 싶어 내가 머무는 내내 먹을거리 등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으셨죠. 우리 식구가 떠날 땐 뒷좌석에 딸아이 앉을 자리 하나만 남겨놓고, 무슨 전쟁이 나서 피란이라도 가듯 보따리들을 가득 쌓아 놓으셨습니다. 오히려 “먹을 것도 없는데 보따리만 분주하다네” 하며 최 서방에게 미안해하셨던 엄마. 그것도 모자라 어느 틈엔지 쌀 팔고 콩 팔아 만드신 쌈짓돈을 가방에 몰래 찔러 넣어주시기까지….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핑 돌아 운전하는 남편만 아니면 목놓아 펑펑 울음을 쏟아내고 싶을 정도로 내 마음은 참을 수 없이 아려왔습니다.
부모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결혼한 딸자식은 잠시 얼굴만 빠꼼히 내밀어 생색만 내고 훌쩍 떠나버리는 손님 같기만 하니…. 이제 철이 들었는지 엄마가 늙어가신다는 생각에 가슴 아프고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엄마, 내가 철없을 때 동생 가졌다고 모진 말을 함부로 해서 속 많이 상하셨죠? 워낙 말할 때 툴툴 대는 말투 때문에 엄마 가슴에 상처 낸 적도 한두 번이 아닐 거예요. 엄마도 세월을 비켜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만 늙고 조금만 아팠으면 좋겠어요. 엄마, 사랑해요.”
늦게라도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 기쁘고, 이제는 엄마를 같은 여자로서 여기며 친구처럼 수다 떨 수 있는 날들이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엄마를 생각하면 목부터 메이고, 엄마에 대한 기억은 실타래처럼 풀어도 풀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지금껏 나를 지켜주신 소중한 엄마가 아직 살아계셔서 못다 한 효를 다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젠 엄마 자신을 위해 사세요” 김난현(38·경남 진해시 청안동)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엄마!이젠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찡해집니다.
어렸을 때 불렀던 엄마와 결혼 전에 불렀던 엄마! 결혼해서 10년을 살면서 지금 부르는 엄마는 같은 엄마이지만 딸의 마음은 다르답니다.
4남매의 막내로 자란 딸은 항상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컸어요.
가부장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우리 옛날의 아버지상이 바로 저희 아버지시고, 엄마는 궂은일만 도맡아 하셨죠. 집안에 쌀이 떨어져도 아버진 방에서 헛기침만 하실 뿐 나가서 돈 벌어서 자식들 먹여 살리려는 분은 항상 엄마셨지요. 엄만 시장에서 야채장사에 설렁탕 집도 하고 동네 맞벌이부부의 아기도 돌봐주는 등 안 해본 일 없이 사셨습니다.

올해로 예순다섯이신 엄마를 모시고 살겠다는 큰아들의 청을 엄마는 ‘아직은 내 손으로 밥을 해먹을 수 있으니 자식에게 짐되긴 싫다’며 계속 일을 하십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볼 때면 괜한 고집을 부리시는 것 같아 속상했는데 엄마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10년 전 막내딸이 그 많던 선자리를 마다하고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남자가 부모님도 안 계시고 형제도 없고 그렇다고 남들이 알아주는 대기업에 다니는 것도 아니어서 엄마는 마음에 안 들어하셨지만 막내딸이 선택한 사람이니 남들은 뭐라 해도 딸의 선택을 믿어주셨지요. 지금 제가 남편 사랑 듬뿍 받으며 아이들 잘 키우고 가정적이며 회사에서도 인정받는 남편의 아내로 살아갈 수 있는 건 모두 저를 믿어주신 엄마 덕분입니다.
제가 친정에 가면 엄마는 항상 뭐든지 싸서 주시려고 합니다.
우거지 삶은 것, 맛난 겉절이, 사골국물 얼린 것, 고추장, 된장 등등….
장성한 딸이 아직도 엄마에겐 철부지 막내딸로 보이나 봅니다.
시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딸이 가끔 시할머님 모시는 게 힘들다며 투덜거리면 엄만 그때마다 “그래도 네가 잘해드려라. 나이 먹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서운함을 많이 느끼는 거니깐 작은 것에도 신경 써드리고…. 너는 아직 젊으니 할머니께 잘해드리면 그 복이 네 자식들에게 오는 법이야” 하며 딸의 갈 길을 바로잡아주시지요.
딸은 삶이 힘겹거나 지치면 다 덮어두고 엄마 얼굴을 보러 갑니다. 엄마와 함께 오랜 시간 얘길 나누고 나면 다시금 힘을 얻어 새 삶으로 돌아와 씩씩하게 살아간다는 걸 엄만 아실까요?
항상 받기만 하던 딸이 이제는 엄마께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엄마! 엄마도 삶이 힘들고 지칠 때가 있지요. 그럴 때면 엄마의 단짝 친구, 막내딸을 찾아주세요. 엄마에게 좋은친구가 돼드릴 게요. 그리고 이제는 가족을 위한 삶이 아닌 엄마 자신을 위한 삶을 사시길 바라요. 아프면 돈 아낀다고 병원 가는 일 미루지 말고 건강 생각하시고요. 엄만 그동안 많은 걸 주셨어요. 이제는 그냥 그 자리에서 받으셔도 되거든요.
엄마! 이젠 막내딸의 사랑을 편한 마음으로 받아주세요.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곁에 계셔주세요.
사랑해요 엄마!




