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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도전하는 삶

거듭된 사업 실패 끝에 오십에 재기한 ‘성신제 피자’ 대표 성신제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바로 인생의 승부수를 던질 최적의 시기지요”

■ 기획·구미화 기자 ■ 글·박윤희‘자유기고가’ ■ 사진·정경택 기자

입력 2005.01.10 14:15:00

84년 한국에 ‘피자헛’을 처음 들여와 외식업계 성공신화를 일궈낸 성신제씨.
그는 93년 피자헛에서 손을 뗀 뒤 또 한번 외식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했다.
수백억원 규모의 회사를 운영하던 그가 단돈 17만원으로 재기를 다짐했을 때의 나이가 쉰 살.
7년여 만에 가맹점 20개를 거느린 토종 피자 브랜드로 재기에 성공한 그를 만나보았다.
거듭된 사업 실패 끝에 오십에 재기한 ‘성신제 피자’ 대표 성신제

최근‘성신제 피자’의 대표 성신제씨(58)가 자전에세이 ‘나는 50에 꿈을 토핑한다’를 펴냈다. 서른 살, 마흔 살도 아니고 오십에도 꿈을 꿀 수 있다니, 더군다나 그는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가 아닌가.
“내일모레면 환갑인데 아직도 꿈을 토핑해요?”
동갑내기 부인 김호신씨(58)조차 그의 ‘꿈’ 타령에 딴죽을 걸었다고 한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마디 했다고.
“그래, 육체의 나이가 오십이면 어떻고 육십이면 또 어때? 중요한 것은 정신의 나이지!”
‘오버’라고 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고 ‘사기’라고 하기엔 그의 구레나룻에서 신뢰감이 풍겼다. 그렇다면 새삼 그가 청년들의 전유물과도 같은 꿈 타령을 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 사회는 아직도 1등만 알아주지 아무리 큰 가능성을 갖고 있어도 한 번 실패한 사람들은 사회의 천덕꾸러기, 인생의 낙오자로 취급하잖아요. 패자부활전이라고 할까요? 실패를 거듭한 사람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재도약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지금은 한국 토종 피자 브랜드로 유명한 ‘성신제 피자’를 경영하며 외국의 외식 브랜드와 어깨를 당당히 겨루고 있지만 그는 한때 깡통 찬 거지 신세와 다름이 없었다. 84년 미국의 외식업체 ‘피자헛’을 국내에 들여와 52개의 직영점포를 개설, 큰 성공을 거두며 3백억원대 부자가 됐던 그는 93년 미국 본사와의 분쟁에 휘말리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후 ‘케니로저스 로스터스’ 치킨 체인사업으로 재도약을 꿈꿨지만 또 한번 다국적기업의 횡포와 IMF 사태가 맞물리면서 그야말로 ‘폭삭’ 망했다.
하지만 그는 실패의 밑바닥에 세게 내동댕이쳐진 그만큼의 반동을 이용해 축구공처럼 다시 튀어 올랐다. 결코 포기하지 않은 ‘희망’이라는 원심력이 그의 새 인생에 팽팽한 탄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97년 10월은 그의 패자부활전이 시작된 시점이다. 그가 운영하던 케니로저스 로스터스 사업이 부도가 난 것. 그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이미 채권단이 한바탕 휩쓸고 간 뒤라 책상과 의자는 뒤엎어져 있고 각종 서류는 휴지조각처럼 공중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 때 제 나이 오십이었는데 채권자들에게 옷이 찢길 정도로 멱살을 잡히고 온갖 수모를 당했어요. 매일 그런 식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더라고요. 오십은 재기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사업 실패 후 자살할 생각까지 했지만 아빠 없이 자랄 아이들 생각에 마음 다잡아
거듭된 사업 실패 끝에 오십에 재기한 ‘성신제 피자’ 대표 성신제

좌절감과 상실감으로 생각이 뒤엉킨 그는 회사 근처 건축 공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죽음밖에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물 10층까지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 그곳에서 4시간 동안 오십 평생을 되돌아보았다. 두려움도 미련도 없었다. 그런데 바닥으로 몸을 내던지려던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친 사람이 있었다.
“죽으려고 마음을 굳혔는데 아버지 생각이 퍼뜩 났어요. 뇌출혈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졌던 순간들이 생각나더라고요. 살면서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마음으로 의지할 사람이 없어 힘들어했던 기억도 떠오르고요. ‘지금 내가 죽으면 내 자식들도 똑같은 서러움을 대물림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살아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되돌렸죠.”
이때부터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출발선에 서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친구이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의 권유로 하나 둘 구입하기 시작해 그 매력에 푹 빠져 보물처럼 아꼈던 추사 김정희와 겸재 정선의 작품들을 팔아 생계비를 마련했다. 그리고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투자 자금을 모았다.

