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28일 오전 9시경, 각 신문사 법조팀 기자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북한 경비정 송신내용 보고누락과 관련해 이날 오후 조영길 국방장관을 경질하고 후임 인사를 단행할 것으로 알려진 청와대에서 강금실 법무부장관(46)도 함께 교체할 것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전한 것.
건국 이래 최초의 여성 법무부장관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참여정부의 개혁 의지를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던 강 장관이 전격 교체된다는 소식은 기자들은 물론 법무부와 검찰 관계자들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장관실로 연락을 취한 기자들은 강 장관이 청와대를 들러 출근할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강 장관의 퇴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3시간여 지난 오후 12시20분경 강 장관은 노란색 투피스 차림으로 과천 청사에 들어섰다. 기자들이 몰려들자 그는 “너무 즐거워서 죄송하다. 올 때도 요란했는데 떠날 때도 요란해서 미안하다”며 환한 웃음으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장관을 직접 만난 사람은 누구나 팬이 돼”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떠날 때는 말없이”라며 말을 아꼈던 그는 이날 오후 간단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지난 1년 5개월이 마치 여러 해 지난 듯하다”고 소회를 밝힌 그는 갑작스런 인사 배경에 대해 “내가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물처럼 흐르듯이 하는 것이 좋다. 사람마다 역할이 있는데 주어진 역할이라 생각해서 왔고, 주어진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고만 말했다. 재임 중 가장 뜻 깊었던 일은 “검사들이 원하는 방향의 인사제도를 갖춘 것”을 꼽았고, “얼마 전 교도관이 재소자에게 맞아 숨진 일”을 재임 중 가장 안타까웠던 일로 들며 “재소자와 교도관이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지난 7월17일 재소자가 휘두른 둔기에 맞아 숨진 대전교도소 김동민 교도관의 영결식에 참석해 눈물을 흘리며 유족을 위로해 눈길을 끌었던 강 전 장관은 퇴임 후인 8월3일 인편으로 고 김동민 교도관을 위해 써달라며 법무부 양봉태 교정국장에게 5백만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일단 휴식을 취한 뒤 외국여행도 가고 원래 있던 법무법인으로 복귀할 것”이라며 시종일관 밝은 모습을 보였던 그는 다음날 오전에 열린 퇴임식에서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검은색 스커트에 흰색 재킷 차림으로 퇴임식에 나타난 그는 검사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담긴 퇴임사를 하며 목이 잠기기도 했다.
“지금은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지만 가볍고 평화로운 느낌입니다. 우리는 낯설게 만났지만 마음을 열고, 하나의 길을 열어왔습니다.…전국의 검사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부르고 싶습니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오해와 갈등도 있었지만 한길을 가면서 귀결점을 찾아내고 떠나게 돼 기쁩니다. 어느 순간 장관직에 회의가 든 때도 있었습니다. 권력관계나 정치적 네트워킹 사이에서 본연의 임무보다는 정치의 중심에서 움직여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직원들이 일깨워준 것이 있습니다. 법무부 직원 한 분 한 분을 소중히 느끼고 서로 소통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는 것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지난해 2월, ‘서울 지역 최초의 여성 형사단독 판사’ ‘여성 최초의 법무법인 대표’ ‘최초의 여성 출신 민변(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부회장’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가진 40대 여성 변호사가 보수적이고 남성적인 조직의 대명사인 법무부의 수장으로 올라섰을 때 검찰조직 안팎은 술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취임 직후 단행된 서열을 파괴한 검찰인사는 사상초유의 ‘대통령과 검사들의 대화’를 낳았고, 그는 대통령과 검사들 사이에 다리를 꼬고 앉아 검사들과 한 치 양보도 없는 논리 대결을 벌였다. 때문에 강 전 장관은 검사들 사이에 ‘계모’로 통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퇴진으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줬던 강금실 전 장관은 “너무 즐거워서 죄송하다”고 말해 또 한번 놀라게 했다.
그러나 토론회 당시 자신을 ‘점령군’으로 표현하는 검사들을 향해 “나는 정치권 출신도, 외부 인사도 아닌데 어떻게 ‘점령군’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라며 검사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재정의하려고 노력했던 그는 그 후 결코 검찰을 장악하려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열주의와 상명하복이 강하게 뿌리내린 검찰조직의 폐단을 내버려두지도 않았다.