“엄마 아픈 팔다리 막내딸이 꼭 낫게 해드릴게요” 이혜정(35·서울 강서구 등촌3동)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엄마는직장인 남편, 1남3녀의 자녀를 둔 평범한 가정주부였습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저희 집에 불행이 찾아온 건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교통사고로 아버지는 7년 동안 병원 신세를 지셔야 했고, 그때부터 엄마는 가장 아닌 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짊어져야 했지요. 시장에서 옷장사를 하며, 밤에는 아버지의 병간호와 네 명의 자식들 뒷바라지까지 해내야 했습니다.
병원비로 인해 생활비 등 넉넉지 않은 형편이어서 자식들에게 좋은 것 하나 먹이지 못하고, 좋은 것 하나 해주지 못하는 것이 항상 미안하다는 엄마. 당신을 위한 것에는 조금의 지출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힘든 재활훈련과 엄마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아버지가 퇴원하시고 저희도 어느덧 장성해 다시금 가정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물론 목발에 의지하며 남은 생을 보내야 하셨지만, 이게 어디냐며 아버지는 저희에게 멋쩍은 웃음을 보이셨지요.

언니들도 직장생활을 하며 번 돈을 생활비와 막내인 저의 학비에 보태주었고요. 그럴 때마다 엄마는 미안해하면서도, 자식 키운 보람이라며 주름 가득한 얼굴로 함박웃음을 짓곤 하셨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우리 가족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나 봅니다.
항상 속이 안 좋다며 소화제를 드시곤 하던 아버지는 청천병력 같은 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중기에서 말기로 넘어가는 상황이었고, 엄마는 생업이던 가게 일을 그만두고 밤낮으로 아버지께 매달리셨습니다.
두 번의 수술과 극진한 간호로 아버지의 병세는 호전되는 듯했으나, 엄마는 그간의 짐이 너무나 무거웠는지 아버지의 속옷을 챙겨 병원으로 가시는 도중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뇌졸중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 후 입원하신 엄마. 그 모습을 보고 다 당신 탓이라며 식사까지 거부하시던 아버지. 끝내 눈 감으실 때까지 엄마 걱정으로 눈시울을 몰래 훔치던 아버지를 편안한 곳으로 영원히 보내드리던 날, 엄마의 넋 나간 듯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란히 누워계셨던 병원 침대의 한 곳이 하얀 시트로 텅 비어버린 그날, 저희도 울고 또 울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마지막 약속이라며 훌훌 털고 혹독한 재활훈련을 자청하신 엄마는 이제 많이 좋아져 “니네 아버지는 평생을 불편한 한쪽 다리로 살다 가셨는데 난 60이 돼서야 한쪽으로 의지하고 사는 거니 참 운이 좋은 사람인가 보다” 하며 웃으십니다.
빠듯한 형편으로 평소 엄마에게 잘해드리지 못하는 막내딸이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그리고, 엄마 아픈 왼쪽 팔다리 꼭 낫게 해드릴게요.”
과거의 아픈 기억들은 뒤로하고 이제 행복의 희망만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젠 저희 가족에게 슬픔, 아픔, 절망이라는 단어 대신 희망과 행복,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살아가려고 합니다.

“저희 엄마는 저런 일을 당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은혜를 베푸시고 대신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엄마가 살아 계신 동안 다시는 저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기도가 받아들여졌는지, 혹은 엄마 당신의 의지가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너무나 감사하게도 엄마는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하셨다.
본래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고 한다. 하지만 살면서 남편이 있다는 게 참 든든하고 행복할 때가 많다. 그 기쁨 못 누린 채, 자식만을 바라보고 산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세월이 지나니 엄마가 겪었을 고통을 조금씩이나마 깨닫게 된다. 하지만 짠~한 마음과 달리 몸으로 효도하지는 못하는 게 사실이다. 위아래 챙길 것이 많은 나이를 핑계 삼지만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다. 부모에겐 자식이 전부지만 자식에겐 부모가 전부가 아니다. 알량한 나는 내 것을 쥐고 여전히 엄마의 사랑을 받기만 하고 있다. 언제쯤 그 사랑을 갚을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 되뇌는 말, “엄마! 그 은혜 다 갚을 수 있도록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인기 영어강사 이보영 ‘일과 가정에 최선 다하는 모습 보여주신 어머니’
토종 영어강사로 잘 알려진 이보영씨(40)는 한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김경오씨의 딸이기도 하다. 그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 더욱 지극해졌다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들려줬다.

