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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부부의 사랑

‘밥퍼 목사’ 최일도·김연수 부부 인터뷰

“저도 남편 바람 의심하고, 이혼 결심하고 가출까지 했었어요”

글·최호열 기자 / 사진ㆍ김형우 박해윤 기자

2006. 01. 10

‘다일공동체’와 베스트셀러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의 저자로 유명한 ‘밥퍼’ 최일도 목사·김연수 시인 부부. 대책 없이 퍼주는 남편과 깐깐한 시어머니로 인해 이혼 위기까지 겪었던 이들 부부가 부부생활의 지혜를 들려주었다.

‘밥퍼 목사’ 최일도·김연수 부부 인터뷰

청량리역 근처에서 노숙자들에게 무료로 밥을 나눠주고, 다일공동체를 만들어 진정한 ‘나눔’과 ‘섬김’의 의미를 일깨워준 최일도 목사(49). 지금까지 1백만 부가 훨씬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이하 ‘밥퍼’)을 펴내기도 한 그는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헌신적인 빈민활동뿐 아니라 5세 연상의 수녀 시인이었던 김연수씨(54)와의 결혼으로 화제를 모았다.
최근 부부가 함께 펴낸 ‘더 늦기 전에 사랑한다 말하세요’엔 ‘목사’와 ‘수녀’의 25년 결혼생활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부부갈등과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어떻게 풀었는지, 자녀교육 지혜 등이 가득 담겨 있어 같은 고민을 하는 주부들에게 공감을 준다.
출판기념회장에서 만난 최 목사 부부는 ‘부부는 살면서 서로 닮아간다더니 참 닮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닮았다. 긴 세월 기쁨과 슬픔, 고통과 행복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리라.
두 사람은 79년 4월, 목사의 길과 신부의 길 어느 곳을 걸을까 갈등하던 신학생과 수녀로 처음 만났다. 첫 만남에서 운명적 사랑을 느낀 최 목사는 만 2년 동안 끈질기게 구애를 했다고 한다. 김씨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최 목사에게 끌렸고, 그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그 사랑을 인정할 수 없어 힘들기만 했다고.
“제가 끝까지 남편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자 ‘다시는 이 세상에서 내 목소리를 못 듣게 될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자살을 하겠다는 뜻이었죠. 그때 정말 간절히 기도했어요. 우리가 정말 운명이라면 죽지 않고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그런데 정말 기적처럼 자살하러 목포의 섬으로 간 남편이 섬마을 주민들 때문에, 그리고 날씨 때문에 자살을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다고 하더라고요.”

운명 같은 사랑, 그러나 치열했던 부부싸움…
81년 김씨는 최 목사와 결혼, 화장실은커녕 누울 공간마저 좁아 서로 꼭 끌어안고 자야 하는 작은 지하 단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지만 행복했다고 한다. 최 목사가 늦깎이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김씨가 교사 일을 하며 생활을 책임져야 했지만 미래에 대한 꿈이 있어 힘들지 않았다고.
‘밥퍼 목사’ 최일도·김연수 부부 인터뷰

“저는 남편이 작은 도시에서 목회 일을 하길 바랐어요. 그럼 전 교회 마당에 꽃을 심고요. 그리고 나이가 들면 가톨릭의 피정센터 같은 것을 만들고 싶었어요. 남편도 외국에서 공동체 신학이나 영성신학을 배우고 와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했어요. 빈민활동은 생각 못했었죠.”
최 목사는 잘 퍼주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김씨가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겨우 마련한 등록금을 친구 식권을 사주는 데 써버려 등록을 못할 정도였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화를 내자 되레 “밥이 더 중요하냐, 공부가 더 중요하냐”며 반문했다.
“수녀 출신인 제가 남 돕는 걸 가지고 뭐라 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왠지 목사는 그래도 될 것 같았어요. 목사님이 돈 계산 잘하고 실리 챙기면 저부터도 존경심이 안 생길 것 같아요. 그래서 남편에게 불평을 하면서도 좋은 목회자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그런데 88년 최 목사의 운명을 바꿔놓은 일이 생겼다. 청량리역을 지나는데 노인 한 분이 그 앞에서 굶주려 쓰러져 있었던 것. 처음엔 ‘누군가 도와주겠지’ 하고 지나쳤는데 볼일을 보고 다시 그곳을 지날 때까지도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최 목사는 주머니를 털어 청량리의 노숙자와 노인들에게 밥을 사주기 시작했다. 밥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믿음에서였다.

‘밥퍼 목사’ 최일도·김연수 부부 인터뷰

신학생과 수녀로 만나 드라마틱하게 부부의 연을 맺은 최 목사 부부.


