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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외길 인생

가야금 산조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명인 양승희

“그간 외롭고 힘든 세월 살았지만 우리 음악 지켜나가는 데앞으로도 최선 다할 겁니다”

기획·김명희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ㆍ박해윤 기자

2006. 05. 04

가야금 산조의 맥을 이어온 양승희씨가 최근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 화려한 무대 뒤에서 명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외롭고 힘든 세월을 살았던 그가 인간문화재가 되기까지 감내했던 인고의 세월을 들려주었다.

가야금 산조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명인 양승희
가야금 산조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명인 양승희

한국산조학회 이사장이자 죽파류 가야금 산조의 맥을 잇는 명인 양승희씨(58)가 지난 3월 인간문화재(중요 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부문)로 지정됐다. 1988년 보유자 후보(준 인간문화재)로 임명된 지 18년 만이다.
“두 달 전에 아들 내외가 딸을 낳았어요. 그 아이 이름이 향인데, 향이가 태어난 뒤로 계속 좋은 일만 생겨요. 지난 3월 한국예술종합학교 국악과 겸임교수가 된 데 이어 인간문화재로까지 지정됐으니 말이에요.”
양승희씨는 인간문화재로 지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외롭고 힘들었던 지난 세월이 떠올랐기 때문. 고교시절 교회에서 합창을 지도하던 미국인 선교사의 권유로 처음 가야금과 인연을 맺은 그는 이후 한평생을 가야금에만 매달려 살아왔다.
“고등학교 때 고전무용과 성악을 배웠어요. 고전무용은 최승희를 좋아해서 제 이름까지 승희라고 지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여섯 살 때부터 배웠고 성악은 제가 좋아서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죠. 그런데 미국 선교사가 “한국음악을 놔두고 왜 서양음악을 하느냐”며, 가야금을 해보라고 권유했어요. 어디서 가야금 연주를 듣고, 그 소리에 푹 빠지셨던 모양이에요.”

미국 선교사 권유로 가야금 처음 접한 순간 운명적인 끌림 느껴
그는 선교사의 권유로 처음 가야금을 접한 순간, 마음이 녹아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게 운명이구나’ 싶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
가야금의 매력에 빠져 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한 그는 대학 2학년 때인 70년 죽파 김난초 선생을 만나 이후 20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산조음악의 창시자 김창조 선생의 손녀인 죽파 선생은 조부에게 직접 사사해 죽파류 가야금을 완성한 가야금계의 거목이다.
“선생님 댁에 머물면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어요. 학교에 잠시 다녀오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선생님 댁에서 하루 종일 가야금만 탔죠.”
가야금 산조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명인 양승희

양승희씨는 스승의 유언을 받들어 산조 음악의 뿌리를 연구하고 계승해왔다. 아래 왼쪽은 죽파 선생이 양승희씨에게 써 준 편지.


피 말리는 연습은 결혼 후에도 계속됐다. 76년 서울대 출신 과학자 노만균 박사(59)와 결혼한 그는 결혼 1년 만에, 낳은 지 백일도 안된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다시 연습을 위해 죽파 선생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연습을 하면서 문득 문득 아기의 얼굴이 아른거려 눈물지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너무 보고 싶어 못 참겠다 싶을 땐, 남편이 아이를 안고 왔어요. 그렇게 잠깐씩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죠. 아이를 볼 수 없고, 가족과 함께 할 수 없었던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어요.”

미국 해군연구소로 연수를 가는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떠난 이후 그는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행복을 포기하고 음악에만 몰두했다.
“그땐 아이에 대한 사랑보다 가야금에 대한 열정이 더 컸어요. 지금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후회돼요. 엄마로서의 역할과 예술가로서의 역할을 적절하게 나눴어야 하는데….”

“가야금에 대한 열정 불태우다 엄마로서의 역할 소홀히 한 게 지금도 가슴 아파요”
가야금 산조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명인 양승희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인 죽파가 곁에 있었기 때문. 죽파는 85년 일본 공연을 마치고 나서 그에게 ‘나의 계승자가 되려면 일심으로 가시밭길 산을 넘어 물을 건너 좌절함이 없이, 지극한 긍지와 인내로 음악에 광명이 올 때까지 노력함에 굴함이 없기를 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주기도 했다. 그는 편지를 받고 “처음엔 신파조라 웃음이 났지만 살아가면서, 특히 스승이 세상을 떠난 이후 힘들 때마다 가장 큰 힘이 돼준 것이 이 편지”라고 말한다.
20년 동안 함께 살다시피하며 산후조리까지 해주었던 죽파는 그에게 있어 스승이자 어머니였다. 그런 스승이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그는 3개월을 꼬박 스승 곁에서 정성껏 병간호를 했다. 혈육이 없던 죽파는 89년 임종 직전 자신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옥가락지를 그에게 물려주면서, 산조음악을 지켜나갈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항상 곁에 있던 어머니 같은 스승을 잃자 그는 극심한 체력 저하와 잦은 호흡곤란 증세로 7개월간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때 큰 힘이 돼준 사람이 바로 남편이다. 고체산소 개발자로 유명한 남편 노만균 박사는 호흡곤란을 겪는 아내를 위해 산소를 고체 상태로 변환, 저장시킨 기술을 응용해 산소 목걸이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남편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한 그는 대학 강의도 그만두고 산조음악 연구와 연습에만 매달려 99년에는 김창조 선생의 가야금 연주를 최초로 재현했다.
또 아쟁, 설장고 등 전통악기를 배우고, 판소리와 한국무용까지 두루 섭렵하는 한편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했다. “가야금 하나에만 매달리면 현이 가지는 진정한 울림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 국악계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 또 스승의 유언을 받들어 김창조 산조음악의 계승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다시금 다짐했다.
김창조 선생의 고향인 전남 영암군 측에서 선생의 기념관과 가야금 테마공원을 지을 예정인데, 그는 그 일에 앞장서서 도움을 주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앞으로의 계획을 하나 하나 털어놓았다.
“우리 향이에게 김창조 산조음악을 전수할 거예요. 그래서 산조음악을 영원히 지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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