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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름다운 사연

‘감동의 골든벨’울린 여고생 한민지 & 농아부모의 애틋한 사연

기획·김명희 기자 / 글 & 사진·김혜원‘오마이뉴스 기자’

2006. 05. 04

지난 4월 초 방영된 KBS 퀴즈 프로그램 ‘도전! 골든벨’에서 마지막 문제를 놓쳐 아깝게 골든벨을 울리지 못한 한민지양. 하지만 프로그램이 끝난 후 시청자 게시판에는 ‘골든벨은 이미 울렸다’는 격려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그늘 없이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 민지양과 부모 한휘·엄성연씨 부부의 감동 사연.

‘감동의 골든벨’울린 여고생 한민지 & 농아부모의 애틋한 사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민지양은 인권변호사가 돼 소수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기여하고 싶다고 한다.


지난 4월2일 KBS ‘도전! 골든벨’(관동지역 연합편)이 끝난 후 프로그램 게시판은 비록 골든벨을 울리지 못했지만 마지막 50번 문제까지 남아 있던 여학생을 칭찬하는 시청자들의 격려 글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게시판을 뜨겁게 만든 주인공은 강릉여고 3학년 한민지양(18).
“민지는 대단한 손녀예요. 농아인 부모를 대신해 어릴 적부터 부모의 입과 손발을 대신한 장한 손녀입니다.”
부모를 대신해 녹화장을 찾은 할머니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남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걸 짐작하지 못했을 정도로 민지양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저희 부모님은 장애가 있으세요. 장애를 가진 부모님 때문에 장애인의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인권변호사가 돼 장애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당당하고도 차분한 목소리로 소신을 밝힌 민지양의 모습은 프로그램을 지켜보던 수많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적셨다.
민지양이 밝힌 것처럼 아버지 한휘씨(48)와 어머니 엄성연씨(43)는 어렸을 때 각각 홍역과 열병을 앓고 나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됐다. ‘도전! 골든벨’이 방영되고 며칠 후 강원도농아인협회 강릉시지부에서 이들 부부를 만났다. 이들 부부는 7년째 그곳에서 농통역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농통역사는 수화를 배우지 못한 문맹 농아인들의 손짓이나 몸짓을 수화통역사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딸이 자랑스러웠지만 말을 할 수 없어 가까운 지인 몇 명에게만 문자 메시지로 자랑했다”는 아버지 한씨. 그에게 일찍 철이 든 민지양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었다.
“남다른 건 모르겠고 생후 10개월 무렵부터 울지 않았어요. 아마 어린 것이 그때부터 엄마 아빠가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나봐요. 배가 고파도, 기저귀가 젖어도 울지 않고 엉금엉금 기어와 엄마 몸을 툭툭 치곤 했지요. 말보다 수화를 먼저 배웠고요.”
어머니 엄씨는 한사코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하지만 민지양은 어려서부터 장애가 있는 부모의 보호자 역할을 대신한 특별한 딸임이 분명했다.
“부모가 말을 못하니 말을 배우면서부터는 민지가 부모의 입을 대신했어요. 서너 살부터 전화도 자기가 받고 구청이든 학교든 관공서든 말을 해야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민지가 함께 다녔죠. 그러다 보니 또래보다 일찍 철이 들었어요.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애인의 딸로서 당해야 했던 부당한 대우나 시선 때문에 아이가 조숙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하기도 하죠.”
엄씨는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고 하지만 민지양은 먼저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챙기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부모가 자랑스럽기만 하다고 한다.
“부모님이 녹화장에 오지 못했지만 서운하지 않았어요. 결과는 방송에서 보면 되니까요. 그날 어머니는 전국 농아인 대의원 정기총회에 참석했거든요. 딸도 중요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농아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시는 부모님이 자랑스러워요.”
민지양은 얼마 전 치른 모의고사에서 전국 1%에 드는 성적을 기록한 모범생이다. 이들 부부에게 공부 잘하는 아이로 만든 특별한 노하우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좋아하는 책을 맘껏 읽도록 하는 것 외에는 부모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것. 또 되도록이면 모든 일을 민지양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믿고 맡겼다고 한다.

“좋아하는 책을 맘껏 읽게 하고 딸의 결정과 판단을 절대적으로 믿어”
‘감동의 골든벨’울린 여고생 한민지 & 농아부모의 애틋한 사연

장애가 있으면서도 한민지양을 반듯하고 당당하게 키워낸 부모 한휘·엄성연씨 부부.


“중3 여름방학 때 민지가 머리 색깔을 바꾸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미용실에 데리고 갔더니 머리를 완전히 탈색하겠다는 거예요. 겨우 뜯어말려서 주황색으로 염색하는 걸로 합의를 봤죠(웃음). 때로는 부모의 뜻과 전혀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저희는 민지를 믿어요. 아이의 결정과 판단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 그것밖엔 없어요.”
부모는 한사코 내세울 만한 방법이 아니라고 하지만 ‘믿음’, 그것은 민지를 키워낸 이들 부부만의 특별한 교육방식이 아닐 수 없다. 부모의 절대적인 믿음은 민지양이 바르게 자랄 수 있었던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던 셈.
“아무리 늦어도 부모님과 하루에 30분 정도는 수화로 대화해요. 저는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고 부모님은 협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죠. 저나 부모님이나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에요. 매일 보는 가족끼리 할 이야기가 뭐 그렇게 많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려서부터 쭉 그렇게 해와서 그런지 하루라도 대화를 하지 않으면 허전할 정도예요.”
민지양과 부모의 대화는 집에서뿐 아니라 온라인으로도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특히 민지양과 엄씨는 인터넷 미니홈피에 공동 다이어리를 만들고 수시로 대화를 나눈다고. 민지양의 허락을 받아 살짝 들여다본 모녀의 비밀 다이어리는 샘이 날 정도로 알콩달콩했다. 친구처럼, 연인처럼 수시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모녀를 보니 방송에서의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민지양의 모습이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부모로부터 확고한 지지와 절대적인 믿음을 받는 아이가 밖에 나가서도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기 때문이다.
한씨와 엄씨는 농아인협회에서 일하고 있지만 엄씨는 무보수 명예직이어서 한씨의 월급만으로 생활하는 형편이다.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한씨가 꿀을 채취해 생활에 보태고 조금씩이나마 저축도 하며 알뜰하게 살아가고 있다. 민지양은 “그래도 아버지께서 양봉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농아인에 비하면 넉넉한 편이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도 별로 모자란 것 없이 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사회에서 소외되고 멸시당하는 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인권변호사가 되겠다”던 민지양의 모습은 부모의 그것을 그대로 빼닮은 듯했다.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온 부모를 보고 자란 딸의 마음속에도 어느새 곱고 바른 심성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민지양이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더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온 부모님을 위해 당당하게 골든벨을 울리고 싶었는데 마지막 50번 문제를 놓친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자 그의 부모는 한사코 고개를 젓는다.
“민지야, 엄마 아빠 마음속엔 이미 골든벨이 울렸단다. 너무나도 크고 아름답게 말이야. 엄마 아빠는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자랑스러워. 그걸로 충분해. 민지는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우리 딸이야.”
자신의 처지에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 손을 내미는 부모와 그런 부모의 뜻을 이어 같은 길을 걸어가겠다는 딸. 이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어느새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소리가 돼 멀리 멀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인터뷰는 강원도농아인협회 강릉시지부 김현철 수화통역사가 도움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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