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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남자가 사는 법

아내는 직장 보내고 아이 키우며 살림하는 남자 전업주부 이경희

“남편은 밖에서 일하고 아내는 살림한다는 고정관념 버리니 가족 모두 행복해졌어요”

■ 기획·최호열 기자 ■ 글·장옥경‘자유기고가’ ■ 사진·박해윤 기자

2005. 05. 10

SBS 인기 드라마 ‘불량주부’처럼 아내 대신 가정살림을 맡아 하고 있는 남자 전업주부 이경희씨. 아내와 역할을 바꿔서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집안에 들어앉았다는 그가 요리, 청소, 육아, 재테크 등 똑소리나는 살림법을 들려주었다.

아내는 직장 보내고 아이 키우며 살림하는 남자 전업주부 이경희

졸지에 직장을 잃은 남편, 살림만 하다 사회생활을 하게 된 아내. 요즘 SBS 드라마 ‘불량주부’가 인기를 모으면서 남자 전업주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아내 대신 살림을 하는 전업주부 이경희씨(41). 드라마와 차이가 있다면 여섯 살 아래인 아내는 전업주부보다는 바깥일이 더 적성에 맞고 자신은 사회생활보다는 주부일이 더 적성에 맞아 심사숙고 끝에 서로의 역할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둔 아내는 재은이(9)와 재욱이(8)를 낳고 줄곧 전업주부로 살았어요. 그런데 너무 일을 하고 싶어 했죠. 반대로 전 조직생활보다는 집안일이 더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었고요. 때마침 아내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일을 하게 되면서 제가 2000년 1월1일자로 퇴직했어요.”
그가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진 직장은 삼성반도체.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어 감원이나 명예퇴직의 위험도 없었다. 그러나 집에는 하숙생처럼 잠깐 얼굴만 보이고 회사에 목을 매어 일하는 대한민국 직장문화에 회의감이 컸다고 한다. 비록 돈은 적게 벌어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며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의 보람이고 가치라고 생각했고 아내도 같은 생각을 했다고.
“아내가 여자지만 살림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도 한몫을 했어요. 중·고등학교 때 가정·가사를 제일 못했대요. 신혼 초에 집들이할 때도 제가 요리를 했어요. 등산이나 낚시를 가서 음식 만들 기회가 많아서 제 요리 솜씨가 아내보다 좋았거든요. 생선회 뜨고 매운탕 끓이고 몇 가지 반찬 만들어 접대했는데 다들 맛있다고 했어요. 게다가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아내의 주부습진이 물만 닿으면 심해져서 퇴근해서 돌아오면 설거지나 아이 목욕시키기 등 물 만지는 일을 제가 많이 했죠.”
신혼 초 요리 못하는 아내 대신 집들이 치르면서 살림에 재미 느껴
그러면서 육아와 요리, 살림에 재미를 느끼게 됐다고 한다. 재테크에 대한 관심도 아내보다 그가 뛰어났다. 적금 하나를 든다 해도 아내는 가장 가까운 은행을 가는 데 비해 그는 경제신문, 인터넷 등을 통해서 가장 금리가 높은 곳, 자기자본구성 비율이 뛰어난 곳을 체크한 후 따져서 드는 편이었다. 물건 하나를 사도 발품이나 손품을 팔아 절약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절약하는 편이었다.
성격도 그가 더 여성적이었다. 아내가 무뚝뚝한 편이라면 그는 살가운 편. 아이들과 함께 있어도 아내는 거의 말이 없고 오히려 그가 아이들에게 묻고 대답하고 챙겨주고 훨씬 더 많은 애정표현을 했다. 그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면 남매가 서로 아빠 곁에서 자려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잠잘 때만 아빠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낮에도 아빠 얼굴이 보이면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고.
“둘째 아이가 15개월 때 일이었어요. 주말에 동창 모임에 나가야 하는데 저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모임에 나갔어요. 낯선 얼굴들이 많으니까, 바닥에 내려놓으면 울어서 아이를 품에 안고 서서 맥주를 마시기도 했죠.”
상황이 이쯤 되자 이경희씨가 주부 역할을 맡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 되었다. 게다가 그는 직장생활이 싫었고 아내는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으니 두 사람은 역할을 바꾸면 인생을 더욱 행복하고 효율적으로 사는 것이 되었다.
“아내와 저는 세상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벗어던지는 데 이의가 없었는데 양가에서 반대가 심했어요. 특히 처가의 이해를 구하기가 가장 어려웠죠. 딸이 힘들고 고생이 될까 우려가 되었던 거지요. 하지만 몇 년이 지나 사는 것을 보시고는 이젠 이해를 하세요.”

