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광수생각’의 만화가 박광수씨(36)를 만났다. 90년대 후반,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만화들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는 지난 몇 년 사이 개인적으로 큰 굴곡을 겪었다. 7년간 함께 살던 아내와 별거 끝에 이혼하고, 이혼 전에 만난 7세 연하의 이현주씨(29)와 드라마틱한 사랑을 통해 2002년 재혼한 것.
그 후 작품활동도 중단하고 언론에도 좀처럼 얼굴을 내비치지 않던 그가 오랜만에 만화에세이 ‘남자들의 속마음 108문 108답’을 펴냈다. 거기엔 과거의 ‘착한’ 광수생각과는 달리 좁게는 개인 박광수의, 넓게는 수컷 동물인 남자들의 ‘사랑’과 ‘성’에 대한 속마음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사람들에겐 여전히 ‘바람이 나서 아내와 이혼하고 젊은 여자와 재혼했다’고 알려져 있는 그가 ‘바람기’와 ‘성욕’이라는 남자의 본능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게 무척 용감하게 느껴졌다. 자칫 또 한번 그에게 비난의 화살이 빗발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가 책을 쓴 이유와 최근 넷째 아이를 얻은 그의 결혼생활이 궁금했다.
“신문 연재를 그만둔 후에도 한동안 인터넷에선 만화 연재를 계속했는데, 1년 전부터 그것마저 그만뒀어요. 매일 연재를 하다보니까 나중엔 바닥이 다 드러나더라고요. 충분히 쉬고 나서 이제 이야기가 좀 쌓였다 싶을 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다시 연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그동안 만화 연재를 안 했다고 해서 논 것은 아니라고 했다. 모바일 플래시 애니메이션 등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는 것.
“이번에 나온 책도 그중에 하나예요. 2005년까지 모두 6권을 낼 예정이에요. 어쩌면 사람들이 ‘쟤가 요즘 돈이 없나’ 하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웃음). 저는 연재를 안 하니까 시간적으로 여유도 많고, 행복해요.”
“솔직히 말해 여자를 대하는 남자 마음과 아버지 마음의 차이가 커요”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통통한 몸매며 선 굵은 뿔테 안경을 낀 개구쟁이 같은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착한’ 광수의 따뜻한 미소는 쉽게 발견하기 힘들었다. 인터뷰를 하기 전 사진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굳은 표정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행복하다는 말과 달리 얼굴 표정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기자를 만나는 게 아직은 거북스럽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인터뷰를 하다보면 이혼과 재혼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고, 그것이 기사화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부담스럽다는 것. “2년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각이 부담스럽냐”고 묻자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저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않아요. 그 당시에도 언론을 피했던 건 제가 힘들어서가 아니었어요. 전 남의 눈치를 보는 편이 아니어서 하고 싶은 일은 욕을 먹더라도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좋지 못한 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때문에 부모, 형제, 아이들, 처가 식구들이 힘들어하니까 그게 힘들더라고요.”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2003년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남자답게 사는 법’이란 코너에 고정출연을 하면서였다고 한다.
“지금의 아내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해서인지 남자의 심리를 잘 아는 편이었어요. 그래서 전 다른 여자들도 다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여성 청취자들의 사연을 읽다보니까 여자들이 남자들의 속마음을 너무 모르더라고요.”
예를 들어 한 여성이 남자와 6개월 정도 채팅하다 사랑의 감정이 싹터 직접 만나게 되었는데, 첫 데이트를 한 후 남자에게 “오늘 어땠어요” 하고 물었더니 남자가 “그럭저럭이요” 했다며 ‘그럭저럭’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사연을 보내왔다고 한다.