구술 정리·백경선‘자유기고가’

“유명인으로서가 아닌 ‘최고의 어머니’로서 당신이 더욱 자랑스럽습니다”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어머니는 50여 년 전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독보적인 여성 비행사였다.
사실 어릴 적 나는 어머니가 하는 일이 정확하게 뭔지 몰랐다. 그저 “왜 우리 엄마는 여느 엄마들처럼 한복을 입고 쪽진 머리를 하지 않을까” 하며 궁금해했다. 화장을 하고 화려한 모자를 쓰고 제복을 입은, 남들 눈에 띄는 어머니가 싫었다. 거의 날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에 등장하는 유명한 어머니를 둔 것이 소심한 나로서는(믿어지지 않겠지만 어린 시절 나는 정말 소심하고 말수도 없는 전형적인 A형 타입이었다)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어딜 가나 난 ‘김경오의 딸’이라는 데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심지어 학교 선생님들도 어머니의 팬이었다. 조금이라도 성적이 떨어지는 날이면 선생님들에게 “보영아, 어머니는 훌륭한데 너는 이게 뭐냐”는 지적을 듣기도 했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더 내성적인 아이가 돼갔다.
하지만 철이 들면서 어머니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소속된 ‘대한항공회’에서 우리 학교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사실을 알고 좋아했던 적이 있다. 내 어머니가 하는 일이 단순히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적엔 요즘처럼 부모가 맞벌이를 한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은 일을 하는 어머니가 아무래도 가정에는 소홀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집안일에도 빈틈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집안일을 도우미 없이 직접 했고, 그러기 위해서 매일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셨다. “마땅히 다른 방법이 없으니 잠을 줄일 수밖에 없다”면서 “남들 자는 만큼 다 자고 남들 노는 만큼 다 놀면 그 모든 일을 어떻게 다 해내겠느냐”는 말을 자주 하셨다. 힘든 내색 없이 ‘일을 운동처럼 즐긴다’는 어머니는 ‘강철 여인’이었다.
그에 더해 ‘최고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늘 내가 등교한 후에 나가셨고 하교하기 전에 들어오셨다. 덕분에 나는 한 번도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낀 적이 없다. 사춘기 시절 어쩌다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면, 곁에서 어머니가 해주셨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얘, 그까짓 거 다 잊어버려라. 하늘에서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성냥갑 같단다. 작은 일에 연연하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잖니?”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난 후 더욱 존경하게 된 ‘강철 여인’, 나의 어머니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뒤 내 어머니처럼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실감하고 있다. 어머니는 항상 “모든 일의 근본은 가정”이라며, “아무리 밖에 나가 성공하고 돈을 잘 벌어도 가정을 팽개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강조하신다.
나는 ‘좋은 엄마’로서 내 어머니의 반이라도 따라가고 싶다. 지난 2004년 말에 9년 장수 프로그램 EBS 라디오 ’모닝 스페셜‘을 그만 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들 상우가 아침에 엄마가 없는 데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자주 짜증을 내던 아이가 요즘은 내가 출근하면서 유치원에 바래다주니까 많이 달라졌다. 한편으론, 아침에 혼자 책가방 싸서 등교하게 했던 유학 간 딸 상민이가 마음에 걸렸다. 지금 한창 사춘기인 딸아이 곁에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게 아쉽다. 하지만 나는 내 어머니가 항상 나와 여동생(지영이는 최근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에서 영어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에게 가르쳤던 것처럼, 내 딸 상민이를 ‘강하고 독립적’으로 키우고 싶다. 걱정스러웠지만 중학생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유학 보낸 데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내가 유학파인 어머니에게 영어를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은 영어가 아니다. 어머니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바로 모든 일을 즐기면서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그것이 사회생활이든 가정일이든-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 어머니는 이것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 본보기였다.
“엄마, 당신이 계셨기에 지금의 제가 당당하게 설 수 있었어요.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동화작가 강민경 ‘세 딸들의 집 환하게 밝혀주신 우리 엄마’
성장의 아픔과 그늘을 따뜻한 시선으로 재치 있게 얘기하는 동화작가 강민경씨(34)는 자신의 그런 ‘밝음’과 ‘긍정’은 전적으로 엄마에게서 받은 것이라며 친정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이 담긴 사연을 보내왔다.