거듭된 사업 실패 끝에 오십에 재기한 ‘성신제 피자’ 대표 성신제

“제가 가장 잘 아는 분야가 피자이기 때문에 피자로 승부를 걸어보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저만의 ‘브랜드’를 갖고 싶어 새로운 피자 개발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피자헛을 10년 정도 운영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피자 만드는 노하우가 있었거든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순수 국산 피자 사업을 구상한 그는 투자자를 모을 겸 피자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아내가 패물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과감히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LA에 도착하자마자 친구의 소개로 매일 저녁 빵공장에서 도우(dough·밀가루 반죽) 만드는 기술을 연구했다. 낮에는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사업계획을 설명했다. 다행히 피자헛을 운영할 당시 인연을 맺은 친구들로부터 투자를 약속받았지만 문제는 도우 기술이었다.
“피자에는 크게 미국식과 이탈리아식이 있는데 미국식 도우는 고온에서 단시간에 숙성시키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반죽의 숨이 죽어버리는 단점이 있어요. 반면 이탈리아식 도우는 저온에서 하루 정도 숙성시키기 때문에 발효 상태가 오래 지속돼 밀가루 특유의 쫄깃쫄깃한 맛을 장시간 유지할 수 있죠. 전 이탈리아식 도우를 만들고 싶었는데 아무리 연구해도 전혀 진척이 없었어요.”
귀국 예정일은 다가오고, 조급해진 그는 베벌리힐스의 유명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주방과 가까운 식탁에 앉아 피자를 주문해놓고, 주방을 어슬렁대며 요리사들의 조리 과정을 유심히 지켜봤다. 반죽 크기는 얼마만한지, 부드럽기는 어느 정도인지, 밀가루의 양은 대충 어느 정도인지까지.
98년 3월,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탈리안 식당에서 염탐한 그대로 도우를 만들어봤다. 그런데 눈으로 보는 것과 직접 손으로 매만지는 데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밤새 도우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다음날 확인해보면 탱탱하게 부풀어 있어야 할 도우가 전날 밤 넣어둔 상태 그대로 있었다.
“귀국해 도우 기술을 연구한 지 한 달이 지나도 빵이 부풀지 않았어요. 그러는 사이에 밀가루도 다 떨어지고 전기 요금을 내지 않아 전기도 끊겼죠. 그래서 전화를 해지하고 받아 온 돈 17만원으로 밀가루를 사서 다시 반죽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밀가루 반죽과 씨름하며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드디어 도우에 변화가 일어났다.
“드디어 도우가 숨을 쉬더라고요. 순백의 도우가 서서히 부풀어오르는 장면을 처음 본 순간 눈물이 났어요. 제 숨통이 확 트이는 느낌이더라고요.”
천신만고 끝에 도우 개발에 성공했지만 이번엔 피자를 구울 오븐기가 없어 문제였다. 다행히 그가 피자헛을 운영할 때 함께 일했던 회사 직원이 독립해 피자 가게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옛 직원을 찾아가 오븐기를 빌려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집엔 오븐기가 한 대였는데 제가 피자를 굽는 동안 주문이 들어오면 입장이 정말 난처했어요. 제가 굽고 있는 피자가 다 익기를 기다리고 있는 주인에게 미안해 얼굴이 화끈달아올랐죠.”
이렇게 궁핍한 생활의 연속이다보니 그의 지갑 속엔 밥값조차 없을 때가 많았다. 한번은 사업 실패 전부터 알고 지낸 한 경제지 기자가 그의 재기 소식을 기사화하겠다며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 피자 사업을 홍보할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는 기자와의 만남을 포기했다.
“인터뷰를 약속한 날 버스 정류장에서 지갑을 열어보니 텅 비어 있는 겁니다. 점심시간에 만나기로 했는데 설렁탕 한 그릇 값이 없더군요. 한때는 지갑에 백만원짜리 수표를 수십 장 넣고 다녔던 제가 설렁탕 한 그릇 값이 없어 망설이고 있다니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결국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급한 약속이 생겼다고 거짓말을 하고 되돌아왔죠.”

