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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음식의 추억

박완서·신경숙 등 유명인 5인이 말하는 ‘가슴 뭉클한 음식 이야기’

메밀칼싹두기·보리밥에 깡된장·산두쌀…

■ 정리·박성은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한길사 제공

2004. 04. 12

음식은 기억이며, 삶이다. 음식은 맛뿐만 아니라 언제 어느때, 누구와, 어떤 기분으로 먹었는지가 아득한 추억이 되고 아쉬움이 된다. ‘음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솔직한 것은 없다’는 유명인사들이 ‘잊을 수 없는 밥 한그릇’에 그 이야기를 담았다.

박완서·신경숙 등 유명인 5인이 말하는 ‘가슴 뭉클한 음식 이야기’

땀흘려 한 그릇씩 먹고 나면 기쁨인지 감사인지 모를 충만감이 왔다.칼싹두기의 소박한 맛에는 이렇듯 각기 외로움 타는 식구들을한 식구로 어우르고 위로하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박완서·신경숙 등 유명인 5인이 말하는 ‘가슴 뭉클한 음식 이야기’

비오는 날이면 요즈음도 나는 수제비가 먹고 싶어진다. 그건 아마 어린 날의 메밀칼싹두기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벽촌의 비오는날의 적막감은 내가 아직 맛보지 못한 그러나 장차 피할 수 없게 될 인생의 원초적인 고독의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랑채 툇마루에 오도카니 앉아있으면 비에 젖어가고 있는 허허벌판과 큰 나무들과 나직한 동산과 몇 채 안 되는 초가지붕과 불어나고 있는 개울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럴 때면 대식구 속에서 귀염받는 어린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핑계만 있으면 울어버리고 싶게 청승스러워지곤 했다. 그런 날은 아마 나뿐 아니라 식구들이 제각기 다들 까닭 없이 위로받고 싶어지는 날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나 엄마 아니면 작은엄마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칼싹두기나 해먹을까 하는 소리가 나왔다.
우리집에서 칼싹두기하면 으레 메밀로 하는 걸로 되어있었다. 밀가루로 하는 칼국수보다 면발이 넓고 두툼하고 짧아서 국수보다는 수제비에 가까웠다. 그건 아마 꼭 그렇게 해야된다는 조리법이 있는 게 아니라 메밀가루가 밀가루보다 덜 차지기 때문에 저절로 그리 되었을 것이다. 마을에서 메밀밭을 따로 본 기억은 없다. 물이 풍부하고 벌이 넓어서 논농사가 주였고 밭농사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텃밭 정도였다. 텃밭에서도 이효석이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다고 절묘하게 표현한 메밀꽃을 본 기억이 없으니 아마 텃밭 머리에서 뒷동산으로 올라가는 척박한 둔덕같은 데다 베갯속이나 별식용으로 조금 심었을 것이다.
메밀가루도 밀가루도 집에서 맷돌에 갈아 체로 친 거였으니까 요새 우리가 먹는 것보다 휠씬 거칠고 빛깔도 희지 않았다. 그 중에도 메밀은 더 누렇고 거뭇거뭇한 티도 많았다. 그걸 적당히 반죽해 다듬이 방망이로 안반에다 밀어서 칼로 썩둑썩둑 썰어서 맹물에 삶아서 약간 걸쭉해진 그 국물과 함께 한 대접씩 퍼담는 것으로 요리 끝이었다. 따로 양념장을 곁들이지도 않고 꾸미를 얹지도 않았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무던하고 구수한 메밀의 순수 그 자체였다. 또한 그때만 해도 한가족끼리도 아래 위 서열에 따라 음식 층하가 없을 수 없는 시대였지만 메밀칼싹두기만은 완벽하게 평등했다. 할아버지 상에 올릴 칼싹두기라고 해서 특별한 꾸미를 얹는 일도 없었지만 양까지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막대접으로 한 대접씩 평등했다. 한 대접으로 출출한 장정이나 머슴은 찬밥을 더 얹어먹으면 될 것이고 한 대접이 벅찬 아이는 배를 두들겨가며 과식을 하게 될 것이나 금방 소화가 되어 얹히는 일이 없었다. 땀 흘려 그걸 한 그릇씩 먹고 나면 뱃속뿐 아니라 마음속까지 훈훈하고 따뜻해지면서 좀전의 고적감은 눈녹듯이 사라지고 이렇게 화목한 집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기쁨인지 감사인지 모를 충만감이 왔다. 칼싹두기의 소박한 맛에는 이렇듯 각기 외로움 타는 식구들을 한식구로 어우르고 위로하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꿩대신 닭이라고 요새도 비오는 날이면 밀가루 수제비라도 먹고 싶어진다지만 같이 먹을 사람이 없으면 수제비를 뜨지 않는다. 나는 단지 내 입맛만을 위한 요리도 즐겨하는 편인데 수제비만은 혼자 먹으려고 해지질 않는다. 내가 잊지 못하는 건 메밀의 맛보다 화해와 위안의 맛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박완서·신경숙 등 유명인 5인이 말하는 ‘가슴 뭉클한 음식 이야기’