강 전 장관은 지난 17개월간 검찰 인사위원회 운영 개선, 준법서약서 폐지, 수사권 남용 방지 방안 마련 등 가히 혁명적인 변화들을 이끌어냈다.그 중 단연 주목받는 것은 인사개혁. 강 전 장관이 표방해온 ‘경향(京鄕) 순환인사원칙’은 일부 혜택받은 검사들이 서울과 수도권만을 맴도는 폐단을 없애고 서울과 지방을 일정 간격으로 순환하도록 한 것. 강 전 장관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 인사에서도 이를 예외 없이 지킴에 따라 검찰 내부에서는 “‘백’이 통하지 않는 인사를 단행했다”며 강 전 장관의 개혁의지를 높이 샀다. 일선 검사들은 강 전 장관이 역대 장관들과 달리 정치권의 수사개입을 거의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는 것 또한 높게 평가했으며, 자신감을 갖고 국회에서 당당하게 대응하는 모습 역시 강 전 장관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강 전 장관이 과감한 검찰개혁을 계속하면서도 법무부와 검찰의 지지를 얻어 나갈 수 있었던 건 남성에게 뒤지지 않는 합리적인 업무추진 능력과 인간적인 매력을 겸비했기 때문. 강 전 장관은 취임 후 부장검사, 평검사, 검사장들과 각각 ‘집중 집단면담’을 가졌는데 면담에 응했던 검사들은 하나같이 “장관을 만나고 나면 장관 편이 된다. 편이 아니라 팬이 된다”고 입을 모았다.‘대통령과 검사들의 대화’에서 장관을 공격했던 한 검사 역시 장관과의 면담 이후 그를 이해하게 됐다고.
친화력이 강한 강 전 장관은 전국 검사들에게 보낸 이메일과 보신탕집 회동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6월 말 강 전 장관은 전국 1천4백여 명의 검사들에게 A4용지 2장 분량의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 검사들과 부대끼면서 기존에 가졌던 검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바뀌었음을 고백했다. “검사는 검찰이라는 권력기관 속에서 편향된 권력으로 부풀어 오른 이미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검사가 순결성을 지닌 직업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힌 것. 그는 또 검사들을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사람에 비유하고, 김수영의 시 구절을 인용하며 검찰개혁에 대한 의지와 철학은 바뀌지 않았지만 검사들을 사랑하게 됐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인사 단행된 날 아침 전화로 해임 통보 받아
지난해 9월엔 검찰과의 관계를 개선해보고자 송광수 검찰총장을 비롯한 검사장 전원을 과천 보신탕집으로 초대했는데 이날 폭탄주를 여러 잔 돌리고 취기가 오른 그가 송 총장의 팔짱을 끼고 “우리 사이 아무 문제 없어요”라고 말한 것이 화제를 모았다.
강 전 장관은 자신의 여성성과 문화 예술적 감각을 법무부와 검찰의 권위주의적이고 경직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데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재임기간 중 실·국장은 물론 과장들과도 격의 없는 회의를 가졌던 그는 토요일 같은 경우 회의가 끝난 후 단체로 미술 전시를 관람하거나 극장을 찾았다. 법무부 청사 복도에 기증받은 기성 작가들의 그림 15점을 비롯해 유치원생, 소년원생, 교정시설 수용자들의 그림 85점을 전시한 것도 강 전 장관의 아이디어.
한국여성단체연합 남윤인순 대표는 강 전 장관을 “참여정부 출범 때 원칙과 개혁, 부드러운 리더십, 남성 지배적인 법 영역을 이끄는 수장으로 상징됐고, 사법개혁과 인권을 위해 조직서열에 흔들리지 않고 개혁 행보를 보인 인물”로 평가한다.
강 전 장관의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외유내강형 리더십은 비단 여성단체뿐 아니라 법무부와 검찰 내부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대체적으로 강 전 장관에게 우호적으로 변했고, 특별한 실책이나 정치권의 방해가 없는 한 ‘롱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강 전 장관 역시 평소 “권력욕이 없다” “내일 당장 그만둔다고 생각하면 너무 즐겁다”고 말하면서도 검찰개혁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만큼 검찰개혁이 마무리되는 것을 지켜보길 바랐다. 올 초 시사월간지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학·미술·음악 등에 조예가 깊었던 강금실 전 장관은 자신의 예술적 감수성을 감추지 않고 법무부의 경직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데 적극 활용했다.
“검찰개혁과 관련한 제도개선 방안이 시행되고 정착되기까지는 몇 년 걸릴 것 같아요. 적어도 정착할 때까지는 지켜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교정행정도 개선할 게 많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오래 있겠다고 했는데, 사실은 내일 그만둬도 좋거든요. 편하죠 뭐, 내일 당장 그만두면. 가장 고통스러운 게 새벽에 일어나는 거예요.”
그는 매일 아침 7시반에 집을 나서야 하는 것이 여간 고된 게 아니라고 토로하면서도 검찰개혁이 안정적으로 추진될 때까지는 자리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하루 이상 5년 이하’의 장관 임기는 자신의 뜻대로 정해지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검찰이 제대로 돼야 나머지도 원활하게 돌아가죠. 2~3년은 해야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힐 것 같아요. 검사들한테는 한 3년 하겠다고, 2006년까지 있겠다고 얘기했는데 있고 싶다고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더라고, 와보니까.”
강 전 장관의 갑작스러운 퇴진을 놓고 일부에서는 강 전 장관이 먼저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추측했으나 강 전 장관의 측근은 “(강 전 장관이) 인사가 단행된 7월28일 아침 전화로 청와대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았다”고 전했다. 7월17일부터 여름휴가를 내고 26일에 업무에 복귀한 강 전 장관은 평소와 다름없이 각종 회의를 진행했고, 심지어 하루 전날인 7월27일에는 8월 말~9월 초로 예정된 국제회의 참석 준비를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퇴 의사가 있었거나 교체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행동. 이번 인사가 얼마나 갑작스럽게 단행됐는가를 짐작케 한다.
