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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지금의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 좋다

일러스트·정지연

2006. 02. 08

해가 바뀐 지 한 달이 돼도 아직 더 먹은 나이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뱃살 빠진 기쁨을 만끽할 겸 스팽글 달린 청바지를 입고 출근한 날 동료에게선 나잇값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나보다 어리고, 날씬하고, 섹시하고, 예쁜 여성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갖는 것보다는 내 장점을 인정하고 만족하는 쪽이 훨씬 행복하다. 나이 먹는 것을 ‘충격’ 대신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을 돌보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가려 한다.

지금의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 좋다

새해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다 돼가는데 스스로 나이를 말하면서 깜짝깜짝 놀란다. 지난해보다 달랑 하나 더한 숫자인데도 익숙해지지 않아서인지 그 많은 숫자에 새삼 섬뜩해진다. 또 평소 나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내 나이를 밝히면 상대편의 놀라는 표정에 또 상처받는다. 내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여서가 아니라 고령(?)에도 그토록 철없이 유치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충격적인가 보다.
지난해 가을부터 살이 좀 빠져서 요즘은 청바지를 자주 입고 다닌다. 예전엔 외향적인 배 때문에 절대 셔츠나 스웨터를 바지 속에 넣어 입을 수 없었는데 이젠 셔츠를 속에 집어넣고도 울룩불룩한 뱃살 걱정 없이 청바지를 입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동대문시장에서 청바지를 2, 3벌 장만해 교복처럼 입고 다녔다. 얼마 전 밑단에 스팽글이 달린 청바지를 입은 날 복도에서 마주친 동료가 이렇게 말했다.
“발악을 하시누만. 내일모레면 오십이 되는 분이 왜 이러시나.”
‘오십이 다 돼가는 분’이란 표현은 결코 과장법이 아닌데다가 이 나이에 부끄러울 것도 없어 더 뻔뻔하게 대답했다.
“내가 원래 대기만성 스타일이라고 했잖아. 갈수록 예뻐지고 나이 들수록 멋있어진다니까.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진짜 오십 되면 볼만할 거야.”
10대 소녀가 모피코트를 입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만 40대 후반에 청바지를 입는 게 왜 시비거리가 돼야 할까. 물론 스팽글 달린 청바지는 좀 오버란 걸 인정하지만, 다리가 짧아 항상 밑단을 반바지만큼 잘라내야 했는데 길이가 딱 맞아 밑단에 정성껏 박힌 스팽글을 전혀 손보지 않아도 되는 청바지를 만났을 때의 감동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렵다. 가격이 비싸더라도 눈 질끈 감고 사려 했는데 마침 세일이라 단돈 3만원에 샀으니 주위의 비난이 쏟아져도 어찌 입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의 장점을 인정하고 만족하는 것이 행복
얼마 전엔 이해찬 총리와 함께 TV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시청자 게시판을 보니 내가 한 말에 대해 시비를 거는 이들보다는 나의 태도나 “얼굴 커다란 아줌마가 왜 나왔나” 등의 외모에 관한 인신공격이 많았다. 반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지들은 전화를 걸어와 “화면을 보니 얼굴이 반쪽이 됐더라”며 아프지나 않은지 걱정해주셨다. 반쪽 된 얼굴이 그렇게 커다랗다면 예전의 내 얼굴은 ‘모여라 꿈동산’에 나오던 인형들의 탈바가지 크기였던가. 왜 연예인도 아니고 기자인 내 얼굴 크기나 체중이 문제가 되고, 왜 청바지를 입을 때도 나이를 의식해야 할까.
문득 얼마 전 미국 잡지에서 본 광고가 생각났다. 도브의 보디로션 광고였는데 정말 다양한 장르(?)의 몸매를 자랑하는 여성들이 속옷 차림으로 등장했다. 심술궂은 네티즌들이 봤다면 ‘저주받은 굵은 하체’ ‘등인지 가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납작 가슴’ ‘처녀가 왜 임신 5개월 임신부 배?’ 등 리플을 달았을 몸매의 여성들이 마냥 즐겁고 행복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들은 결코 못생긴 얼굴도 아니고 아주 흉한 몸매도 아니다. 그저 동네 목욕탕에 가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여성들의 몸매들이었다. 나이도 20~40대였고 직업 역시 학생, 백화점 판매원 등 다채로웠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나는 지금의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 충분히 즐겁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매스컴이 조장한 용모지상주의의 억압과 편견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것이 그들의 메시지였다. 그래서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인데도 전혀 추하거나 선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 좋다