글·강민경’동화작가‘

“더도 덜도 말고 저도 딱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응응,그래, 아이구, 일요일 날씨가 어지간해야 할 텐데. 그래, 그날 시간 늦지 말고 거기서 보자. 그래.” 전화를 끊은 엄마의 손길이 또다시 낡은 수첩의 전화번호 칸을 뒤적인다.
“가만있자, 경자한테는 얘기했고 그 다음에 경순이 번호가….”
아무래도 엄마의 통화가 길어질 모양이다.
전화해서 이것저것 연락하는 것이 쑥스럽고 멋쩍다고 한사코 마다하던 고향 동창들의 총무를 맡으신 후, 이렇게 날아갈 듯 열정적으로 연락병 임무에 충실한 모습을 본 게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이 기분 좋은 신바람은 돌아오는 일요일의 특별한 나들이, 고향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열리는 동창회 덕이다. 고향에 살고 있는 선후배들은 물론, 엄마처럼 타지에서 자리 잡고 사는 친구들까지 정말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같이 늙어가는 모습, 살아가는 얘기들을 나누게 됐다고 엄마는 꽤 오래전부터 소풍 전날의 어린아이처럼 무척 들떠 계신 것이다. 택한 날이 하필 올 들어 최악의 황사가 몰려온다는 날이건만 기세등등한 황사주의보도 엄마의 기분 좋은 설렘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는 나에게까지 엄마의 나른한 행복감이 향기처럼 전해진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언 50년. 엄마의 유일한 학창시절이던 그때로부터 멀어진 지 어느덧 반세기나 지났다. 하루 두 번 읍내를 오가는 버스가 타고 싶어 버스 안내양이 되고 싶었다던 철부지 소녀였던 우리 엄마.

지금의 엄마는 그날의 엄마와 얼마나 멀어져 있을까.
그 반세기 동안 엄마는 홀어머니를 잃었고, 늘 애틋해하던 손위 이모를 잃었다.
그리고 마흔셋 젊은 나이에 남편마저 잃고 말았다. 아직 어린 세 딸과 함께 살아내야 할 당신의 인생이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참으로 기가 막히고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배운 것도 적고 가진 것도 넉넉치 않던 당시 엄마의 형편을 생각하면, 그저 지나가는 아무 상관없는 나그네라도 한숨과 희생, 조금은 일찍 철든 겉늙은 아이들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일 게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우리의 지난날 어느 구석에서도 엄마는 그러한 그늘을 내비치지 않았다. 조금은 소란스럽고, 얼마간은 대책 없이 낙천적이고, 또 그보다 꽤 많이 따뜻하고 밝았던 네 여자의 집. 그 집을 환하게 지켜준 건 네 여자 중 나이도 제일 많고, 키도 제일 작은 우리들의 엄마였다.
6·25 때 남편을 잃고 홀로 삼남매를 키워야 했던 외할머니는 행여 ‘아비 없는 자식’이란 꼬리표라도 달까봐, 아이들에게 무척이나 엄하고 어려운 분이셨다고 한다.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빌어먹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던 외할머니의 시퍼런 서슬이 엄마는 너무나 무섭고 또 반면 애처롭게 느껴졌단다. 그래서 당신 자식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무서운 엄마는 되지 말아야지, 불쌍한 엄마는 더더욱 되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입술 꼭 깨물고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했단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정말 우리 딸들에게 친구 같은 엄마가 돼주셨다.

엄마를 떠올리면 행복한 웃음부터 번지는 ‘친구 같은 엄마’
세 딸들이 차례로 데이트 나갈 때마다 당신 일처럼 설레며 옷매무새며 머리 모양까지 꼼꼼히 신경 써주시던 엄마, 침울할 수도 있었을 아빠 산소 찾아가는 길을 새벽 일찍 따끈하게 말아둔 김밥으로 소풍처럼 만들어주신 엄마, 언제부턴가 막내의 극장 파트너가 되어 미니홈피 속 극장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
아직 철이 덜 든 까닭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엄마를 떠올리면 눈물보다 행복한 웃음이 먼저 차오른다.
엄마, 고마워요.아이 때문에 여전히 엄마 손길 아래 기대 사는 저에게, “바쁜 게 좋은 거다. 아직 내가 쓸모 있어 다행이다”라며 미안한 내 마음까지 헤아려 말 건네주셔서요.
엄마, 고마워요.늦은 나이에 인지가 덕지덕지 붙은 운전면허시험 신청서를 들고 전국을 누빌 수 있었던 용기를 가지셔서요. 그리고 마침내 면허증 앞세워 친구들과의 꽃놀이도 대수롭지 않게 앞장설 수 있는 운전석의 그 당당한 모습이 고마워요.
엄마, 고마워요.평탄치 않던 우리의 지난날, 아빠 없는 빈자리의 그늘 때문에 우리 마음이 다치지 않게 늘 밝게 웃어주셔서요. 무엇보다 엄마의 마음이 다치지 않고 여전히 명랑하고 힘센 엄마로 우리 곁에 변치 않고 계셔서요. 이 악물고 울음 참느라 목에 멍울이 생겼어도 변함없이 그렇게 웃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엄마, 고마워요.벼르고 별렀던 검버섯을 빼고는 거울 보는 일이 부쩍 즐거워졌다며 맑게 웃어줘서요. TV 토크쇼를 보다가 좋아졌다며 MC몽의 노래를 흥얼거려서요. 황사보다 거세었을 인생의 고된 바람에도 여전히 순수하고, 여전히 낙천적이고, 여전히 인생에 감사하셔서 너무, 너무 고마워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있었으면….

