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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Happy Talk

이제 혼자서도 잘해요!

입력 2004.05.04 15:20:00

이제 혼자서도 잘해요!

신문과 방송 등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느라 분주해 보일 뿐 사실 난 참 게으르다. 신혼 여행 때 찍은 사진도 아직까지 정리가 안된 상태로 상자에 담겨 있을 정도니까. 집에서는 도우미 아주머니와 딸에게 온갖 일을 맡기고, 밖에서는 내가 나서야 할 일들에 지인들을 대신 내세우는 편이다. 그러나 스스로 껍질을 깨야 병아리가 될 수 있듯 직접 나서야만 기회도 얻는 법. 이제는 사소한 일들도 직접 챙기고, 곤혹스러운 일이 생겨도 정면 대응해서 하나씩 해결해갈 생각이다. 어려운 문제를 하나씩 스스로 풀어가면 점점 실력이 느는 것처럼, 나 역시 그런 일들을 차근차근 해결해나가다 보면 내공도 쌓이고 인품도 훌륭해지리라.
난참 게으르다. 워낙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서 동분서주할 뿐 천성이 게으르다. 화장실도 가기 귀찮아 참았다 갈 정도고 각종 공과금도 제때 내지 않아 항상 연체료가 붙는다.
고백하자면 결혼한 지 18년이 넘었는데 아직 신혼 여행 때 찍은 사진을 정리하지 않아 커다란 상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휴가 때 날 잡아서 앨범도 정리하고, 서재의 책들도 다시 꽂아야지’ 하고 수차례 다짐하지만 그 때뿐이다. 지금의 직장을 꾸준히 다니는 것도 사표 내고 다른 직장 찾기가 귀찮아서이고, 이혼을 하지 않은 이유도 이혼서류 만들어 법원에 가거나 변호사 만나러 가는 일이 번거롭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딸에게 수시로 각종 심부름을 시킨다.
“유라야. 물 좀 떠올래. 올 때 과자도 갖고 오고, 텔레비전 볼륨 좀 키워라.”
천사처럼 말 잘 듣던 딸아이는 고등학생이 되더니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제발 하나씩 시키거나 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일로 몰아서 시켜줘. 그리고 엄만 왜 나만 부려먹어? 다른 엄마들은 자식 공부하라고 엄마들이 뭐든지 다 해준다던데….”
“이 고물가시대에, 이 바쁜 내가 왜 널 목숨 걸고 낳았겠니? 다 심부름시키려고 낳은 거야. 엄마는 어릴 때부터 말 잘 듣고 심부름 잘하는 딸을 둬서 편하게 사는 게 최고의 꿈이었거든.”
“할머니 건강하셨을 때는 할머니가 뭐든지 다 해주셨잖아. 엄만 꼼짝도 안 하고.”
“그건 내가 복이 많은 팔자라 그래. 뭐든 잘 도와주는 엄마에 심부름 잘 하는 딸을 둔 건 내 팔자야. 넌 일 시키는 엄마를 둔 팔자인 게지.”
집안살림, 육아는 물론 사과, 기도까지 남에게 맡겼던 나
그렇다고 딸만 부려먹는 건 아니다. 각종 대행업체를 적극 활용한다. 일단 살림은 도우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고, 이사는 숟가락 하나까지 정리해주는 포장업체를 이용했으며, 딸이 어릴 때는 친정엄마, 언니, 시누이, 조카 등 여러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엄마가 참석해야 할 자리에 그들을 대신 보냈다.
게을러서 운동도 하지 못한다. 얼마 전 가만히 운동기구에 앉아 있기만 하면 기구가 혼자 알아서 몸의 각 부분을 움직여 운동을 시켜주는 곳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 그런데 기계가 운동을 시켜주는 곳까지는 내 발로 찾아가야 하는 탓에 아직 가지 못하고 있다.
내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도 직접 사과하지 않고 상대방을 잘 아는 지인에게 부탁해 대신 처리하는 경우도 많다.
“선생님, 저 대신 그 분에게 사과의 말을 전해주세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좀 실수를 한 것 같다고요. 직접 대면하기가 껄끄러워서 그래요.”

이제 혼자서도 잘해요!

마흔이 넘어서도 유치한 소녀처럼 정면 대응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비겁한 태도를 취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더 심한 ‘대행’도 시킨다. 교회나 절에 다니는 착실한 신앙인 지인들에게 “저를 위해 기도 좀 해주세요. 저 복 많이 받고 잘 살라고요. 아 참, 우리 딸 좋은 대학에 들어가라고도 기도해주세요” 하며 기도까지 대신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런 한심한 나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주는 착한 이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날 더 부끄럽게 한다.

망설이던 일, 피하고 싶었던 사람도 막상 부딪혀 보면 소중한 인연이 돼
그러던 어느 날 빈둥거리며 책을 읽다가 다음 문장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알을 스스로 깨고 나오면 새가 되지만 남들이 깨주면 프라이가 된다.”
알에서 깨어 나오려면 상당한 노력과 고통이 수반되는 건 당연하다. 일단 적당한 때를 기다려 부화의 시간을 가져야 하고, 부리로 껍질을 쪼아야 하고, 머리도 써야 한다. 마침내 껍질을 깨고 나와서는 낯선 세상에 놀라겠지만 온전한 자기 힘으로 그 알을 깨고 나오면 독수리이건 닭이건 훌륭한 조류가 된다.
반면 누군가 아주 쉽게 톡 깨주면 자신은 알을 깨는 어려움은 겪지 않겠지만 새가 되기는커녕 뜨겁게 달궈진 프라이팬에 올려진 먹음직스러운 프라이가 되는 것이다. 남의 손에 깨지고 남의 입에 쏙 들어가는….
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프라이처럼 살았던가. 내가 직접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해결했으면 얻게 되었을 교훈, 지혜, 포용력 등을 ‘귀찮다’ ‘어려울 거야’ ‘힘들어서 싫어’ 하면서 뿌리쳤다.
어릴 때 직접 몸으로 익힌 운동들은 나이 들어 다시 시작해도 몸이 금세 기억해낸다. 어릴 때 자전거, 스케이트 등을 배운 이들은 중년에 도전해도 금방 익숙해지는데 난 안 된다. 만나기 거북스럽게 여겨지는 사람도 직접 대면해 보면 의외로 상냥하고 장점이 많은데 편견을 갖고 피해서 소중한 만남의 기회를 잃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나 때문에 시달리고 힘들어하고 속상해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래서 난 이제 가능한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도 직접 챙기고, 곤혹스러운 일이 생겨도 정면 대응해서 하나씩 해결해나갈 생각이다. 늘 비겁하게, 치사하게 살아왔던 과거의 게으름과 결별을 선언하고 ‘혼자서도 잘해요’를 노래해야지. ‘이것 좀 해주세요’란 채널은 끄고 ‘내가 해보자’ 채널로 바꿔야지.
물론 모든 것을 내가 다 해내겠다는 과욕을 부릴 생각은 아니다. 그동안 내가 회피했던 일들을 정직하게, 정공법으로, 내 손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하나씩 스스로 풀면 점점 실력이 느는 것처럼, 나 역시 그런 일들을 차근차근 해결해나가다 보면 내공도 쌓이고 인품도 훌륭해지리라. 또 집안 일이며 각종 잡다한 일도 내 손으로 하면 다이어트가 저절로 되지 않을까. 아, 생각만으로도 난 벌써 아름다운 인격에 날렵한 몸을 가진 멋진 사람이 된 것 같다.


여성동아 2004년 5월 4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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