“우리 부부는 수녀원에서 하는 것처럼 그릇에 돈을 담아놓고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곤 했는데 갑자기 생활이 궁해질 정도로 남편이 가져가는 돈이 많아졌어요. 누구를 만났다고 하는데 확인해보면 그분들을 만난 게 아니었어요. 저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났던 거죠. 그럼 뭐겠어요. 어떤 여자라도 당연히 바람을 의심하지. 당시 남편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어요. 아무래도 제가 나이가 다섯 살이 많으니 젊은 여자들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떨치기 힘들었죠(웃음).”
그를 지치게 한 것이 또 있었다. 바로 고부갈등. 시어머니는 결혼하는 것부터 반대를 했다고 한다. 나이도 많은데다 수녀였기 때문에 목사의 아내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 처음엔 쉽게 인정을 받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서둘러 아침상을 차리고 출근하려는데 ‘왜 빨래 안 해놓고 가냐’며 ‘빨래 해놓고 가라’고 소리를 치시는 거예요. 새벽에 일어나 식구들 밥상 차리고 정작 저는 밥 한술 못 뜨고 출근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야속해 눈물이 났죠. 나중에 생각하면 어머니도 혼자 살림을 하기에 체력이 달려 제게 화풀이를 하실 수 있었던 건데 그땐 야속하기만 했어요.”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그가 뭘 잘못했는지 지적하기에 바빴고, 그는 그런 비난 앞에서 점점 무기력해져만 갔다. 다정하게 “어머니”라고 부르기는커녕 보고만 있어도 무서웠다고 한다. 어머니가 거실에 있으면 그가 방으로 들어갔고 그가 거실에 있으면 어머니가 문을 탁 닫고 방으로 들어가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제가 어릴 때 야단맞고 매 맞으며 살았으면 차라리 나았을 거예요. 항상 칭찬과 격려를 받으면서 자라서인지 매일 야단맞는 게 적응이 안되더라고요. 아무리 노력해도 몰라주니까 야속하기도 했고요. 야단을 맞다 제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설명하면 ‘어디 어른 앞에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하시며 더욱 역정을 내시고….”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남편이 바람까지 피운다고 생각하니 더는 결혼생활을 유지할 이유가 사라진 것 같았다. 이혼을 생각한 그는 친정 가까운 곳에 집과 직장을 알아봐달라는 부탁까지 하고, 아이들을 남겨놓은 채 집을 나왔다.
“무작정 찾아간 곳이 기도원이었어요. 사흘간 단식기도를 하니까 마음이 정화가 되더라고요. 이렇게 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아직도 내가 사랑이 부족하다는 깨달음이 생기더라고요.”
그가 집에 들어서자 그동안 그토록 질책하던 시어머니가 방으로 부르더니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내가 너를 안 미워하려고 해도 왜 그렇게 미운지 모르겠다.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니다. 네가 이해하고 용서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말은 웬만큼 용기가 있지 않고서는 힘들잖아요. 정말 좋은 분이라는 걸 느꼈어요.”
남편에 대한 오해도 풀렸다. 그가 돈을 가져간 게 바람이 나서가 아니라 굶주린 노숙자와 노인들에게 밥을 사주기 위해서라는 걸 확인한 것.
“오해가 풀리니까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죠.”
김씨의 우려(?)대로 최 목사는 89년부터 본격적으로 청량리 굴다리에서 냄비를 들고 라면을 끓여주는 무료 급식봉사를 시작했다. 김씨는 처음엔 남편이 종교적 신념에서 잠깐 하다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종교인으로서 봉사의 숭고한 이상은 공감하지만 가정을 꾸리는 아내의 입장에선 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하지만 최 목사의 생각이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90년 초, 노숙자들과 생활하다 며칠 만에 집에 들어온 최 목사가 밥을 먹다가 갑자기 속울음을 우는 것이었다.
“노숙자들에겐 라면을 주면서 자기는 밥을 먹는 게 죄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이 일을 계기로 저도 남편의 일을 인정하고 제가 집안을 책임지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죠.”

아이가 상처받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키워야

하지만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정작 가족들이 아프거나 절실히 필요할 때 그 일에 매달려 돌보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나 부부싸움을 한 적도 많다고 한다. 한참 지난 후에야 ‘남편은 나와 다르게 창조되었으며,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고.



‘밥퍼 목사’ 최일도·김연수 부부 인터뷰

굶주린 노인과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주는 최일도 목사와 국을 담아주는 김연수씨.