보리밥을 깡된장에 비벼먹는데 이 생각 저 생각이 다 났다.아마 그 순간 나는 보리밥을 먹었던 게 아니고어린 시절을 먹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박완서·신경숙 등 유명인 5인이 말하는 ‘가슴 뭉클한 음식 이야기’

마당의 뒷문을 열고 스무 걸음만 걸으면 거기에 텃밭이 있었다. 여름날이면 텃밭에 상추와 아욱과 쑥갓과 무순 등이 항상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풋고추가 달린 고춧대가 자라고 오이덩굴 밑엔 애오이가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고 그 곁엔 보라색 가지가 주렁주렁 달린 가지순도 있었다.
여름날 점심상은 늘 마루에 차려졌다. 엄마는 논에서 돌아오다가 혹은 읍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텃밭에서 상추와 쑥갓과 무잎사귀 등을 푸짐하게 뜯어 윗옷 앞섶에 담아들고 왔다 아직 덜 자란 애오이를 두어개 뚝 따오기도 했고 너무나 싱싱해서 베어물면 매운맛이 혀끝에 쫙 퍼질 것 같은 잘생긴 풋고추가 섞여있는 건 당연했다. 엄마가 뒤꼍의 장꽝에서 된장에 고추장을 떠와 생마늘을 듬성듬성 썰어넣어 쌈장을 만드는 동안 나는 우물에서 그 파란 것들을 씻어 물기가 성성한 것들을 바구니에 담아 마루에 차려진 상 옆에 놓아두었다.
밥상에 올려진 것이라고 해봐야 별것도 없었다. 쌈장과 신김치와 장아찌 정도. 간혹 쌈장 대신 멸치를 넣고 끓인 깡된장에 뚝배기에 담겨 올라온 정도. 여름날이면 언제나 부엌에 보리밥이 가득 담긴 밥바구니가 턱하니 걸려있었는데 그것이 마루의 점심상 곁에 나와있는 정도. 대문 옆에 몇 그루 심어져 있던 감나무 위로 사각사각 지나가는 바람소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저만큼 나른하게 드러누워 인간들이 밥 먹는 꼴을 지켜보는 누렁이 탓이었을까. 아니면 툭 트인 하늘의 흰 뭉게구름 탓이었는지도. 그저 푸성귀만 가득인 점심상이었어도 여름 내내 점심이 참 맛있었다. 엄마가 밥그릇에 보리밥을 펴서 놓아주면 누군가는 상추 위에 깻잎을 얹고 무잎사귀를 또 얹고 쌈장을 얹어 오무려 볼이 미어지게 쌈을 해먹고 또 누군가는 보리밥에 찬물을 말아 그저 담담히 풋고추를 쌈장에 찍어먹고, 그중 달콤한 애오이를 엄마가 집어주면 아삭아삭 깨물어 먹곤 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있으면 어김없이 누군가 마당을 지나갔다. 점심 안했으면 한 숟갈 뜨고 가라고 엄마가 부르는 소리. 왜 엄마는 밥 먹고 가라고 하질 않고 꼭 한숟갈 뜨고 가! 그랬는지. 젓갈장수나 혹은 참외장수, 보따리 옷장사들도 자주 그 점심상에 끼어 들었다. 그들이 대문을 기웃거리면 엄마는 들어오라고 하고는 부엌에 가서 숟가락 젓가락 한 벌을 밥그릇과 챙겨왔다. 식구들이 무릎을 조금씩 당겨 앉고 그 사람이 끼어들곤 했다. 그러고 나면 뭔가 무료하던 점심상 자리가 돌연 활기를 띠었다. 푸성귀가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와 어쩌다 매운 풋고추에 걸린 사람의 하후, 소리와 보리밥에 물을 마는 소리들, 점심을 먹고 나면 지나가던 장수들은 젓갈을 조금 놓고 가기도 하고 참외를 몇 개 내려놓고 가기도 하고 그랬다.
어렸을 때 먹었던 음식을 찾기 시작하는 일은 마흔이 지나서부터인 것 같다. 어렸을 땐 싫어했던 것도 마흔줄에 들어서면 그 냄새와 맛을 용케도 기억해낸다. 가끔 길을 가다보면 보리밥집이 자주 눈에 띄는 것도 보리밥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뜻일 게다. 보리밥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일부러 보리밥집을 찾진 않을 것이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삼청동에 보리밥을 아주 맛있게 하는 집이 있다면서 점심에 데리고 간 적이 있었는데 자리가 없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비좁은 집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깡된장에 보리밥을 비벼먹는 사람들은 대개가 쉰이 넘은 분들이었다. 그 속에 섞여 나 역시 보리밥을 깡된장에 비벼먹는데 이 생각 저 생각이 다 났다. 아마 그 순간 나는 보리밥을 먹었던 게 아니고 어린 시절을 먹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박완서·신경숙 등 유명인 5인이 말하는 ‘가슴 뭉클한 음식 이야기’

