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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 당선된 무학력의 여성장애인 장향숙

“여성장애인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죽을 때 후회할 것 같아요”

■ 글·최호열 기자 ■ 사진·김형우 기자

입력 2004.05.10 18:39:00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으로 17대 국회에 입성한 국회의원 당선자 장향숙씨.
그는 초등학교 문턱조차 가본 적이 없는 무학력인 데다 소아마비로 인해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지체1급 장애인이다. 그가 내로라하는 정치인과 사회저명인사들을 제치고 열린우리당을 상징하는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에 진출하기까지의 사연.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 당선된 무학력의 여성장애인 장향숙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으로 17대 국회에 입성한 장향숙 당선자(46)는 뜻밖의 인물이다. 대부분 비례대표 1번은 그 당의 정체성을 상징한다는 점 때문에 여야를 막론하고 사회저명인사를 내세우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그는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지체1급 장애인인 데다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에게 낯선 인물인 장향숙씨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4월초 여의도공원에서 그를 만났다. 공원 위로 쏟아지는 봄 햇살의 따뜻함 때문일까, 한창 선거운동 기간이라 휠체어에 의지해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지원유세를 하는 빡빡한 일정에 지쳤을 법도 하건만 그의 얼굴엔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기자가 ‘파격적 공천’이란 표현을 쓰자 단호한 어투로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했다.
“많은 기자들로부터 ‘의외의 인물’이란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 전 이렇게 대답해요. ‘당신들 눈에 내가 안 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여성과 장애인,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던 사람들은 나를 잘 알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그런 나의 역할을 인정한 것’이라고요.”
그의 말처럼 그는 오랫동안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장애인, 특히 여성장애인을 위해 헌신해온 인물로 이번 총선을 앞두고 여성계와 시민단체에서 각 정당에 공천해줄 것을 요구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그는 김해시의 한 농촌마을에서 7년 동안 정신지체장애인 여성을 동네 남자 30여 명이 돌아가면서 성폭행해온 사건을 밝혀내고 이를 사회문제화해서 대책을 마련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22세에 처음 세상에 나온 후 ‘다시는 방안에 들어가지 않겠다’ 결심
1958년 경북 영주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산골마을에서 5남매 가운데 세째로 태어난 그는 생후 1년6개월 만에 고열로 인한 소아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그래서 16세가 될 때까지 방 밖에 나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 언니가 저를 아기처럼 포대기에 싸서 업고 나갔던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두 살 터울인 남동생이 초등학교 들어간 후에 제가 불쌍해 보였던지 저를 업고 개울에 나가 미꾸라지와 가재를 잡아서 보여준 기억도 있고요. 그럴 때 외에는 집 밖을 나가본 적이 없어요.”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세상과 단절된 채 방안에 갇혀 사는 그에게 유일한 벗은 책이었다. 다행히 기독교인인 부모님이 “하나님의 말씀은 알아야 한다”며 국한문 성경책으로 글을 가르쳐 일찍이 글을 깨칠 수 있었다.
“제 안에 알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던 것 같아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으니까요. 동생이 교과서를 가져오면 동생보다도 제가 먼저 다 읽었어요. 언니들 교과서도 제가 먼저 읽었고요. 그러니까 언니와 동생들이 학교에 있는 책을 빌려다주었어요. 나중엔 언니 친구들, 동네 친구들까지 저를 위해 책을 빌려다 주었어요.”
그러던 중 16세 때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가 재산을 정리해 도시로 나온 것이다. 처음엔 아버지가 하던 운수업이 잘 돼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집안 사람들에게는 그때가 가장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시기였지만 저에겐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우선 시골에 있을 때는 자연과 함께 있으니까 영혼이 심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도시는 아스팔트밖에 없고, 눈도 안 오고…. 굉장히 암울한 사춘기를 보냈어요. 그래서 더욱 책에 빠졌던 것 같아요.”
당시 그는 책을 읽다 코피가 터져 책갈피를 적실 정도로 책에 매달렸다. 그때까지 그가 읽은 책이 1만권이 넘었다고 한다.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 당선된 무학력의 여성장애인 장향숙

젊은이들과 새로운 국회의원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향숙씨.