“엄마처럼 되는 것보다 더한 영광은 없어요” 김숙희(39·대구시 남구 대명동)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2002년 12월, 제가 엄마의 있는 속 없는 속 다 태우고 35세란 늦은 나이에 결혼했잖아요, 엄마.
어릴 때 고향집에서 지낸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엄마와 함께 돌아가신 아버지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네요. 찔레와 여린 강아지풀, 그리고 찔레 꺾어 먹으며 방학 때면 소 풀 먹이러 들판을 헤집고 다니던 겁 없던 시골 가시내….
이번 기회를 빌려 아버지 살아계실 적, 그리운 옛 추억 한번 더듬어 보려구요. 유난스러웠던 부부금실 때문인지 엄마 아버지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네요.
저 세상에 계시는 그리운 아버지, 애처롭고 살갑고 여린 소녀같이 사랑스런 엄마, 이 둘째 딸내미와 함께 추억여행 한번 해보실래요?
새벽녘 먼동이 트기도 전에 아버진 소 죽을 쑤러 나가시면서 언제나 카세트테이프를 돌리셨어요. 한적한 시골마을 새벽안개가 걷히기도 전 우리집 앞마당에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흘러간 노래와 천수경, 반야심경의 불경 소리가 저희들의 곤한 잠을 깨우곤 했죠.
시골생활이 무조건 싫던 시절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때만큼 좋은 적도 없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간경화로 일찍 세상을 뜨시긴 했지만 엄마 아버진 세상이 부러워할 만큼 부부금실이 좋으셨으니까요.
술을 무척 즐기시던 아버지, 늘 기분 좋게 술 한 잔 들고 나면 폼나게 소리 한가락 흘리시면서 “난 60만 되면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어도 홍시가 저절로 입으로 들어온데이. 두고 봐라”며 늘 기대에 부푸시곤 했는데….
추운 한겨울 새벽같이 공사장에 일하러 가실 때 보온밥통도 아닌 군용 철제 도시락에 제대로 된 반찬도 없이 도시락을 싸 가시던 아버지 모습, 다녀오셔서는 “우리 마누라 오늘도 맛있게 잘 먹었네!” 하며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시던 따뜻한 아버지… 잊힐 때도 됐건만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옛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네요.
그런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셨고, 만 하루 만에 마지막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그만 눈을 감고 말았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부터 당신 손으로 농사짓기가 힘들어지자 집안 아저씨에게 농사일을 넘기고 그때부터 지금껏 회사에 다니시는 우리 엄마. 계절에 관계없이 별 보고 나갔다 별 보며 들어오시는 엄마니 그 연세에 녹초가 안될 리 만무하지요.
자식이 뭔지, 자식들 나눠주겠다고 회사 다니는 와중에도 밭농사를 손수 짓고 야간작업이라도 하는 날이면 낮에는 줄곧 밭에서 일을 하시니, 어떨 땐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고 일만 하시잖아요. 그러니 성한 몸인들 배겨낼 리 있나요.
엄마, 엄마가 입버릇처럼 달고 사시는 말이 “잠이 보약이다” 잖아요.
원 없이 잠 한번 실컷 자고 싶다는 거, 마음만 먹으면 쉬운 일이건만 엄마는 왜 못하시는지….
엄마, 지난해까지만 해도 많이 야위긴 했지만 67세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건강하셨는데 올해 들어 부쩍 몸 이곳저곳이 저리고 아프고, 얼굴에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내심 걱정이에요.
지난번 종합검진 때도 ‘주의를 요한다’는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와서 더욱 염려스럽고요.
갓 시집오면서 지금껏 단 하루도 일을 놓지 못한 탓에 손은 거북등처럼 굳은살이 박여 있고 손톱 밑이 갈라져 피가 나는 고통이 있건만 모두 달게 받아들이시는 우리 엄마. 이 모두가 자식들 생각해서 내색하지 않는 거란 생각이 드네요.
엄마 딸이 36세라는 늦은 나이에 첫아이 낳고 조리원에 있을 때 엄만 열일 제쳐두고 오셔서는 “우리 딸 고생 많았제. 네가 비로소 엄마가 됐구나. 우리 딸 장하다!” 하며 눈시울을 적시셨지요. 그때 꼬옥 잡은 엄마 손이 너무도 따뜻하고 포근해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갓 태어난 손자를 조심스레 안으시며 또 한 번 눈시울을 적시던 엄마.
“미안해, 할머니 손이 많이 거칠다. 대신 깨끗이 씻었다”며 금쪽같은 손자에게 행여 해라도 될까 염려하시는 우리 엄마.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된 건데…. 모두가 자식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인 줄 아는데 당신은 오히려 미안해하십니다.
손자의 백일, 첫돌, 두 돌까지 잊지 않고 챙겨주시고 책 사주라며 밤을 새워가며 힘들게 버신 돈을 제 손에 꼭 쥐어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산모에게 좋다고 가물치며 호박 진액까지 보내주시더니, 어쩌다 한 번씩 다녀가실 땐 혼자벌이에 빠듯한 살림일 텐데 모유 먹이려면 영양가 있는 것 많이 먹어야 된다고 오히려 저에게 용돈을 쥐어주시는 엄마. 당신 몸은 안중에도 없고, 지금은 또 당신 딸이 아이 키운다고 힘들어서 너무 많이 말랐다고 걱정하시는 엄마.
언제쯤이면 엄마의 사랑을 다 갚을 수 있을까요?
결혼 전까지 단지 결혼을 안 한다는 이유로 엄마 속 많이 태우며, 본의 아니게 맘고생 또한 많이도 시켜드렸던 일이 죄송스럽습니다.
기다림이 너무도 길었던 탓인지 저희 엄마의 둘째 사위 사랑이 남다르세요.
지금은 아무런 걱정 없다고, 날아갈 것 같다고 말씀하는 우리 엄마. 두 아들 모두 공무원으로 나름대로 앞길을 잘 열어가고 있고, 두 딸 또한 결혼해서 별 탈 없이 자식 낳고 오순도순 잘 지내고 있으니 이제 당신 건강이나 챙기면서 여생을 즐기셨으면 하는 게 자식들의 바람인데 엄만 또 그게 아닌가 봅니다.
오빠 언니 밑으로 두 아들 멀리 보낸 엄마세요.
금쪽같은 어린 두 아들 먼저 보낸 슬픔과 고통이 오죽했겠어요.
죽음과 같은 고통에서 주위 분들의 권유로 39세에 낳은 막둥이가 올해로 벌써 28세네요.
엄마가 막내를 낳으신 그 나이 39세, 제 나이 올해로 39세… 올 연말 둘째 출산을 앞두고 새삼 엄마에 대한 애틋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새록새록 묻어납니다. 이제 그만 쉬시라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막둥이 결혼시킬 때까지만이라도 일하겠다며 늘 얼굴에 미소를 담고 사시지요.
“엄마, 엄마 둘째 딸내미, 이 다음에 꼭 엄마만큼만 될래요. 왜냐구요? 세상에 엄마 삶보다 더한 최선은 없거든요. 세상에 엄마처럼 되는 것보다 더한 영광은 없으니까요. 엄마, 당신이 최고예요! 엄마 사랑해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같이 살면서 이 세상 행복 다 누리자구요. 울 엄마 김태임 파이팅!!!”




