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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전시 공간‘갤러리 행’문 연 엄상익·신정행 부부

기획·구가인 기자 / 글·김순희‘자유기고가’ / 사진ㆍ홍중식 기자

입력 2006.04.12 13:26:00

‘전시’는 화가가 서는 ‘무대’다. 아무리 좋은 작품도 전시되지 않으면 그 빛을 발휘하지 못한다. 작품의 무대가 필요한 가난한 화가들을 위해 변호사 엄상익ㆍ신정행 부부가 나섰다. 이들은 지난 3월 화가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전시공간, ‘갤러리 행’을 열었다.
무료 전시 공간‘갤러리 행’문 연 엄상익·신정행 부부

‘갤러리 행’의 큐레이터를 맡은 딸 정아씨, 신정행 관장, 엄상익 변호사.(사진 왼쪽부터)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배고픔은 여전히 화가들의 대명사다. 일부 유명작가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생활고에 시달린다. 전시회를 열고 싶어도 갤러리를 빌릴 돈이 없어서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등의 무료 변론을 맡았던 인권변호사 엄상익씨(53)와 아내 신정행씨(50)는 지난 3월 초 서울 서초동 법원 앞에 ‘갤러리 행’을 열었다. 화가들이 대관료를 내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무료’ 화랑이다.
“아내도 화가였어요. 무명시절 자신이 그린 작품을 몇 점이라도 걸 수 있는 ‘하얀 벽’을 그리워했죠. 자신이 가난한 화가였기 때문에 돈이 없어 전시회를 열지 못하는 화가들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오래전부터 기회가 되면 화가들에게 무료로 개방하는 갤러리를 마련하고 싶어했어요.”
오랜 연애 끝에 1980년 주례와 신랑, 신부 그리고 두 명의 증인만이 참석한 ‘초라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서울 신촌의 단칸방에서 자취생 수준의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양가 부모들이 결혼을 심하게 반대해서 저희들끼리 식을 치렀어요. 결혼한 지 3년 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니까 가난한 고시생의 아내로서 전시회를 열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지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으니까요. 작품을 쌓아두기만 할 뿐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겁니다.”
‘갤러리 행’의 대표를 맡고 있는 신정행씨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둘째 아이를 낳은 84년까지 충남대 미대에서 조교로 일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가정과 일, 그리고 작품활동까지 병행한다는 게 쉽지 않았어요.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할 것 같아 교수와 화가의 꿈을 모두 접었죠. 가정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 후 20년 넘게 가족 뒷바라지만 전념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그림에 대한 열정과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미술관으로 발길이 향하고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그림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놓게 되고…. 제 마음을 눈치 챈 남편이 얼마 전 널찍한 작업실을 마련해줬어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작업실을 갖고 싶었다는 신씨는 오십 줄에 접어들어서야 그 꿈을 이뤘다. 그토록 원하던 작업공간을 가지게 됐건만, 신씨는 작업실 중 3평 남짓한 공간만 남겨둔 채 나머지는 전시공간으로 바꿨다.
“(작업실이) 굳이 넓을 이유가 없잖아요. 마음 편하게 작품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하죠. 남편에게 ‘작업실 외의 공간은 가난한 화가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갤러리로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좋은 생각’이라며 격려해줬어요.”
“화가는 작품에 붓질할 때 가장 행복하고 자신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때 가슴이 벅차다”고 말하는 그는 “가난한 화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화가라도 전시회를 열지 못하면 작품을 세상에 알릴 방법이 없거든요. 전업 작가들은 그림을 팔아서 쌀도 사고 물감도 사야 하는데 그림을 팔 기회조차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답답하게 느껴지겠어요. 그들에게 ‘갤러리 행’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작은 오솔길이 되면 좋겠어요. 저희 갤러리는 화가들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공간이에요. 동네 산책을 하다 슬리퍼 신고 와서 그림을 감상해도 좋고요. 아무나 와서 그냥 차 한 잔 마시고 가도 상관없어요.”
전시회를 할 작가를 선정할 때 학력이나 경력 등은 따지지 않고 오직 작품만을 볼 예정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외길 인생을 걸어온 화가들에게 먼저 기회를 드리고 싶어요. 오픈 전으로 강창렬 화백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평소 친분이 있는 탤런트 금보라씨 부부가 찾아와 작품 한 점을 구입하니까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어요. 저희 갤러리는 대관료가 없기 때문에 그림값이 그리 비싸지 않아요. 작가는 대관료가 없어서 좋고 구매자는 작품을 싸게 구입할 수 있으니까 좋잖아요.”

동네 산책하다 슬리퍼 신고 와서 그림 감상해도 좋은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무료 전시 공간‘갤러리 행’문 연 엄상익·신정행 부부

‘갤러리 행’의 수입원은 없다. 오히려 갤러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차와 음료를 대접하고 비싼 전기요금 등 갤러리 운영에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그래도 이들 부부는 즐겁기만 하다.
“애초에 돈 벌 생각으로 갤러리를 연 것은 아니니까 괜찮아요. 남편에게 돈 많이 벌어서 지원 좀 해달라고 부탁했거든요(웃음).”
엄 변호사는 “이제야 아내에게 진 빚을 뒤늦게 갚게 됐다”고 말한다.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아내가 가족을 위해 붓을 꺾은 것이 늘 안타까웠는데 이제야 미안한 마음을 덜게 됐다는 것.
“6년 전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였어요. 조그만 구멍가게 주인 할아버지가 한쪽에 이젤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고요. 음료와 잡화를 파는 공간 한쪽에 자신의 그림을 전시해놓고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팔기도 하데요. 그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 할아버지를 아내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더라고요. 그때 아내에게 작지만 그림 그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겠다고 다짐했죠.”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비주얼 아트’를 공부한 딸 정아씨(26)는 이 갤러리의 큐레이터를 맡고 있다.
“정아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을 소개하면 좋겠어요. 사실 평론가들의 글은 화가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한 부분이 많아요. 정아에게 한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작가가 겪는 고통과 고뇌를 엿보게 할 겁니다. 가슴으로 그림을 느껴야 작품 소개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인터뷰 말미, 엄상익·신정행 부부는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하얀 벽’이 필요한 화가는 언제라도 연락(02-586-9259)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여성동아 2006년 4월 5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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