아내는 직장 보내고 아이 키우며 살림하는 남자 전업주부 이경희

직장 일보다는 요리하고 살림하는 것이 더 적성에 맞는다고 말하는 이경희씨.


스스로 희망했던 선택이었던 만큼 이씨의 전업주부 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회사에 다닐 때는 가족과 함께 누릴 시간이 적었는데 이제는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 좋다고 한다.
살림도 야무지다. 재은, 재욱이에게 인스턴트식품은 먹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는데 간혹 라면을 먹을 때는 라면을 한번 삶아 그 물을 버린다. 라면에는 면발의 쫄깃쫄깃함을 살리기 위해 알칼리제나 산화방지제를 넣는데 조리할 때 끓는 물에 삶아 내면 없어지기 때문이다.
냉동식품은 해동과 냉동을 반복하면 식품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1회분씩 담아둘 줄도 안다. 오렌지나 레몬 같은 수입 과일은 농약을 뿌린 후 농약 효과가 오래가도록 코팅을 입히기 때문에 겉면에 윤기가 날수록 위험하다는 것도 잘 알기에 수입 과일은 가급적 사지 않지만 구입했을 때는 서너 배 꼼꼼히 씻는다.
“가을에 풋콩이 나올 때는 껍질콩을 사서 손질해 밀폐용기에 담아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사계절을 먹어요. 봄에 마늘이 나올 때는 6쪽 마늘을 사서 까고 분쇄기에 갈아 납작한 얼음통에 얼려 1회분씩 꺼내 씁니다. 굴도 가장 쌀 때 사다가 냉동해서 1년을 먹고, 파도 미리 썰어서 얼려두었다가 필요할 때 쓰면 일일이 썰지 않아도 돼 조리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요.”
냉장고의 야채, 과일은 최대 3일을 넘기지 않는다는 원칙도 세워두고 있다. 5년 반 동안 살림을 맡아 하면서 아직까지 한번도 냉장고의 식품을 썩혀 버린 적이 없다는 프로 주부 이경희씨는 요리를 정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어서 지난해에는 요리도 배우러 다녔다고 한다.
“요리의 개념을 배우기 위해 요리교실을 다녔어요. 나물을 무칠 때나 찌개를 끓일 때 무조건 양념을 넣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음식 맛을 살리기 위해서는 양념을 넣을 때도 순서를 지켜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예를 들어 양념장을 만들 때는 식초, 간장, 된장, 참기름 등 양념을 한꺼번에 넣어 섞어도 되지만, 나물을 무칠 경우처럼 따로 넣을 때는 설탕, 소금 등 향이 없는 것에서 식초, 간장, 된장, 참기름 등 향이 강한 순으로 넣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향이 강한 것은 금방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미리 넣으면 나중에 향이 약해지기 때문이라고. 그는 한식요리, 양식요리의 기본을 마스터해 일류 요리사만큼은 아니지만 웬만한 기본적인 음식은 할 줄 알게 됐다며 활짝 웃는다.
음식 솜씨 늘리기 위해 요리학원 다니기도
그가 가장 바쁜 시간은 아침 8시경. 빨리 아침식사를 먹인 후 아내는 직장에, 아이들은 학교에 가도록 돕기 위해 동동거린다. 전날 알림장을 체크해서 책가방과 준비물을 다 챙겨두어 크게 손갈 것은 없지만 잊지 않고 들고 가도록 눈여겨본다.
8시30분을 고비로 세 식구가 모두 빠져나가면 한숨 돌린 후 아침 설거지와 청소에 들어간다. 청소기로 구석구석 먼지를 빨아내고 걸레를 빨아 바닥을 훔치는 사이 식구들이 벗어놓고 간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돌린다. 청소가 끝나고 나면 행주를 삶고 걸레는 락스에 담가 소독을 하는데 이 정도의 시간이 되면 세탁기의 빨래도 끝난다. 베란다에 건조대를 놓고 빨래에 구김살이 가지 않도록 탁탁 털어 넌다. 티셔츠류는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옷걸이에 걸어 말린다.
10시쯤 얼추 집안 정리가 끝나면 취미생활을 하러 간다. 그는 경기도 과천 주공아파트에 사는데 과천시나 문화원, 도서관에서 무료 혹은 연회비 3만원 정도에 운영하는 문화강좌 프로그램이 다양해 해마다 12시까지 수강을 한다고 한다. 올해는 풍수지리와 원예교실을 선택했다고.