“엄마의 젊음 되돌려줄 타임머신 있었으면…” 박영아(32·부산시 북구 덕천1동)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어김없이 “뛰뛰뛰” 울리는 시계의 알람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납니다.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뽀얀 햇살 속에 문득 엄마의 얼굴이 비칩니다. 곁에 있어도 그리운 엄마, 어린아이처럼 넓은 가슴에 폭 안기고 싶은 우리 엄마. 나도 모르게 “엄마…” 하며 혼잣말을 합니다.
결혼해 아이를 낳은 이제야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게 됩니다. 저희 엄마는 길다면 긴 55년 세월을 지혜롭게 살아오신 분이랍니다. 표현은 안 하지만 여러 말 못할 어려움, 힘든 일이 많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엄마’라는 이름으로 험한 세월도 지금까지 잘 헤쳐오셨지요. 그런 엄마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우리 막내 남동생은 잘생기고 착하기까지 한데요, 다섯 살 때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오른쪽 손과 다리가 마비되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와 여동생이 초등학교를 다니고 엄마가 직장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얘기하며 집으로 돌아와 보니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있었고, 엄마는 집 떠나갈 듯 목놓아 울고 있었습니다.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어요. 제가 느끼는 아픔보다 다친 어린 자식을 부둥켜안은 엄마의 모습이 너무도 처절해 보였습니다. 의식을 잃고 피를 흘리는 어린 아들을 부둥켜안은 채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되고…. 신발 챙겨 신을 정신도 없이 맨발로 무조건 병원만 찾아 뛰셨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라 기억은 희미하지만 남동생은 식물인간 같았습니다. 의사는 희망이 없다고 했지만 엄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 남동생에게만 매달려 지내셨지요. 하늘도 엄마의 지극정성에 감동했는지 남동생은 깨어났습니다. 그때 엄마가 희망을 놓아버렸더라면 지금의 남동생도 아마 없었을 겁니다. 엄마의 힘은 정말 무한대인 것 같아요. 그 일이 있은 후 한시름 놓는가 했더니 동생이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을 구하지 못해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본인도 일하고 싶은 마음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세상은 참으로 냉정하더군요.
오른손이 마비된 상태라 더욱 찾기가 어려웠어요. 하지만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가 오는 모양입니다. 남동생은 당시 한울장애인자활센터에서 컴퓨터를 배웠는데, 센터 내에서 ‘장애인 세차팀’을 만들어 드디어 일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세차 일을 하면서 남동생은 웃음이 많아졌고, 엄마의 얼굴에도 봄이 온 듯했습니다. ‘장애인 세차팀’이 부산 MBC 방송국에까지 알려져 아들 덕택에 TV에 나온 당신의 모습을 보고 “내가 많이 늙어 보인다”고 하면서도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하지만 그 말에 제 마음은 순간 짠해졌습니다.
자식이 뭔지, 한창 꽃피울 20대에 저희 삼남매를 낳아 키우시느라고 좋은 세월 그냥 다 보내셨으니…. 다시 한번 젊음을 되돌릴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남동생에게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더니 “돈 많이 벌어서 엄마 제주도 보내드리는 게 소원”이라고 하더군요. 그 얘길 듣고 보니 그 흔한 제주도 여행 한 번 못 가보신 엄마 생각에 가슴 한쪽이 저려옵니다.
엄마는 그런 분이세요. 입을 거 안 입고, 먹고 싶어도 먹지 않고 오직 자식들 챙겨주랴, 이런저런 걱정하랴… 평생 그렇게 자식 생각으로만 보내실지 모릅니다. 저도 엄마를 닮아 같은 길을 걷게 되겠지요.
그렇다 해도 저는 감사하게 받아들일 겁니다. 왜냐구요? 세상의 어느 비싼 보석을 준다 해도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진 보석과는 바꾸고 싶지 않으니까요.
“아~ 벌써 봄이구나” 하시는 엄마! 인생은 60부터라고 했던가요. 엄마도 이제 제2의 인생을 꿈꾸는 당당한 여인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엄마의 짐 나눠지는 딸이 될게요” 강분희(43·경북 안동시 북후면 옹천3리)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먼저엄마, 정말정말 고맙습니다. 한 번도 엄마한테 고맙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마음속으로는 골백 번도 더 고마운데 왜 그렇게 말로는 한 번도 못했는지….”
결혼하고 나서 첫아이를 쌍둥이로 낳았을 때 첫아이인지라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애들이 양쪽에서 울면 나도 같이 엉엉 울기만 했지요.
삼칠일 때까지 친정에서 몸조리를 했을 때 엄만 과일 행상을 하셨고 그렇게 힘든 장사를 하면서도 싫은 내색 한 번 안 하시고 행여나 딸내미 손에 물 묻힐까봐 야단을 치곤 당신이 다 하셨죠.
그런데 쌍둥이 낳고 나서 산후우울증이 심했던 철없는 딸은 애써 해주신 미역국은 먹지도 않고….
그럼 당신은 속상해서 울곤 하셨지요.
그땐 왜 그렇게 철이 없었는지….
애들이 커서 초등학교 입학할 때쯤 애들 아빠가 먼 길을 떠나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큰 충격에 빠져 있을 때도 엄만 제게 큰 버팀목이 돼주셨어요.

