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으로 싱글맘의 고단한 삶 노래한 시인 신현림

‘끝간 데 없이 힘겨운 나날을 일중독증으로 잘 살아냈다’는 시인의 자서(自序)를 보며 자기 일을 가진 이 땅의 30, 40대 치고 일중독증 아닌 상태로 사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다. ‘다소 엄살스럽지 않나’ 하는 선입견을 가진 채 한 시립 도서관 사이트에 접속을 했다. ‘신현림’ 석자를 넣고 자료검색을 해보니, 무려 15권의 책이 떴다. ‘사랑의 끝에서 나를 만나다’ ‘블루데이북’ ‘굿모닝 레터’ ‘엄마의 길’ ‘나의 아름다운 창’ 등등. 거기엔 2002년 이후에 출판된 책만 기록이 되어 있어 그의 첫 번째 시집인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와 두 번째 시집인 ‘세기말 블루스’는 올라 있지 않았다.
“96년 ‘세기말 블루스’를 낸 이후 8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냈으니 좀 늦었지요. 하지만 시를 안 썼던 건 아니에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해야 했고 그래서 본업인 시 대신에 번역서, 영상 에세이, 기행문 등의 책을 냈죠. 이번 시집은 8년 동안 써왔던 많은 시 뭉치들 중에서 60여 편을 골라 다듬고 다듬어서 만든 거예요.”
미술가 남편과 전혀 행복하지 않았던 결혼생활, 그리고 이혼
신현림씨(43)는 이번 시집은 오랜 세월 공들인 만큼 애착이 간다고 했다. 특히 깨진 결혼을 견뎌내는 아픔, 끝난 인연에 작별을 고하는 쓸쓸함, 싱글맘으로서의 고단함, 그러면서도 아이를 통해 얻는 한줄기 위안과 기쁨 등이 녹아 있어 더욱 남다르다고.
“처음엔 시집 제목을 ‘가을에 아픈 사람’으로 하려 했어요. 그런데 가을이 아닌 때는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찾은 제목이 ‘해질녘에 아픈 사람’이에요. 해질녘은 가장 황홀하면서도 아프잖아요. 가슴 한복판에 짠한 물결이 일렁이는 그 무엇이 있는 시간, 옛 추억, 그리움,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떠올리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시간이기도 하고요.”

시인 신현림씨는 망설임 끝에 지난 결혼생활과 이혼 그리고 싱글맘의 생활에 대해 털어 놓았다.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하면 절벽이 달려온다’고 독백하는 그. ‘나를 중심으로 도는 지구는 왜 이렇게 빨리 도는지 모르겠다’고 흐느끼는 그. 하지만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으며 씩씩하게 일어서는 그로부터 마흔셋 나이의 궤적을 들어보았다.
압축된 언어로 시대의 고민, 좌절, 방황을 노래하는 시인에게 되돌리고 싶지 않은 지난 인연을 캐묻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신현림씨는 아주 짧게 “가치관이 달랐다”고만 말하고 더 이상 전 남편에 대해 거론하길 싫어했다. 마음을 열기까지 한참의 워밍업을 거친 후 그는 조금씩 지난 인연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97년 서른일곱 나이에 동갑내기인 남자와 결혼을 했다. 전남편을 만난 건 ‘세기말 블루스’로 세상에 그가 알려지던 해 가을. 그는 아주대 국문과를 졸업했지만, 미술을 전공하고 싶어 입학 전에 여러 차례 미대 입시에 도전을 했었다. 십대 말 이십대 초, 미대 진학을 목표로 화실에 다닐 때 남편은 같은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남학생이었다. 그림을 그리며 친구로 지냈던 그 남학생이 그의 이름을 듣고 연락을 해왔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그 나이까지 제 짝을 찾지 못한 처녀, 총각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해 편하게 만나다가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쉽지 않았다.
“해박한 지식, 예술하는 사람 특유의 독특한 매력이 있었지만 함께 살다 보니 안 맞는 부분이 참 많았고 그게 불편함이 되었어요.”

그는 싱글맘으로 생활비 마련을 위해 고단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의 희망 서현이를 생각하며 씩씩하려 애쓴다.