아내는 직장 보내고 아이 키우며 살림하는 남자 전업주부 이경희

이씨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엄마보다 자신을 더 따랐다며 웃었다.


강의가 끝나고 나면 아이들 점심을 챙겨주기 위해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와야 한다. 과천의 초등학교들은 3학년이 되어야 급식을 하기 때문이다. 아직 1학년, 2학년인 아이들은 12시30분경 집에 돌아오는데 현관문을 들어서기가 바쁘게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친다고.
“어떨 때는 친구들을 한 무리 이끌고 올 때가 있어요. 밥은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으니까, 친구들을 데려와도 걱정 없어요. 카레라이스나 김치볶음밥, 오므라이스를 해주면 아이들이 참 좋아해요.”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고등어, 삼치, 꽁치 같은 등 푸른 생선 먹이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따뜻한 밥에 노릇노릇하게 구운 생선, 김, 야채 등으로 아이들의 점심상을 차리기도 한다.
아이들은 밥을 먹은 후 다시 학교로 가서 특기적성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과천문화원으로 가서 스스로 고른 문화강좌를 배운다. 이씨는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학습지를 시키거나 학원에 보낸 적이 없다. 큰아이 재은이는 고전무용과 동화구연, 독서지도 세 과목을 배우고 있고 둘째 재욱이는 바둑과 태권도를 배우고 있는데 태권도만 유일하게 돈 내고 배우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아빠가 부지런히 강좌를 신청해 무료로 배우고 있다. 다만 차량 운행이 안 되어 시간에 맞춰 그가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이 정도는 즐겁게 감수한다고 한다.
아내는 직장 보내고 아이 키우며 살림하는 남자 전업주부 이경희

3시30분이면 아이들이 모두 돌아오는데 이때부터는 아이들과 책 읽기나 숙제, 일기 쓰기를 한다. 책도 과천도서관을 이용해 1주일에 두세 번 한 아이당 5권씩 10권을 빌려온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글쓰기도 자연스럽게 익혀 재은이는 교지에 독후감이 실렸다며 자랑삼아 펼쳐 보인다.
앞으로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차 늘어날 테니 낮에 빈 시간을 이용해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는 그는 어느 모로 보든 똑소리나는 전업주부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대한민국의 주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한다. 자신이 이런 말을 하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수도 있겠지만, 눈 딱 감고 한 마디하겠다는 것.
“저는 회사일도 해보고 집안일도 해본 사람이에요. 여자들이 집안일하는 거 힘들다고 하는데 솔직히 잘 이해가 안 가요. 회사생활을 하려면 보고서 작성해야지, 프레젠테이션 해야지, 외국 출장도 가야지…, 고단하고 쌓이는 스트레스가 말이 아니에요. 거기에 비하면 집안일은 스트레스가 훨씬 적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재미있다 생각하면 하는 일이 즐겁다는 그는 남편들에게 너무 바가지 긁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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