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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일을 핑계로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딸에 대한 미안함

2004. 11. 03

일하는 엄마라는 핑계로 아이의 건강에 너무나 무신경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고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다른 엄마들처럼 정성스레 도시락 한번 싸주지 못하면서도 ‘난 특별한 엄마야’라고 착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열여덟 꽃띠 우리 딸의 신체나이가 40대에 이르렀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어려서 이 닦는 걸 잘 챙겨주지 못했더니 아이의 이는 온통 충치투성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자신이 나서서 보약도 먹고 치과에 다니겠다고 하니 말이다. 과거야 어찌됐든 씩씩하게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딸아이가 고맙기만 하다. 알량한 일 때문에 내 인생에서 항상 2순위에 두었던 나의 가족을 이제는 1순위로 끌어올리리라 다짐한다.

일을 핑계로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딸에 대한 미안함

남들은 로맨틱하게 가을을 앓는다는데 난 양심의 가책에 떨고 있다. 뇌물을 받거나 불법을 저지른 것도, 남을 모함한 것도 아니다. 내 유일한 혈육, 달랑 하나뿐인 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마냥 착했던 딸아이는 잔병치레도 하지 않아 나처럼 무디고 무신경한 엄마에겐 완전 맞춤형 딸이었다. 어지간한 일은 혼자 척척 알아서 처리하고(성적표에 도장도 알아서 찍어가고, 학원도 직접 가서 상담한다) 아파도 별로 내색하지 않으며(내색을 한다 한들 대신 아파줄 수도 없지만) 사고를 치지도 않아서 학교에 불려 가거나 남의 집에 사과하러 갈 일도 없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도시락으로 하트 모양의 김밥을 싸주거나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학교와 학원을 오갈 수 없는 나는 차별화를 시도했다. 다른 엄마들이 해주기 힘든 일을 해준 것이다. 연예인 사인 받아주기, 연예인과 직접 만나거나 전화 통화하게 해주기, 각종 콘서트에 함께 가기, 해외출장 가면 선물 잔뜩 사다 안겨주기, 1년에 한두 번 정도 해외여행 가기, 시험 전날에도 공부하란 말 대신 보고 싶은 드라마는 보라고 관대하게 말하기 등등…. 그러면서 은근히 나는 특별한 엄마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딸의 신체나이는 40대, 나의 신체나이는 60대로 나와
요즘 난 천식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알레르기성 천식이라는데 조금만 많이 걷거나 먹으면 그야말로 ‘씩씩’거리며 숨이 차서 견디기 힘들다. 나의 숨차하는 모습을 목격한 지인이 정말 유능한 한의사가 있다며 당장 가볼 것을 권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나 내일 한의원에 갈 거야. 천식이 심해서”라고 가련하게 말했더니 딸아이가 자기도 가겠다고 했다. 생전 병원에 가 본 적이 없는 아이, 약이라곤 치통 때문에 진통제 먹는 게 다였던 아이가 자발적으로 병원에 가겠다니 신기했다.
“내년이면 수험생인데 체력을 보충해둬야지. 요즘 자주 맥이 빠지고 기운이 없거든.”
그래서 다음날 함께 갔다. 한의원이라고 해서 허준을 닮은 의원이 나타나 진맥을 할 줄 알았는데 머리에 띠를 두르고 손에 이상한 봉을 쥐게 한 후 첨단기계 앞에 앉아 측정을 하게 했다. 그러면 머리, 내장기관, 골밀도 등이 측정된다고 했다. 딸아이와 나는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히히덕’거리며 측정을 했다. 잠시 후 한의사가 나타나 그 결과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이런, 따님의 육체연령이 마흔한 살로 나타났습니다. 전반적으로 기가 아주 허해요. 아마 인스턴트 식품을 많이 먹고 운동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열여덟 내 딸의 육체나이가 마흔한 살이라니?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마구 웃다가 갑자기 너무 무섭고 서글퍼져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 한의사가 나의 진단표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은 모녀 관계가 맞으시군요. 엄마의 육체연령은 예순한 살로 나왔습니다.”

일을 핑계로 제대로 돌봐주지 못한 딸에 대한 미안함

사십대 중반에 신체나이는 환갑이 넘었다고 한다. 세상에…. 남들은 육십에도 신체나이는 삼십대라며 탱탱한 몸매를 자랑하는데 난 몸이 이렇게 먼저 늙다니 어쩌면 좋은가. 그래도 한의사는 기를 보해주는 약을 먹으며 꾸준히 운동을 하면 얼마든지 제 나이를 찾을 수 있다고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다. 생전 처음 먹는 한약을 딸아이는 부지런히 먹고 있는데 효과는 아직 잘 모르겠다.
‘병원 다니기’에 맛을 들인 딸아이는 치과에 가자고 했다. 치과의사들이 딸아이의 이를 보면 “심봤다!!!”고 할 만큼 딸아이는 충치가 많다. 아이가 세 살 때 직장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때 아이를 돌보던 아줌마들이 젖병에 주스를 넣어 먹이고 이를 잘 닦이지 않아 아이 입속을 충치의 천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끔 치통을 호소하고 치과에도 다녔지만 아이가 어려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어려웠는데 이번에 큰맘먹고 이도 뽑고 교정도 하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로 결심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치료비가 거액일 것 같아 어떻게 해서든지 딸아이를 버티게 해서 자기가 돈 벌어 치료를 받거나 결혼 후 딸의 남편에게 맡길 생각이었는데 딸아이가 나의 흉계를 눈치챈 것 같다.
“치통 때문에 내가 시험공부 못해서 좋은 대학에 못 가거나 시험 보다가 뛰쳐나오는 게 낫수? 명문대학 가야 좋은 데 취직하고 결혼도 하지.”

보약 먹는 딸 부러워하는 남편, 큰아들이라 생각하며 홍삼이라도 먹여야 할 듯
내 머리 꼭대기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딸아이에게 무릎을 꿇은 후 치과 치료를 시작했다. 의사에게 아이의 치아 상태를 보여줄 때는 꼭 내가 충치박테리아라도 된 듯 부끄럽기만 했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가족의 건강인데 난 항상 그걸 2순위, 아니 마지막 순번에 두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 공적인 일에 시간과 돈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 후배들이나 아는 이들에게는 비싼 식당에서 “내가 한턱 쏜다”라고 호기롭게 떠들어 놓고 정작 가족들에겐 비타민 한 병 잘 사주지 못했다.
딸아이는 요즘 한약을 부지런히 먹으면서 과자나 인스턴트 식품을 먹으면 안된다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간식으로 떡을 먹고 있다. 집에서 러닝머신으로 달리기도 하고 반신욕도 한다. 조금 늦었지만 다행이다 싶다.
“아, 유라는 좋겠다. 보약도 먹고. 나도 요즘 통 기운이 없는데….”
딸아이가 약 먹는 모습을 부러운 듯 보며 이런 말을 하는 남편. 보약이 아니라 사약을 먹이고 싶지만, 남편이 아니라 큰아들이라고 생각하면서 홍삼이라도 먹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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