그해 가을 소풍가는날 고모가 바나나와 사이다 그리고 새알 초콜릿을 가방에 넣어주신 걸 기억한다.
박완서·신경숙 등 유명인 5인이 말하는 ‘가슴 뭉클한 음식 이야기’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우리 다섯 남매의 나이는 열여섯부터 네 살까지였다. 위로 고등학생 누나와 맨 아래 간신히 걸음마를 시작한 여동생 사이에 아들 셋이 있었고 나는 아들로 막내였다. 슬하에 자식도 없이 일찍 홀로되신 고모는 서울에서 조그만 가게를 하셨는데 부드러운 외모와는 달리 매우 억척스러운 분이셨다. 별명도 영화제목에서 빌려온 ‘또순이’였다. 그 당시에 ‘또순이’ 하면 자립심이 강한 여성을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오빠네 가정이 풍비박산날 것을 염려한 고모는 조카들 중 한 명을 데려다 키우기로 결심했다. 원래는 막내여동생이 ‘스카우트’ 대상이었으나 기차에 올라타서까지 너무 울어대는 바람에 옆에서 배웅하러 나온 내가 졸지에 선택되었다고 들었다. 나는 잘 울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 남매들 중 유일하게 표준말을 구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초등학생인 내가 물건을 배달하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는데 유독 어떤 한 집에만 배달을 가끔 가게 된 사연은 이러하다. 단골손님인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그분도 이북에서 내려온 분이었다. 한눈에도 우리와는 삶의 규모가 달라 보이는 부잣집 사모님이었다. 그분이 어느날 가게에서 노는 나를 보고 유달리 깊은 관심을 보였다. 눈길을 떼지 못할 정도로 무척 귀여워하셨다. 어린 내가 짐작하기에 그분에겐 자식이 없는 것 같았다. 사고로 잃었거나 원래 없었을 것이다. 한번은 고모에게 청하여 나를 그분이 사는 집까지 데려가셨다. 커다란 돌사자가 집앞을 지키고 있는 엄청나게 큰 양옥이었다. 으리으리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집이었다. 겁먹은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나를 탁자에 앉히더니 사이다를 한잔 따라주셨다. 그리고는 인자하게 웃으며 ‘학교 다니는 거 재미있니’ ‘고모님은 잘해주시니’ 등 여러 가지를 물으셨다.
그 뒤로도 아주머니는 여러 차례 나를 집으로 데려가시더니 언제부턴가는 아예 나를 ‘배달소년’으로 임명하셨다. 고모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한번은 저녁이 가까운 시간인데 밥을 먹고 가라고 굳이 권했다. 나는 집에 가서 먹어야한다며 청을 뿌리쳤다. 솔직히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싶지는 않았다. 아주머니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선반에서 내게 무슨 노란 과일을 하나 꺼내주셨다. 바나나였다. 내 평생 처음 먹어보는 바나나였다. 돌아오면서 먹는데 입에서 살살 녹는 맛이었다. 고모에게 남은 껍질을 보이며 ‘나 오늘 바나나 먹었다’고 자랑했더니 빙그레 웃으셨다. 그해 가을 소풍가는 날 고모가 바나나와 사이다, 그리고 새알 초콜릿을 가방에 넣어주신 걸 기억한다.
어느 날 방과후에 고모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평소에 없던 일이었다.
“그 집에서 널 달래는구나.”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널 아주 데려가 키우고 싶대. 엄마아빠가 되겠다는 거지.”
“난 아빠가 있잖아, 고모도 있고.”
고모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차마 하기 힘든 말을 꺼냈다.
“근데 그집 가면 너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을 수 있잖아, 바나나도 매일 먹고.”
나는 고모가 나를 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날 준다고 그랬어?”
“아니, 네 의견이 중요하니까, 너 가고 싶니, 안가고 싶니?”
“배달 가는 건 몰라도 아주 그집 가서 사는 건 이상하지. 내가 왜?”
고모의 얼굴이 환하게 변해갔다.
“그럼 안 간다는 말이지?”
“물론이지.”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그까짓 바나나 안 먹으면 어때?”
그날 밤에 고모랑 나는 그 비싼 바나나를 두 개씩이나 먹었다.
“나 다시는 그 집에 배달 안 갈꺼야”
“왜?”
“이상한 아줌마잖아, 왜 남의 애를 자기애로 만들려고 그래?”
“네가 너무 귀여우니깐 그렇지.”
그날 이후로 나는 더 이상 배달소년이 아니었다. 그 아주머니의 얼굴도 더 이상 보지 못했다. 천장에서는 여전히 쥐들이 붐볐지만 그 소리가 그다지 싫지 않았다. 다락방은 나를 키운 즐거운 상상의 공간이었다. 제사 때 쓰려고 둔 백화수복(청주)을 홀짝홀짝 마시며 나는 스스로 왕자도 되고 거지도 되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편지 사연 중에 바나나와 관련된 일화가 귀에 맴돈다. 입원한 친구가 누워서 바나나 먹는 모습을 보고 나도 다쳤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다는 이야기. 시간이 흘러 지금은 바나나가 지천이다. 값이 너무 싸니까 아이들도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옥수수보다 바나나가 더 싸게 팔릴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어쩌다 바나나를 먹을 때면 그 돌사자 집이 생각난다. 아주머니는 진짜 나를 양자로 삼으려고 했을까. 그때 내가 만약 그 집 양자로 갔으면 그 뒤엔 어떻게 됐을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TV는 사랑을 싣고’ 에 초대 손님으로 나간다면 그 아주머니를 한번 만나고 싶다. 아직 살아 계실까? 그 아주머니에게 꽃다발 대신 바나나를 한바구니 선물하면 아주머니는 무슨 말씀을 하실지 궁금하다.