최근 강 전 장관을 만난 한 측근은 “강 전 장관이 노 대통령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통보를 받을 줄은 예상 못했다고 한다. 당일 아침에 연락을 받아 청와대로 갔고,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 퇴임사를 쓸 겨를도 없었던 모양이다. 인터넷에 돌고 있는 퇴임사는 강 전 장관이 구술한 것을 법무부 직원이 글로 정리해 올린 것”이라며 “강 전 장관이 인사개혁을 어느 정도 이뤄놓은 것에 의미를 두면서도 검찰개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떠나온 것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했다.
갑작스러운 법무부장관 교체에 대해서는 주로 집권 여당과의 갈등이 그 이유로 꼽히고 있다. 특히 지난 6월 청와대와 여권에서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이에 대해 검찰이 ‘검찰 수사를 무력화하려는 발상’이라며 반발하자 여권에서는 강 전 장관에 대한 경질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청와대 한 고위 관계자는 “검찰이 노골적으로 대통령의 심장부에까지 칼을 들이대는데 법무부장관이 방패막이 되지 못한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열린우리당 의원들도 “검찰을 장악하라고 보냈더니 일을 시끄럽게 만든다”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는 개혁 프로그램의 결정판인데, 공개적으로 검찰 편들기나 한다”며 면박을 줬던 것. 대선자금 수사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이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문제로 정점에 달하면서 노 대통령과 강 전 장관의 공조가 깨졌다는 분석이다.
격무에 시달리며 심해졌던 피부 트러블 다 나아
일각에선 ‘현 정부에 들어와서 호남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비판을 의식한 ‘호남 민심 달래기용’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호남 출신의 조영길 전 국방부장관 후임으로 취임한 윤광웅 신임 국방장관이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인 점을 감안해 호남 출신의 김승규 변호사를 신임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했다는 것.
그러나 이 같은 분석은 어디까지나 청와대 안팎과 정치권, 법무부와 검찰을 둘러싼 분위기에 의존한 추측일 뿐 강 전 장관은 “떠날 때는 말없이”라며 입을 꼭 다물고 있다. 퇴임 소식이 전해진 후 한동안 강 전 장관의 삼성동 자택에는 취재진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강 전 장관은 이번 인사와 관련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상황. 강 전 장관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언니 강인실씨 역시 “(강 전 장관이) 이제 힘든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편하게 있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경질 소식이 전해진 직후 강 전 장관은 대학 때부터 친분을 유지해온 한 변호사와의 전화통화에서 “진실로 바라던 바이기 때문에 너무나 행복하다. 3개월 정도 쉬고 싶다. 한 달은 지인들 만나며 놀고, 한 달은 유럽 여행, 특히 스페인 알람브라궁전을 꼭 가보고 싶다. 나머지 한 달은 책을 읽으며 변호사 복귀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퇴임 후 강 전 장관을 만난 한 측근은 장관 시절 아침잠이 부족하고, 격무에 시달리느라 피부 트러블이 심했던 그가 마음이 편해졌는지 피부가 많이 좋아졌다고 전했다. 또한 그동안 소원해진 지인들을 만나느라 거의 매일 점심·저녁 약속이 잡혀 있다고. 강 전 장관은 얼마 전 참여정부 출범 당시 ‘두 스타 장관’으로 지목됐던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과 나란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샤갈 전시회’를 찾은 데 이어 지난 8월4일에는 시네큐브에서 함께 영화를 관람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마음껏 즐기며 춤도 다시 배울 생각이라는 강 전 장관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스페인 여행 준비. 평소 미술관을 즐겨 찾고, 오래 전부터 알람브라궁전에 가보고 싶어했던 그는 열흘 일정으로 스페인 주요 명소와 함께 피카소 미술관과 알람브라궁전을 둘러보고 인접한 프랑스 니스도 방문할 계획을 세워 지인들로부터 정보를 모으는 중이라고 한다. 유럽 여행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진 그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일정과 동반자는 정하지 못했다고. 장관시절 몸담았던 법무법인 지평에는 3개월 뒤에야 복귀할 예정이다.
취임 초 노무현 대통령의 강력한 검찰개혁 의지를 받드는 ‘철의 여인’으로 비쳐졌던 그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장관답지 않은’ 친화력으로 법무부와 검찰을 감싸 안았다. 때문에 그를 ‘계모’라고 여기던 검사들까지도 “가만히 보니 계모가 생모보다 더 잘하려고 애쓴다”며 호감을 가졌을 정도. 인정에 얽매이지 않고 원칙을 지키면서도 인간적 소통과 배려를 중시했던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한국 최초의 여성 법무부장관으로 역사에 남을 그를 향한 세인의 관심과 기대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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