“남자들은 단번에 싫다는 뜻이라는 걸 알잖아요. 근데 여자는 모르더라고요. 처음엔 알면서도 다시 한번 확인받으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비슷한 질문이 계속 이어지는 걸 보며 진짜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박광수는 이번에 펴낸 책을 이혼한 박광수가 쓴 책이라는 선입견을 갖지 말고 한 남자가 솔직하게 쓴 남자의 심리로 봐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한 “제 남자친구는 삼각팬티만 입어요. 삼각팬티만 입는 사람은 어떤가요” 하는 황당한 질문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남자들은 대부분 별 생각 없이 삼각팬티를 입었다 사각팬티를 입었다 하기 때문이라고. 이렇듯 남자들의 아무 의미 없는 것에 여자들은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고, 남자가 정말 의미를 가지고 하는 말과 행동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
“남자는 여자를 정복하려는 욕구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여자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거든요. 그에 비해 여자들은 남자를 너무 모르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상처받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자들이 궁금해하는 남자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서 남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가 남자의 속마음을 책으로 쓰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탐탁지 않아 했다고 한다.
“미국 FBI가 UFO나 외계인의 실체를 밝히지 않는 것처럼 제 주위의 남자들은 제가 남자들의 속마음을 계속 함구하기를 바랐죠.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전 남자이기도 하지만 두 딸의 아빠이기도 하거든요. 여자들이 남자의 나쁜 것까지 다 알고 남자를 이해함으로써 상처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그는 책 내용이 자신의 생각을 쓴 것이지만 최소한 70%의 남자들은 같은 속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적어도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 철학자가 ‘어떤 성자도 혼자 있을 땐 코딱지를 판다’고 말한 게 있어요. 본능은 다 똑같다는 거죠. 그런 본성을 아닌 척 감추는 것보다는 그게 잘못된 생각이어도 충실히 내보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물론 감정을 드러내고 후회하는 경우도 있지만 드러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믿거든요.”
책을 읽다보면 남자는 성욕과 바람기가 당연히 있고 여자들도 그걸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딸에게는 혼전순결을 강조한다. 그에게 이율배반이 아니냐고 하자 자신은 전혀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게 남자 마음과 아버지 마음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전 남자이기도 하고 아버지이기도 하거든요. 예를 들어 저는 룸살롱 가서 복도에서 아버지를 만난다면 남자로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지만, 어머니의 아들로서는 이해 못할 부분이 있을 거예요. 저라는 존재엔 남자인 나도 있지만 아빠인 나도 있고 누구의 친구인 나도 있어요. 그게 각각의 상황에서 적용이 되기 때문에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원조교제 하는 사람도 자식에게는 끔찍하듯이 성욕과 자식사랑은 무관한 것이에요. 여자들은 그게 자기모순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남자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다고 해서 ‘남자는 다 늑대이고, 본능적으로 바람을 피우게 되어 있는 가련한 동물이니까 여자가 참고 살아라’ 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 안 될 수도 있지만 남녀관계에서 힘든 일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남자는 원래 이래’ 하고 이해의 폭을 넓혀 상처받지 말고, 좀더 테크닉을 발휘하라는 뜻이라는 것.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모양이 변한다는 걸 나이 들며 깨달아
아무래도 이혼과 재혼이라는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글을 쓰는 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특히 ‘결혼식이 코앞인데 이상형의 여자를 만났다면?’이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그냥 결혼한다’고 했다. 하지만 대답과 달리 그 자신은 새로운 여자를 선택했다.
“제가 이혼한 건 지금의 아내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사실, 이혼을 하면서 다시는 결혼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어요. 그걸 깬 게 지금 결혼한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신이 나를 위해 만들어준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럼 앞으로 또다시 이상형의 여자가 나타나면 어떨 것 같냐”고 하자 “자기가 사랑했다고 믿었던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흔들릴 거예요. 하지만 이제 결혼식을 또 하는 것도 지겹고 청첩장 돌리는 것도 미안하니까 그만해야죠” 하며 웃었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요. 나에게 더 이상의 사랑은 없다고.”
그는 사랑에 대해 ‘두 발이 진흙에 빠져 있어도 사랑하는 이의 두 손을 꼭 잡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 ‘힘든 길을 힘들지 않게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로맨티시스트다. 하지만 ‘사랑은 모양을 계속 달리한다. 처음의 모양을 사랑이라고 믿고 그것만 좇는다면 사랑은 유리알처럼 깨지게 되어 있다’는 성숙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이미 한 번 사랑이 유리알처럼 깨지는 경험을 했으니까 지금 아내와의 사랑은 다를 것 같다.