“전에 남편이 ‘아내는 선녀, 나는 나무꾼’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결혼 전에는 내가 선녀, 남편이 나무꾼이었다면 결혼 후에는 남편이 좋은 일을 하는 선남이고, 나는 생활을 책임지는 나무꾼이라고요(웃음).”
김씨의 말엔 소외된 사람들에게 나눔과 섬김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직자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아내의 고충이 응축되어 있었다.
최 목사는 사람들이 자기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밥퍼 일에만 매달려 가정을 등한시한다’는 것이라며 “이 기회에 오해를 풀고 싶다”고 했다. 그 말에 김씨도 고개를 끄덕인다.
“남편은 다정다감한 면이 있어요. 생일선물로 열쇠고리를 줘도 그냥 사서 주는 게 아니라 거기에 우리 사진을 넣어 주죠. 제가 교직에 있을 때 아침에 부부싸움을 하고 출근하면 미안한 마음에 학교로 전화를 걸어 다른 선생님에게 ‘아내에게 정말 사랑한다고 뜨겁게 사랑한다고 꼭 전해달라’고 해 저를 하루 종일 창피하게 할 정도였고요. 그리고 어떤 결정이든 저에게 꼭 동의를 구해요.”
아이들에게도 함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적어서 안타까울 뿐이지 마음은 항상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아이들 귀지도 다 파주고, 막내딸 별이(10)의 머리를 따주는 것도 그의 즐거움이라고.
“아이들이 비디오를 빌려오면 꼭 같이 봐요. 아이들과 같은 책을 읽고 느낌을 나누면서 교감하려 하고요. 별이가 귀를 뚫겠다는 걸 너무 어린 것 같아 제가 ‘다음에 하자’며 미뤘더니 며칠 전에 언니랑 뚫고 왔더라고요. 남편은 그래도 혼내기는커녕 오히려 귀걸이를 사다주는 식이에요.”
최 목사 부부의 자녀교육 원칙은 부모의 선택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부모가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야 아이도 부모의 선택을 이해한다는 것. 그 속에서 합일점을 찾아가야 한다는 게 두 사람의 생각이다.
장남 산(23)이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목사로 있는 다일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 나가자 주위에서 말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부부는 아이의 선택을 존중했고, 그 결과 산이가 고등학생이 되자 스스로 다일교회를 나오며 열심히 활동했다고.
“부모로서 산이가 아버지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걸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산이가 고등학생 때 ‘내가 아빠처럼 사는 건 받아들일 수 있는데 가족까지 고생시킬 자신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아이가 상처를 받았다는 뜻이죠.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것도 아이가 극복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산이는 지금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대학원에서는 법학을 전공할 계획이에요. 그런데 얼마 전에 넌지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법학과 신학을 함께 공부하는 곳도 있다고(웃음).”
둘째 가람(21)이가 사춘기 때 방황하다 미국에서 공부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빈민운동을 하는 목사의 딸이 유학을 간다는 것은 분명 구설수에 오를 일이다. 그래도 부부는 아이의 선택을 존중했다. 아버지의 이미지 때문에 자식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또한 미국에 간 딸이 적응을 못하고 석달 만에 다시 돌아왔지만 이것 역시 딸의 선택이었기에 이해해주었다고.
“고통은 다 자산이 되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이 힘들 때 그것도 넘겨봐라 하고 내버려두었어요.”
그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한 적이 없다고 한다.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게 초등학교 때 엄마가 시간표를 짜준 아이들은 중학교에 오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 대부분 성적이 떨어져요. 초등학교 때는 어느 정도 놀게 할 필요가 있고, 혼자 책상에 앉아 있는 힘을 기르는 게 중요해요.”

상처도 잘 다듬으면 별이 되고 아름다운 무늬가 될 수 있어
‘밥퍼 목사’ 최일도·김연수 부부 인터뷰

둘째 가람이, 셋째 별이와 함께. 장남 산이는 미국 유학중이다.


또한 아이들에게 ‘이렇게 해라’ 하고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컴퓨터를 하기로 약속한 1시간이 되었을 때 “이제 그만하고 꺼” 하기보다는 “5분만 더 하고 끄려고 하는구나” 하고 말해 아이가 자발적으로 하게 했다고.
“피아노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들은 한번씩 피아노 치는 걸 지겨워할 때가 있어요. 그때 ‘힘든 걸 이기고 계속하면 더 잘 칠 수 있다’고 설득해서 안되면 ‘엄마는 네가 피아노를 치는 소리를 들으면 하루의 피로가 풀린다’고 해요. 그러면 아이들이 사명감이 생겨 지겨워도 열심히 해요. 그러다 다시 재미가 붙어서 열심히 치고요.”
수녀였다가 결혼해 생활인으로 살면서 남편과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자녀교육 문제로 여느 주부보다 더 속앓이를 했던 김씨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지혜를 들려주었다.
“결혼하면서 전 남편과 공통점이 많아 부부싸움 같은 건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너무 많이 달랐어요. 살아온 게 다르니 그럴 수밖에요. 부부싸움은 서로 다른 걸 맞추기 위한 과정 같더라고요. 부부문제든 자녀문제든 길게 보면 좋겠어요. 조급하게 생각하면 파국으로 가지만 길게 보면 다 이해가 되거든요.”
고부간의 갈등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싫든 좋든 자식의 도리를 잘하며 지내다 보면 세월이 지나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단계가 온다는 것.
“저와 화해를 한 후에도 어머니는 아들이 하는 일을 못마땅해하셨어요. 그래서 사이가 안 좋았죠. 그래도 자식의 도리를 다했죠. 특히 저에게 반지가 없어도 어머니 걸 먼저 해드리는 등 저보다 어머니를 먼저 생각한다는 마음을 전했어요. 그러니까 어머니도 저희들이 나쁜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믿음을 가진 것 같아요.”
지난 일들을 웃으며 이야기하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을 보며 ‘상처(Scar)를 잘 다루면 흉터가 아닌 별(Star)이 되고 아름다운 무늬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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