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3일 오후, 용산구 한남동 일대가 봉황 마크가 새겨진 대통령 전용차 행렬로 술렁거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일요일인 이날 오후 3시30분경 부인 권양숙 여사, 장남 건호씨 부부, 딸 정연씨 부부와 함께 이곳에 있는 삼성미술관 리움(LEEUM)을 찾았기 때문이다.
더욱 눈길을 끈 건 우리나라 최고 그룹 총수인 이건희 삼성 회장과 부인 홍라희 리움 관장(60)이 미술관 입구에서 직접 이들을 맞이했다는 것. 홍 관장은 1시간 30분 동안 노 대통령 가족을 고미술관(뮤지엄1)과 현대미술관(뮤지엄2)으로 안내하며 직접 작품 설명을 했다. 이날 삼성그룹이나 리움에서는 수행원 없이 이 회장 부부만 참석했으며, 청와대 역시 경호실과 부속실의 최소 인원만 수행했다.
이날 리움 안에서는 1백여 명의 일반 시민이 관람을 하고 있었는데, 리움 측에 따르면 노 대통령 가족은 일반인들과 함께 관람을 했으며, 경호원들도 최소 수준의 경호를 했지만 별다른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리움은 관람객들에게 작품을 설명해주는 PDA를 대여해주기 때문에 평소 전시실 안에 큐레이터가 없어요. 대통령이 오시는 줄 미리 알았으면 큐레이터가 대기해 작품 설명을 했을 텐데, 위에서 말씀이 없어서 전혀 몰랐어요. 처음부터 관장께서 직접 안내를 할 계획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전시된 작품들도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께서 수집한 국보급 문화재와 홍 관장이 애착을 갖고 있는 국내외 현대미술 작품들이어서 홍 관장만큼 적절하게 설명을 해줄 큐레이터도 없다고 봐야죠.”
노 대통령은 전시실을 둘러본 후 방명록에 ‘문화 한국, 선진한국, 리움미술관의 개관을 축하합니다’라고 쓴 뒤 권 여사, 이 회장, 홍 관장과 함께 관장실로 올라가 다른 배석자 없이 15분간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와 삼성그룹에서는 구체적인 대화내용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삼성그룹이 그동안 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있는데 대해 격려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행사는 문화관광부 및 주변의 추천에 따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주말을 맞은 대통령 가족의 비공식 문화생활 이상의 특별한 의미는 없다”는 말로 일각에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경계의 뜻을 나타냈다.
현대미술 전시실은 홍 관장의 심미안 엿볼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
노 대통령 가족의 방문으로 삼성미술관 ‘리움’이 또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회장 일가를 뜻하는 ‘Lee’와 미술관(museum)을 합쳐 만든 리움(Leeum)은 지난해 10월 개관 당시 그 규모와 소장품들로 언론의 큰 관심을 모았었다. 우리나라의 고미술을 전시하고 있는 ‘뮤지엄1’과 국내외 유명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뮤지엄2’, 아동교육문화센터로 이루어져 있는 이곳엔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이 모은 국보급 문화재와 홍 관장이 수집한 현대 회화와 조각 등 1만5천여 점의 방대한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움 측에 따르면 개장 이후 연말까지 하루 1백 명까지만 예약을 받아 입장을 시키다 올 1월부터는 점차 관람 인원을 늘려 지금은 하루 3백 명까지 수용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3월2일부터는 성인 1만원, 청소년 6천원의 관람료를 받고 있다. 관람객 개개인이 들고 다니면서 작품 가까이 대면 자동적으로 그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PDA 대여료 2천원은 별도.
리움을 관람하려면 전화(02-2014-6901) 또는 인터넷(www. leeum.org)으로 예약을 해야 하는데, 개관 초기엔 한 달 이상 예약이 밀려 있어 특권층만 입장이 가능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 신청자가 많아서 그런 것일 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게 리움 측의 설명이다. 요즘은 주말에만 예약이 밀릴 뿐 평일은 1주일 이내로 예약이 가능하다고.
리움 관계자는 3~6개월마다 전시 작품들을 10%씩 교체 전시해 2~3년에 한 번씩 들르면 완전히 새로운 작품들을 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했다. 홍 관장은 요즘도 새로운 작품 구입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는 게 관계자의 얘기.
홍 관장의 리움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지난 95년 호암미술관 관장으로 취임하면서 “한국 미술의 정수와 세계 미술의 흐름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새로운 미술관에 대해 언급한 그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IMF 사태로 미술관 공사가 중단되자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그는 2001년 공사가 재개된 후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은 공사현장을 찾아 진척상황을 꼼꼼히 점검하는 열정을 보였다.
무엇보다 리움은 건축물 그 자체가 ‘세계적인 예술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세계적인 건축가인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쿨하스가 각자의 특성을 살리면서 조화를 이룬 건축을 했기 때문이다. 리움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을 한데 모으는 데는 홍 관장의 열정이 한몫을 했다고 한다.