“애들은 어떡할래. 자식들 봐서 먹어야 될 거 아니냐. 그래야 살지. 애들 봐서라도 살아야지, 눈이 새까만 애들 놔두고 죽을래?”
엄마 말이 맞았어요. 애들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죠.
난 엄마 말대로 애들 때문에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내가 없음 우리 애들이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아찔했으니까요.
“애들 아빠도 니가 있으니까 믿고 갔지.” 엄마가 해주신 그 말씀을 들으니 정신이 바짝 차려졌어요. 그리곤 친정에서 애들을 데리고 몇 년을 같이 살았죠. 내가 사는 게 힘들어 눈물 쏟을 때마다 엄만 나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셨을텐데….
그 몇 년이 제게는 정말로 힘든 시기였어요.
혼자 울다가 웃다가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참으로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그렇게 몇 년이 흐르니 차츰차츰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요.
“이 악물고 열심히 살아야지. 애들이 있는데, 나한테 애들이…. 보란 듯이 예쁘게 키울 거야.”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어요.
“그래, 죽을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보자.”
지금은 애들이 예쁘게 자라주어 대학에 들어갔지요. 나 혼자 봐서 마음이 아프지만 애들 아빠도 저 먼 곳에서 보고 있을 거라 믿고 있어요.
그동안 난 피부관리사가 돼 오늘도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하고 있지요.
내가 여기까지 온 건 모두 어머니, 어머니 때문이에요. 당신이 없었다면 이겨내기 어려웠을 거예요. 지금도 해마다 내 생일 때면 미역국 끓여 주시고 아프면 와서 죽 쑤어주시고 김치며 반찬이며 부지런히 해서 나르시는 우리 엄마.
부족한 딸은 나와서 살고 있는 지금까지 어머니를 귀찮게 하고 있어요.
틈만 나면 엄만 제게 “니가 좋은 사람 만나서 사는 것 보면 원이 없다”고 하셨죠. 이렇게 혼자 사는 것 보면 당신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거라 하시면서요.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하지만, 고마워요 엄마. 나 죽을 때 같이 죽자고 한 말, 기억나죠? 난 엄마가 옆에 안 계시면 어떻게 살지 눈앞이 캄캄해요. 그러니까 나랑 오래오래 같이 살아요. 알았죠?
그리고 엄마, 아버지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어요. 한 5년 됐죠? 폐암 말기 판정 받으시고 여태까지 아버지가 살아계신 건 모두 엄마 정성 덕분이에요. 엄마 어깨 위에 내가 가장 무겁게 얹혀 있고 그 다음 아버지, 우리 형제들….
이젠 내가 엄마 어깨에서 내려올게요.
이렇게 중년이 될 때까지도 엄마만 의지하고…. 엄마, 나 낳아줘서 고마워요.
엄마 곁에서 의지하면서 살 수 있어서 고맙고요. 이제는 엄마 짐을 나눠 갖는 딸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엄마 언제까지나 건강하시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사랑해요.