박완서·신경숙 등 유명인 5인이 말하는 ‘가슴 뭉클한 음식 이야기’

산두쌀 훑던 날, 내가 먹은 것은 소금물에 담가 떫은맛 우려낸 감 몇 알, 그래도 쌀이 생긴다는 생각에 배고프지 않았다.
박완서·신경숙 등 유명인 5인이 말하는 ‘가슴 뭉클한 음식 이야기’

밥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풍경이 떠오른다. 아홉살 겨울에 우리집에 쌀이 떨어졌다. 진짜로 살독에 쌀이 하나도 없어서 빈 독을 열어보면 서늘한 기운이 확 얼굴로 끼쳐왔다. 그것은 정말이다. 쌀이 그득한 쌀독에서는 훈김이 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절망과 희망의 기운이다. 쌀독은 보통 독보다 크고 허리부분이 부풀어 있고 울퉁불퉁하고 매끄럽지 않고 검은빛이 났다. 우리는 그것을 ‘쌀독아지’라고 불렀다.
우리집은 논이 없었다. 논이 없는 집의 가장인 우리 아버지는 논을 마련할 돈을 구하러 제 살던 곳을 떠나 대처를 떠돌았다. 안정적으로 밥을 제공해줄 수 있는 논, 가족의 목숨줄을 마련하기 위해 내 아버지는 그렇게 천지사방을 떠돌고 남은 가족들은 산밭을 일구어 ‘밭벼’를 심었다. 일명 ‘산두쌀’이다. 쌀밥은 먹고 싶은데 논은 없고 그리하여 밭에라도 쌀을 심는 산골사람들. 산두쌀은 논 없는 농촌사람들의 쌀을 구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다. 몸부림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쌀은 모두 논에서만 나는 줄로 알겠지만 쌀은 때로 그렇게 밭에서도 난다.
산두쌀을 거두어들이는 산비탈 밭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아래 들판, 그 황금들녘에서 우마차에 나락더미를 실어나르는 사람들을 나는 그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그 아이들은 일꾼들이 우꾼우꾼하는 들판을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았다. 나락더미 위에서 몸을 굴려 놀아도 되었다. 논이 많은 집 아이들은 어린 시절을 ‘놀이’로만 채워도 좋았다. 그러나 논이 없는 집 아이들은 ‘일’뿐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이 아니라 노동이었다. 밥은 늘 공포였다. 아니다. 밥은 공포가 아니라 밥때가 공포였다. 가난이 공포가 아니라 배고픔이 공포였다. 그런데도 지금에 와서는 그 시절에 하나도 불행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나는 지금도 말할 수 있다. 그때 나, 배는 고팠지만 가난하지 않았다고, 배는 고프지 않지만 가난한 지금에 비한다면.