리움은 관객들을 배려한 흔적이 많이 눈에 띈다. 우선 3개의 건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동선을 고려해 설계한 것이 특징인데, 이는 노인이나 어린이들이 미술관을 드나드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라는 홍 관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어느 전시실이든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까지 올라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서 전시물들을 감상한 후 쉽게 다른 전시실로 이동할 수 있다. 또한 충분한 여유를 갖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고미술품의 배치 간격을 3m로 여유를 준 것도, 관객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PDA와 정보검색서비스를 설치한 것도 홍 관장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홍 관장이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한 미술계 인사는 “홍 관장이 그림을 매입하면 그 작가는 실력을 인정받은 셈이 되어 다른 작품 값도 껑충 뛴다는 말이 있다”며 “홍 관장의 미술계에 대한 영향력은 단지 구매력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전했다.
실제 홍 관장은 그동안 ‘마르크 샤갈전’ ‘전환의 공간전’ ‘구겐하임 미술전’ ‘박수근전’ 등 60여 회의 전시회를 개최하며 안목과 능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고, 서울대 미술관 건립에 후원을 아끼지 않은 공로로 2003년엔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리움 관계자는 “전시된 현대미술 작품은 홍 관장의 취향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회화는 물론 설치, 영상, 조각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심미안을 엿볼 수 있죠”라고 소개하며 “개관 당시 현대미술관(뮤지엄2)에 전시된 작품의 경우 홍관장이 작가와 작품 선정 하나하나에 직접 관여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홍 관장의 새로운 심미안을 살펴볼 수 있는 첫 전시회가 5월에 열린다. ‘이중섭 미공개 드로잉전’이 그것인데, 지금까지 회화로만 보아온 이중섭의 세계를 드로잉 작품을 통해 새롭게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선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여럿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미술품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안목에는 시아버지 고 이병철 회장의 남다른 트레이닝도 한몫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 관장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원래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한 후 유학을 가려고 했었다고 한다. 만약 그랬으면 지금쯤 대학 강단에 서 있거나 공예가,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대학 3학년 때 그가 국전 공예부문에 출품한 티테이블이 입선했는데, 그때 아버지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 “이병철 회장을 모시고 국전을 안내하라”고 일렀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안내를 했는데, 그것이 이 회장이 며느리감을 보러온 자리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이듬해인 67년, 졸업과 동시에 이건희 회장과 결혼식을 올렸다.
홍 관장이 직접 구상한 어린이 전시회를 흥미있게 보고 있는 아이들 모습.
고 이병철 회장은 일찍부터 며느리인 홍 관장에게 ‘남다른’ 수련을 시켰다. 매일 인사동에 가서 10만원 범위 내에서 마음에 드는 골동품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킨 것. 그는 시아버지의 말에 따라 민화나 토기, 자기 같은 소품들을 사 모으면서 미술에 대한 안목을 키워나갔다고 한다.
홍 관장은 일찍부터 미술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미술이 미래를 짊어질 어린 세대의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는 것. 그의 이런 생각은 리움 안에 마련된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삼성 관계자에 따르면 단순히 어린이를 위한 전시회나 교육을 하는 차원이 아니라 창의력과 문화적 감수성을 길러주는 체계화된 교육시스템을 연구 개발하는 역할이 이곳에 주어졌다고 한다.
어린이 미술교육에 대한 홍 관장의 관심 표현한 ‘미술작품과 떠나는 시간여행전’
삼성 관계자는 또한 홍 관장의 아동 미술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로 오는 8월31일까지 삼성아동교육문화센터 어린이 전시실에서 열리는 ‘미술작품과 떠나는 시간여행전’을 들었다. 어린이들이 고대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미술을 쉽게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전시로, 아이들이 직접 만지고 뛰놀며 미술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장치가 많아 재미를 더하는데 홍 관장이 직접 관여했다고 한다. 평소 외국의 어린이 대상 미술전시회를 눈여겨 관찰해온 그가 외국의 어린이 미술관에 자료를 요청해가며 직접 연구해 준비했다는 것.
“홍 관장은 평소 ‘미술교육은 억지로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다. 어린이들이 스스로 관심을 갖도록 흥미를 유발시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색감과 공간연출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또한 어린이들이 미술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함께 전시 작품을 둘러보며 끊임없이 아이와 대화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매번 강조하시죠.”
잠실에 있는 삼성어린이박물관 역시 우리나라에 어린이 박물관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95년에 “아이들에겐 보기만 하는 박제식 박물관이 아닌 체험 박물관이 필요하다”며 그가 만든 것. 삼성어린이박물관에서는 지난 3월18일부터 ‘우리집은 공사 중’이라는 상설전을 열고 있다. 채 완성되지 않은 2층 대형 집구조물에 아이들이 놀이를 하듯 직접 집을 만들어 완성하는 체험을 통해 공간성과 사회성, 창의적인 표현력을 키울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한편 차녀 서현씨가 미술을 전공했고, 며느리 임세령씨도 미술에 관심이 많아 삼성가의 미술사랑은 대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막내딸 윤형씨도 리움 개관 전까지 이곳을 드나들며 홍 관장을 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막내동생 홍라영씨(45)가 리움 수석 부관장으로 홍 관장을 돕고 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