거듭된 사업 실패 끝에 오십에 재기한 ‘성신제 피자’ 대표 성신제

딸 윤경씨(왼쪽에서 세번째) 약혼식 때의 모습. 성신제 대표는 재기하는데 가족이 가장 큰 힘이 됐다고 말한다. 그의 왼쪽이 아내 김호신씨, 오른쪽이 아들 기운씨.


그는 가장 중요한 재기의 원동력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과 ‘가족의 힘’을 꼽았는데 그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부인의 위로와 격려가 가장 큰 힘이 됐다고 한다. 부인은 결혼 패물을 사업 준비 자금으로 다 내놓고, 아이들을 위해 매달 꼬박꼬박 붓던 적금통장까지 해약했지만 그에게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고 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를 위해 아침밥을 챙겨주었다고.
그가 피자헛을 창업하기 전 조그마한 스포츠용품 회사를 운영하다가 도산했을 때의 일이다. 이때도 늘 그의 지갑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지갑에 단돈 몇백원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잠든 다음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보니 천원짜리 몇 장이 더 들어 있었다. 아내에게 물었지만 아내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그러나 금세 범인이 잡혔다.
“어느 날 이불 속에 누워 있는데 아내가 제가 잠든 줄 알고 조용히 지갑에 돈을 넣더라고요. 차마 아는 체는 못하고 베갯잇을 적시며 울었죠.”
실패를 거듭해도 “당신은 성공할 수 있어” 하며 믿어주는 아내가 있어 행복했다는 남자 성신제씨. 패물을 모두 잃은 아내에게 작은 반지 하나를 사주기 위해서라도 꼭 재기에 성공하겠다고 다짐한 그는 마침내 98년 5월 서울 명동에 성신제 피자 1호점을 열었다.
그는 단호히 “한 가지 일에 미치지 않고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명동에 성신제 피자 1호점을 열었을 당시 그는 그야말로 피자에 미쳐 있었다. 모든 피자를 그가 직접 만들어 팔았다. ‘성신제표 도우’를 만들 기술자가 그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하루에 약 1백 판의 피자를 만들었어요.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팔이 저려서 숟가락을 들지 못할 정도였죠. 나중에는 손목, 팔꿈치, 어깨에 무리가 와서 파스는 기본이고 압박붕대를 감고 일했어요. 그 때는 매출만 쑥쑥 오른다면 피자를 만들다 쓰러져 죽어도 좋을 것 같았거든요(웃음).”
성신제표 피자의 특징은 이탈리아식 피자에서 착안해 반죽을 저온에서 하루 동안 숙성시켜 이스트의 발효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한다는 점. 도우를 반죽할 때 최대한 기름을 적게 사용하고 피자 한 판에 세 잔 분량의 녹차를 넣어 담백한 맛을 살린다. 또한 피자는 도우에 얹는 치즈, 햄, 불고기, 고구마, 김치 등의 토핑에 따라 얼마든지 맛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그는 색다른 피자를 개발하기도 했다.
이런 맛의 차이가 경쟁력으로 이어져 성신제 피자는 현재 서울, 부산, 영통 등 20여 곳에 가맹점을 두고 있다. 한창 잘 나가던 피자헛 시절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이 정도면 그의 ‘피자 독립 선언’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셈이다.
“재기에 성공하기 위해 지난 7년 동안 외출복 한 벌 제대로 사 입은 적이 없어요. 밑창이 떨어져 물이 들어오는 신발도 그냥 신고 다녔으니까요. 물질적으로는 빈곤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참 많이 풍요로워졌어요.”
인터뷰 말미에 그는 실패담이면서 성공담인 자신의 이야기가 부도 위기에 놓인 사업가, 명예퇴직자, 조기퇴직자에게 힘이 되길 바란다며 이런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저는 나이 오십에 부도가 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요. 만약 육십이나 혹은 그보다 더 많은 나이에 쓰러졌더라면 어쩔 뻔했습니까. 늦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가 바로 인생의 승부수를 던질 최적의 시기입니다.”
지금도 호빵만한 밀가루 반죽을 공깃돌 굴리듯 노련하게 주무르며 피자를 구워내는 성신제씨. 그가 오븐기에서 막 꺼낸 피자에선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고소한 인생의 냄새가 솔솔 풍겼다.

여성동아 2005년 1월 4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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