각설하고, 하여간 산두쌀을 어머니하고 ‘외롭게’ 베어다가 머리에 이어 날라서는 홀태에서 훑었다. 적막한 가을 한낮, 어머니와 홀태에서 산두쌀을 훑던 날, 내가 먹은 것은 땡감 소금물에 담가 떫은 맛 우려낸 감 몇 알. 그래도 곧 쌀이 생긴다는 생각에 산두쌀을 훑는 날은 배고프지 않았다. 쌀독아지에 쌀 그득할 것만 생각해도 배가 불렀다.
산두쌀은 봄이 오기 전 동이 나기 십상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밭에는 산두쌀뿐 아니라 콩도 심어 먹어야 하고 고구마도 심어 먹어야 하고 무, 배추도 심어먹어야 하는데. 그것들의 한귀퉁이에 심은 산두쌀은 그 콩, 그 고구마, 그 무로 밥을 지을 때 아, 이것이 밥이로구나, 여겨지게끔 한주먹씩만 넣어 먹었는데도 그렇게 쉽게 떨어졌다. 고구마는 아직도 ‘겁나게’ 남아있는데 아깝고 아까운 산두쌀은 진짜로 새모이만큼씩만 넣어먹었는데도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게 꼭 누가 훔쳐간 모양으로 없어져 버렸다. 아, 그 서러움이라니.
정월 보름 지나 2월 어느날 맘씨 좋은 ‘봉동할머니’ 댁에서 쌀을 가지러 오라 하였다. 어머니와 호야를 켜들고 양은물동이를 이고 갔다. 봉동할머니 댁은 대나무밭 너머 응달에 있었다. 그날 눈이 왔다. 눈 내리는 어둔 밤길을 양은물동이에 쌀을 담아 이고 오다가 그만 응달에서 미끄러졌다. 어둠 속에서 어느 게 쌀이고 어느 게 눈인지, 손이 곱아서 움직여지지도 않는데 퍼담고 퍼담았다. 땅이 풀릴 무렵, 그러니까, 아침부터 밤까지 고구마만 먹었던 날 나는 그때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내가 쌀을 엎었던 곳에 가서 흙을 파보았다. 쌀은 흔적도 없었다. 참새가 와서 다 주워먹은 것이리라.
씩씩거리며 흙을 파내고 있는 나를‘논 많은 집 아이’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가 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얼굴이 벌개져서 파낸 흙을 다지기라도 하듯이 콩콩 뜀뛰기를 했다. 그 아이도 나를 따라했다. 그 아이는 그날을 기억할까. 왜 내가 그날, 파낸 흙 위에서 뜀뛰기를 했는지를 짐작이나 할까.
[만화가 홍승우] 아버지와 청국장, 음식은 기억이다
박완서·신경숙 등 유명인 5인이 말하는 ‘가슴 뭉클한 음식 이야기’

아버지는 청국장을 드시지 않는다. 사업에 실패하고 여관을 전전할 때 한동안 드셨던 음식이 청국장이다. 음식은 기억이다.
박완서·신경숙 등 유명인 5인이 말하는 ‘가슴 뭉클한 음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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