“고통 준 아빠 묵묵히 병수발하시는 우리 엄마, 존경스럽습니다” 변현주(33·경기도 오산시 오산동)
‘친정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엄마,사랑하는 우리 엄마~’ 하고 생각만 해도 코 끝이 찡해옵니다. 이 글을 쓰려고 하니 벌써부터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제가 결혼한 지 4년이 돼갑니다. 결혼할 때 엄마가 얼마나 우셨는지 결혼사진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퉁퉁 부은 엄마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미어지기도 한답니다.
돌아가신 저희 외할머니께서 자주 들려주신 제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엄마의 슬픈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 착하고 순한 예쁜 아가씨가 어떤 남자의 말에 속아 경남 함양이란 시골 동네로 시집을 갔습니다. 경기도 성남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랑 행복하게 사시다 어린 나이에 아빠를 만나 결혼을 하셨지요. 땅도 있고 집도 있다는 소리에 외할머니께 반 허락을 받고 함양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쓰러져가는 집에 먹을거리가 없어 하루하루 일을 해 그 품삯으로 끼니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엄마는 이건 아니다 싶어 친정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엄마 배 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었으니까요. 엄마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죠. 친할머니께선 그때 당시 미신을 믿고 있었는데, 엄마 배 속의 아이가 재수 없고 그 아이가 태어나면 집안이 쑥대밭이 된다는 무당 말에 아이를 지우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엄마한텐 말도 안되는 소리였죠. 엄마는 할머니 말씀을 듣지 않고 힘든 일을 꾹 참고 또 참아내면서 그 아이를 지켜내 낳았습니다. 낳고 보니 잘생긴 아들이었습니다. 친할머니께서 손자를 보고 너무 좋으셔서 예전에 했던 말은 생각도 안 하시고 잘해주셨다고 합니다.
엄마의 행복도 잠시, 연년생으로 저를 낳고 난 뒤 몸조리는 커녕 생활은 더 힘들어져만 갔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살림하랴 밭일 나가랴 잘 먹지도 못해 더욱 힘들었지만 태어날 아이를 생각해서 힘을 내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 외할머니께서 엄마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 함양으로 내려가셨는데 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요.
너무 속상하신 외할머니께서는 우리 세 식구를 데리고 성남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외할머니 댁은 그래도 형편이 좋았습니다.
외갓집에 살면서 오빠와 내가 많이 아팠는데, 그때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침도 놓아주고 손과 발을 따주며 돌봐주셨습니다(그래서 지금의 제가 건강하게 잘살고 있나봐요. 엄마 말씀으론 그때 둘 다 죽는 줄 알았대요).
외갓집에서 조금 살 만해지니까 시골 친할머니께서 내려오라고 호통을 치셔서 경남 진주에서 아빠와 다시 살림을 꾸리셨습니다.
아빤 어느 회사에 생산직으로 들어가시고 우리 가족은 그 회사 사택에 살게 됐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돈이 나오지 않는 건지 아빠가 돈을 주지 않는 건지 좀체 생활이 나아지질 않았습니다. 아빠는 3남1녀 중 막내셨는데 유산 한푼 받지 못한 채 형님들한테 다 빼앗기고 그 와중에 친할머니께선 저희 집에 자주 계셨습니다. 저는 당시 나이가 어렸는데도 할머니가 너무 미웠습니다. 우리 엄마한테 못되게 하시니까 정말 싫었습니다. 그때 엄마는 셋째를 가졌는데 아기는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젖을 먹지 못해 죽고 말았습니다.
다행인지 엄만 바로 임신이 되어 예쁜 여동생을 낳았습니다. 그 동생이 지금은 26세의 아가씨가 됐습니다. 아빠의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생활은 더 힘들어져갔습니다. 아이들 키우랴, 할머니까지 모시랴,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엄만 일만 하셨습니다. 쥐포 만드는 공장에 다니고, 약쑥 뜯어다 장에 내다 팔고, 밭농사 지으면서 콩도 팔고, 염소와 토끼도 키워서 팔고….

여성동아 2006년 5월 5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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