그러다 그에게 인생의 변화가 찾아왔다. 22세 되던 해,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뒤이어 유가가 폭등하면서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것이다. 일순간에 도시빈민이 되어 부산의 달동네로 밀려났다.
“그때 어떤 분이 우리 가족을 위로하러 집에 왔다가 저를 보고는 버려진 휠체어 하나를 주워다 주었어요. 그때 휠체어를 타고 처음으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어요.”
22세에 처음 나온 세상은 충격과 설렘 그 자체였다.
“너무 낯설었죠.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도 불편하고…. 처음엔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러면 다시는 세상에 못 나올 것 같아 의식적으로 더 세상과 가까워지려고 했어요. 방안에 있는 내가 아닌 거리에 있는 나에게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간단하게 산책을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시장골목을 돌아다니는 등 영역을 넓혀나갔다. 주위 지형이 익숙해지는 만큼 사람들의 시선에도 익숙해졌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오가며 살아 움직이는 이 길거리에 섞여 살기로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날, 산책을 하다가 한 수녀를 만났다. 수녀는 그에게 “이 지역에도 장애인들이 많으니 함께 지역장애인모임을 만들어보자”고 권유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장애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장애인운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가 여성장애인문제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것은 31세 때인 89년, 경기도 광주에 있는 장애인직업재활원에서 2년 동안 직업교육을 받으면서였다. 그곳에서 다양한 유형의 수많은 여성장애인들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여성장애인이 이중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여성이기에 취업이 어려운 데다, 장애인이기에 더욱 취업이 어려웠던 것이다.
“직업재활원을 수료한다고 해서 일자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어요. 특히 저 같은 중증장애인은 일자리를 얻기가 불가능했어요. 하지만 노동의 즐거움을 맛본 이상 이전처럼 집에서 책만 보고 있을 수는 없더라고요.”
“제가 욕 안 하고 담배 피우지 않는 17대 국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마침 후배가 수원에 있는 한 복지관의 작업장에서 함께 일하지 않겠냐며 연락을 해왔다. 카 스테레오를 조립하는 일이었는데 일감이 일정하게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이 많을 때는 하루 16시간을 일하기도 하지만 없을 때는 하루 종일 대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곳에서 3달 동안 일했다.
“밤에 야식으로 먹는 컵라면이 얼마나 맛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어요(웃음).”
다시 부산으로 내려온 그는 본격적으로 지역여성장애인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96년엔 ‘황금고리’라는 장학회를 조직해 여성장애인에 대한 교육지원사업을 벌였고, 98년엔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전국조직인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을 조직했다. 또한 여성장애인운동에만 머물지 않고 여성폭력 방지운동, 호주제 폐지, 모성권 보호, 비정규직 노동자문제 등 전체 여성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장애인이 사회운동을 하다 보면 세인들의 삐딱한 시선 때문에 힘든 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렸을 때 그런 말을 들었다면 마음에 상처를 받았겠지만 나이가 드니까 의연히 대처할 수 있더라고요.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무실 임대 문제였어요. 계약을 해지하려는 건물주인들과 많이 싸웠죠. 제가 욕도 잘하거든요(웃음).”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 당선된 무학력의 여성장애인 장향숙

장향숙 당선자는 소외된 계층을 위해 일하겠다고 했다.


96년엔 교통사고로 죽음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얼마나 크게 다쳤던지 사고현장에 온 경찰이 회생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병원으로 옮길 생각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가까스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는데 양쪽 어깨와 무릎이 모두 부러진 것은 물론 내장까지 손상을 입었다는 진단이 나왔다. 병원에서 가족들에게 “죽음을 준비하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세 차례에 걸친 대수술 끝에 살아났다.
그는 죽음의 순간을 19세 때도 겪었다고 한다. 하루는 책을 읽다가 코피가 나기 시작했는데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아도 멈추지 않아 수혈까지 받아야 했다. 그때도 의사가 “죽을 수도 있다”고 말을 했다는 것.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과 내가 이 순간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와요. 죽음 직전까지 간 두 번의 경험이 늘 저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해요. 내가 죽음 앞에 섰을 때 어떤 삶을 살았었나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죠.”
그래서일까, 그는 죽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평생 반려자로 생각한 사람이 있었죠. 그 사람으로부터 프러포즈도 받았어요. 그런데 제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어요. 제가 20대였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서른이 넘으면서 많은 부분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여성장애인을 위한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면 죽을 때 후회가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미래를 포기한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무척 힘든 일이 아닐까.
“당연히 힘들죠. 저도 그런 감정을 제어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고통스러워도 그 고통을 감내해야죠.”
화제를 바꿔 그에게 선거운동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게 뭐냐고 하자 뜻밖에도 “욕을 마음대로 못하고, 담배를 마음 놓고 못 피우는 것”이라고 했다.
“담배는 끊으려고 하는데 과연 그 약속이 지켜질지 모르겠어요. 17대 국회가 저를 담배 피우지 않고, 욕을 안 하게 하는 국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웃음).”
그는 마지막으로 국회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추진하고 싶은 일로 장애인이동권, 자립생활, 문화체육, 차별금지법, 연금법 등을 언급하며 주부들도 장애인문제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피력했다.
“장애인문제는 저 개인만의 생각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장애인들의 생각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국민들도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

여성동아 2004년 5월 4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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