미술을 전공한 남편과 시를 쓰는 그 둘다 개성이 강한 사람이라 부딪치는 부분이 많았다고 털어놓는다. 결혼식은 올렸지만,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딸 서현이를 낳은 후 혼인신고를 했다. 잠시 아이의 존재가 부부를 묶어주는 듯 했으나, 백일이 채 못가 마음이 떠나고 결국 두 사람은 결별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혼도 금방 되지 않아 지난해 에야 서류 정리가 끝났다는 그는 전남편과 부부로 살았지만, 여느 부부들처럼 함께 TV보고 밥 먹고, 손 잡고 침대로 들어가는 다정다감한 생활은 해보지 못했다고. 결혼생활 내내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거의 주말부부로 지낸데다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일중독자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
“이혼하니까 참 좋았어요. 체증이 내려간 듯 시원하고 해방된 느낌이랄까, 주변 사람들도 얼굴빛이 좋아졌다고 말하더군요. ‘나랑 안 맞는 사람이랑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든 거였구나’ 이혼 후 새삼 깨닫게 됐죠.”
‘…불빛 환해도 길을 잃기 일쑤고/ 축제가 열린다지만/ 축구공만한 해는 내게 날아오지 않고/ 네 메일이 왔나 클릭하면 스팸 메일만 가득하고/ 꿈꾸던 등대는 물살에 잠겨간다/ 더는 우릴 묶을 끈도 없이 되돌아올 것도 없이/ 창밖엔 흰 머리칼 더미가 휘날려…(‘어디에도 없는 사람’ 중에서)’의 시 구절은 갈등하던 당시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다른 건 모두 필요 없다. 서현이만 키우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위자료 한 푼 받지 않고 헤어졌지만, 싱글맘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일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남편이 위자료를 주고 싶어한다 해도 돈이 없는 걸 뻔히 아니까 위자료는 기대도 안했어요. 예전에도 내가 벌어 썼으니까 서현이 하나쯤은 충분히 키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애 딸린 엄마가 아이를 돌보며 자기 일을 한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어요.”
청탁받은 원고를 쓰려 하면 갓난쟁이 딸이 함께 있자며 다리를 붙잡고 사이렌처럼 울어대고, 밤에도 수시로 깨어 아이를 보살펴야 하고, 아침에는 때맞춰 일어나 밥 챙겨 먹이고 두 정류장 너머에 있는 어린이집으로 매일 아이를 데려다주고 집안일을 처리하는 일만으로도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일과 양육’ 두 가지를 모두 잘하기 위해선 매일 지치지 않고 힘을 내는 게 필요했다. 그의 시 ‘헝그리 정신’에서처럼 ‘가난의 마지막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떠올리고, ‘공들이지 않은 실패가 얼마나 깊은 무덤인지’를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살았다.
“주중에 한 번 남편이 서현이를 데리고 가요. 어린이집에서 만나 밤 8~9시경에 서현이를 반납(?)하는데, 제가 아빠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걸 아는지 서현이는 아빠를 만나고 와서도 아빠와 지낸 일에 대해 일절 말을 하지 않아요. 어쩌다 인사치레로 ‘재밌었니?’ 물으면 ‘응’하고만 대답할 정도로 눈치가 백단이에요.”

아파트 융자금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고, 최대한 아껴서 생활
그는 매일 새벽 2시까지 일을 하고 아침 9시나 10시쯤 일어난다. 김가루나 볶은 멸치를 밥에 넣고 참기름 몇 방울을 떨어뜨려 아이에게 떠먹인 다음 서현이를 등에 업고 자전거 페달을 밟아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긴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한 일간지에 연재하는 원고를 보내고 오후 2~3시경 아주대 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 가는 길에 약간의 언덕이 있어서 숨을 헐떡이며 도서관에 들어서면 피곤이 몰려온다. 책상 앞에 앉아 신문지를 덮고 20여 분 정도 잠을 청하기도 한다. 책을 골라 읽고 공부도 하다가 프린트해온 원고를 수정하기도 하면서 저녁 8시까지 보낸다. 상명대 디자인대학원에서 사진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원 수업은 마쳤지만 아직 논문은 쓰지 못한 상태. 석사 논문을 쓰기 위한 밑작업을 여기서 한다. 저녁밥은 거의 학생식당에서 2천원짜리 백반으로 해결한 뒤 애마인 자전거를 끌고 서현이를 데리러 간다.
지금은 방학했지만 평생교육원에서 강의가 있는 날엔 저녁 7시에서 10시까지 강의를 하고 서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 집에 돌아온 후에는 서현이를 목욕시키고 엄마로서 하루 종일 못했던 것을 집중해서 해준다. 책 읽어주고 놀아주다 아이가 잠들면 일을 시작하는데 엄마의 사랑이 고픈 서현이는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새벽 1시까지 잠을 자지 않아 그의 애를 태우기도 한다.
“엄마는 빨리 재워놓고 일을 해야 하는데 서현이는 계속 책을 읽어달래요. 2권 정도 더 읽어주고 나면 전 완전히 파김치가 돼요. 저는 ‘그만 자자’하고 서현이는 떼를 쓰고, 계속 고집을 피울 때는 엉덩이를 때려서 잠자리에 들게 하는데 울며 잠드는 아이를 보면 정말 가슴이 미어지죠. 생활이 뭐 길래 이러나 싶고….”