“그때는 많이 어려서 사랑이 변하는 것에 대해 대처할 능력이 없었어요. 감정적이었고요. 나이가 들면 좀더 이성적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결론을 얻어냈겠죠. 지금 아내와 ‘사랑에 대해 형태의 변화를 가지고 말하지 말고 질량을 가지고 말하자’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남녀간의 사랑보다 부모의 사랑이 더 크잖아요. 그런 개념인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연애 감정은 사라지지만 함께 굴곡 많은 삶을 살며 느낀 서로에 대한 실망과 기대가 정으로 쌓이는데, 그게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결혼생활은 신뢰가 없으면 깨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걸 미리 깨달았다면 전부인과 이혼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없을까.
“제가 이혼을 한 데는 다른 일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지금은 제가 이혼한 게 지금 아내 때문이 아니라는 이야기 정도만 할 수 있어요.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면 그 말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이 생길 테니까요. 물론 당시 이혼을 결정할 때 다른 부모처럼 ‘아이들을 위해 내 삶을 희생할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을 백번 천번도 더 했죠.”
그는 전부인과의 사이에 상준이(9)와 정인이(8), 지금 아내와의 사이에 상헌이(3)와 주원이(1)가 있다.
“큰 아이들은 엄마 집과 우리 집을 왔다갔다 하고 있어요. 아이 엄마랑 상의해서 아이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데려와요. 가장 중요한 건 어른들 생각이 아니라 아이들이니까요.”
아이들이 왔을 때 지금 아내가 부담스러워할 법도 하건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씨가 나이에 비해 이해를 많이 하는 편이라는 것. 큰 아이들이나 작은 아이들이나 다 같은 자식으로 생각하고 형제란 의식을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신발만 큰 어른 개구쟁이인 나를 잘 컨트롤해주는 아내 고마워”
“결혼생활은 남들하고 똑같아요. 주원이 기저귀 갈고, 목욕 시키고, 분유 먹이고…. 이제는 남자도 그런 일 안 하면 살기 어렵잖아요(웃음).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틈만 나면 여행을 갔는데, 요즘은 힘들어요. 주원이가 며칠 전에 백일이 지났거든요.”
그는 남들처럼 부부싸움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이유로 싸우곤 한다고.
“재활용 쓰레기 안 버린 걸로 많이 싸운 것 같아요. 제가 재활용 당번이거든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걸로 싸우지만 둘 다 성격상 냉전이 반나절 이상 가는 법이 없어요. 어떤 땐 싸우면서 화해할 때도 있어요.”
그가 애정 표현을 하는 방법은 독특하다. 일 때문에 외국에 나가느라 며칠 동안 집을 비울 때면 편지를 써서 아내 눈에 띄지 않는 데다 넣어놓고 간다는 것. 그리고 공항에서 비행기가 출발하기 직전에 전화를 해서 신발장 안, 혹은 냉동실 안에다 편지를 넣어놓았으니까 읽어보라고 말해준다고.
“편지엔 대충 앞으로 술을 덜 먹겠다, 좋은 남편이 되겠다고 쓰죠. 아내도 제가 일 때문에 힘들어하면 제가 일하느라 펼쳐놓은 노트 같은 데다 힘내라고 편지를 남겨요.”
그는 아내에 대해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고 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데도 신발만 큰 어린이, 어른 개구쟁이인 자신을 잘 컨트롤해준다는 것.
“제 모자라는 부분을 많이 채워줘요. 그래서 항상 고맙죠. 재미있게 행복하게 예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그는 영화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꿈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직접 아이디어를 내서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까지 맡아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것.
그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바람을 피력했다.
“솔직히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는 제가 이혼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아요. 그런데 인터뷰를 하면 제가 이혼했다는 걸 뼈저리게 자각해요. 기자들의 질문에 그 전제가 깔려 있으니까요. 독자들도 이 책을 이혼한 박광수가 쓴 책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보는 것 같아요. ‘이 인간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이 글을 쓰는구나’ 하는 전제 아래 책을 읽어요. 전 스스로 책을 쓰며 자기 합리화 해야 할 만큼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한 남자가 남자의 솔직한 심리에 대해 쓴 책으로 생각하고 재미있게 읽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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