며칠 전엔 오랜만에 패션디자이너 이광희 선생을 만났다. 너무 얼굴이 팽팽하고 젊어 보여서 “혹시 불로초 드시거나 얼굴에 다림질한 거 아녜요?”라고 물었더니 “전보다 10kg이나 체중이 불어나서 얼굴까지 펴졌다”고 소녀처럼 깔깔거리며 웃었다. 본인은 살이 쪄서 불편할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너무 말라서 예민해 보이고 연약해 보이던 모습보다는 지금이 훨씬 평화롭고 부드러워 보였다. 게다가 보톡스나 콜라겐 주사를 맞지 않고도 얼굴이 팽팽해졌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해마다 불우이웃 돕기를 많이 해서 하나님이 그런 복까지 주시나 보다. 나이 들어 살이 갑자기 빠지면 폭삭 늙어 보이는데, 젊은 시절엔 날씬한 몸매를 유지시켜주다 중년 넘어서 팽팽함을 주시니 말이다.
젊어 보이고 싶고 아름답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화장품도 바르고, 운동이나 다이어트도 하고, 성형수술도 감행한다. 그건 각자의 가치관이고 선택이다. 나 역시 “어머, 요즘 건강이 나쁘거나 마음고생이 심하신가 봐요. 폭삭 늙으셨네요”라는 말보다는 “어쩌면 그렇게 안 변하세요?” 혹은 “점점 예뻐지시네요”란 거짓말이 듣기 좋고, 효능도 제대로 모르면서 광고문구만 보고 수십만 원짜리 고기능성 화장품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나보다 훨씬 어리고, 날씬하고, 섹시하고, 예쁜 여성들과 얼굴, 체중, 체형 등을 비교하며 열등감을 갖고 온갖 방법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것보다는 나의 장점을 인정하고 그것에 만족하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젊을 땐 너무 두껍고 거무튀튀해서 고민이었던 피부도 나이 드니 오히려 주름이 잘 생기지 않고 기미가 껴도 티가 나지 않아 고맙고, 어릴 땐 키는 작은데 가슴만 커서 웅크리고 다녔지만 이젠 뽕브래지어의 위장이나 가슴 확대수술의 유혹을 느끼지 않고 덕분에 상대적으로 배도 들어가 보여 자랑스럽게 내밀고 다닌다.

정성을 다해 자신의 몸 사랑하기, 넉넉하게 나눠주고 베풀기
주민등록번호를 적다가, 고등학교나 대학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다가 계산되는 내 나이에 순간순간 놀라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충격’이 아니라 ‘경이로움’으로 바꾸려고 한다. 40대 후반이 됐는데도 여전히 과자에 집착하거나 영화 ‘작업의 정석’을 보면서 ‘나도 손예진처럼 애교가 많았으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란 착각을 하고, 이제 어지간한 모임에 가면 거의 최고령이고 강의를 나가 나이를 밝히면 “어머, 우리 엄마랑 동갑이시네요”란 말을 들어도 그들과 세대 차이를 느끼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대견하다.
물론 대책 없이 불어나는 나이나 넉살만 자랑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내 몸의 주인이자 내 인생의 주인공이므로 관심과 사랑을 다할 생각이다. 요즘 피부가 건조해져서 샤워 후에는 열심히 오일마사지도 하고 남편이 봐주지 않을지라도 레이스 달린 속옷을 사 입고 혼자 흐뭇해한다. 얼마 전엔 한의원에 가서 해독치료를 하다가 잠시 중단했는데 마저 독소를 빼내고 본격적인 건강관리도 할 예정이다.
그리고 올해는 남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고 남의 흉은 덜 보고, 또 뭘 가지려고 아등바등하기보다 시간이건 물건이건 마음이건 돈이건 내 것을 나눠주는 일을 해야겠다. 그것이 나잇값을 하는 일이고, 내가 행복해져서 나의 표정을 평화롭고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지름길인 것 같다. 그런데 올해 점괘에 따르면 내가 유난히 받을 복이 많다는데 어떡하나…, 운명이면 달게 받아들여야지.
유인경씨는요
지금의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 좋다
경향신문에서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편집장. 얼마 전 발간한 책 ‘대한민국 남자들이 원하는 것’ 덕분에 아저씨 팬들의 상담전화가 늘어났는데 이렇다할 조언을 주기보다는 주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고 한다. 딸이 대학에 진학하고 여유가 생기면 살아오면서 한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뭔가에 미쳐보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누구에게 미쳐야 할지, 어디에 미쳐야 할지 아직 대상은 찾지 못했지만. 그의 홈페이지(www.soodasooda.com)에 가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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