신현림씨는 시집 발표와 함께 사진 전시회와 사진산문집 발간을 앞두고 있다.

돈 걱정 없이 서현이에게 매일 원하는 만큼 책을 읽어주고 함께 비디오를 보며 놀아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목 위까지 차오르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날엔 등 뒤에 서현이를 업은 채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막 달려갔다 와요. 그러면 기분이 좀 풀려요. 기분 좋은 날엔 음악을 틀어놓고 서현이와 함께 몸을 흔들며 막춤을 추기도 해요. 딸과 함께 춤추는 시간은 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시간이죠.”
2002년에 결성된 인터넷 카페 ‘신현림을 사랑하는 모임’에 들어가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에게 삶의 위안과 기쁨을 주는 시간들이다.
그는 수원 아주대 캠퍼스 옆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서울에서 전세를 살다가 집세를 올려 달라고 해서 여동생 부부가 위층에 살고 있는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노후를 위해선 집이 있어야겠다 싶어 은행 융자를 얻어 아파트를 샀지만 지금까지 매월 융자 빚을 갚느라 ‘피를 말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싱글맘, 그의 삶의 희망은 바로 사랑스런 딸 서현이
융자금을 갚기 위해 사보나 잡지 등의 청탁이 오면 무조건 오케이, 출판사로부터 번역비나 에세이집 등의 계약금을 당겨 받기도 하며 악착같이 일을 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사보 수입이 괜찮았는데 근래에는 수입이 좋지 않다. 생활비를 위해 출판사로부터 선금을 받은 후에는 빨리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게 되는데 ‘세상의 빚 중에서 가장 큰 빚이 글빚’ 일거라며 그는 피식 웃는다.
빠듯하게 생활비를 책정해놨는데 그나 서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 예기치 못한 병원비가 들어가고 일을 하지 못해 예산이 구멍나기 때문이다. 전 남편으로부터 양육비를 받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머뭇거리다 양육비를 받기로 했는데 남편이 일하는 곳이 부도가 나서 양육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 전엔 미안했는지 얼마를 보내주더군요. 힘든 상황이어서 못 주는 것이지 주기 싫어서 안주려는 사람은 아녜요. 양육비도 양육비지만 제가 서현이에게 기본적인 것은 해줄 수 있으니, 그것보다 남편이 아이의 아빠로서 행복하게 살아주었으면 싶어요. 그것이 서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아빠노릇인 것 같아요.”
하지만 싱글맘으로 살다 보니 돈이 풍족하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떨쳐내긴 쉽지 않다. 하지만 그에게 돈의 의미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개념은 아니다. 단지 먹고 싶은 거 사먹을 수 있고, 편하게 일할 수 있을 정도면 된다.
“재작년에 포대기로 서현이를 등에 업고 자전거로 이동하다 교통사고가 났어요. 서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데 승용차가 절 받았죠. 다리를 다치고 인대가 파열되는 상처를 입었는데 아무도 달려와줄 사람이 없더라고요. 여동생 부부가 와서 처리를 해줬는데 그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어요.”
엉엉 통곡을 하고 울었다는 그. 하지만 입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입원을 하면 서현이를 돌볼 사람이 없기 때문. 그는 두 달 정도 통원치료를 받으며 홀로 아픈 몸을 추스렸다고 한다. 하지만 싱글맘 신현림은 서현이가 있어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포대기를 두르고 한 몸이 되어/ 자전거를 타면 어디든 갈 것 같지/ 내 몸 속에 번진 너의 체온/ 향기가 퍼지는 구름같이/ 모든 것의 시작을 뜻하지/ 너와 있으면 뭐든 바꿀 수 있고/ 맨날 어미는 다시 태어난다’는 그의 시 싱글맘에는 그의 모성 본능이 절절이 녹아 있다.
신현림씨는 두 가지 굵직한 일을 앞두고 있다. 오는 9월22일부터 10월6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룩스에서 10여 년간 찍어온 사진들을 모아 첫 전시회를 여는 것과 사진산문집 ‘그동안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를 출간하는 것이다. “모두 잘 됐으면 좋겠다”는 그를 보며 진심으로 그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