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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새로운 시작

마약으로 뒤틀렸던 음악인생, 아내 만나 새 삶 찾은 ‘닥터레게’ 김장윤

“아내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도 방황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백경선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4.04.09 16:43:00

90년대 중반 독특한 레게음악으로 인기를 누렸던 그룹 ‘닥터레게’의 리드 보컬 김장윤씨.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와 미스코리아 출신 어머니 등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그가 음악 때문에 가출을 하고, 마약에 손을 대는 등 벼랑 끝 삶을 살다 아내 신수경을 만나 새삶을 찾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
마약으로 뒤틀렸던 음악인생, 아내 만나 새 삶 찾은 ‘닥터레게’ 김장윤

93년, ‘닥터레게’라는 그룹을 결성해 국내에 처음으로 레게음악을 선보였던 가수 김장윤(38). 새로운 음악으로 젊은층의 인기를 끌던 그는 2차례에 걸쳐 마약사범으로 구속되면서 가요계에서 사라졌다. 그가 10년 만에 새 앨범을 들고 가요계에 복귀했다. ‘닥터레게’가 아닌 아내 신수경(32)과 함께.
“지금 제주도에서 살고 있어요. 같은 기획사 소속이었던 아내와 작년에 결혼하면서 곧바로 제주도로 내려갔거든요. 거기서 신학교에 다니고 서귀포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느라 서울엔 가끔씩 올라오고 있어요. 그곳 사람들은 처음엔 내숭을 떠는 줄 알았을 정도로 아주 순수하고 착해요. 그래서 그들과 지내는 게 행복합니다.”
제주생활에 대해 말하는 그의 표정은 밝았다. 마치 아픈 과거의 상처를 제주도에서 치유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김일주씨(71)와 63년 미스코리아 출신인 어머니 김태희씨(61) 사이에서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던 그에게 당연히 그의 부모는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그가 음악을 한다고 했을 때 실망도 컸다.
하지만 그는 중학생이 되면서 밴드를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이태원에 있는 한 클럽에서 뮤직 비디오를 통해 밥 말리를 접하면서 레게음악을 알게 되었고 그 매력에 빠졌다. 그가 음악에 빠져들수록 아버지의 반대 또한 거세졌다.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꿈을 접을 수 없었던 그는 고1 때 가출까지 했다.
“열흘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만 마신 적도 있죠. 그때 너무 배가 고프니까 음식 냄새만 맡아도 배가 부르더라고요. 치킨집 앞에서 냄새를 맡으면서 허기를 채웠어요.”
며칠씩 굶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길에서 신문 한 장을 덮고 자야 했고, 심지어 동성애자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그런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친구들에게조차 연락하지 않았다. 음악을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로 버텼던 것이다.
거리를 전전하다가 쭈그리고 앉아서 잠깐 쉬었던 어느 건물 계단이 마침 음악다방 입구였다. 불쌍해 보였는지 사장은 그를 데려다 잡일을 시키는 대신 거기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얼마후에는 음악DJ 일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윤시내의 ‘공부합시다’가 신청곡으로 들어왔는데, 앨범이 없어서 안되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야 임마 틀라면 틀어야지’라고 적힌 쪽지가 들어오더군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더니 저쪽으로 담임선생님이 보이더라고요.”
그가 가출한 6개월동안 담임선생은 그의 빈 책상 위에 교과서를 펼쳐놓으며 학교의 징계를 막아주었다. 그리고 그를 설득해 다시 집과 학교로 돌아오게 했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아 그 후에도 가출을 반복하였고, 그 때문에 출석 일수가 모자라 학교를 3번이나 옮겨야 했다.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캐나다로, 이스라엘의 키부츠 집단농장으로, 영국으로 떠돌았다. 아버지와 떨어져 있어야 음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마약으로 뒤틀렸던 음악인생, 아내 만나 새 삶 찾은 ‘닥터레게’ 김장윤

최근 새 앨범 ‘ONE’을 발표한 김장윤·신수경 부부.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중학교 때 밴드를 같이 하던 친구들을 불러 모아 ‘닥터레게’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그리고 93년 1집 앨범을 내고 국내 음악팬들에게 레게음악을 선보였다. 당시 대부분의 대중음악 관계자들이 생소한 흑인음악인 레게장르로는 우리나라 가요시장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각종 순위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하니까 그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거만했죠. 제가 최고인 줄 알았어요.”
거만함 때문이었을까, 행운의 여신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한 적이 없던 그에게 창작의 고통은 너무나 컸다. 더 새롭고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괴로워하던 그에게 달콤한 유혹이 찾아왔다. 음악하는 선배가 “다른 세계가 열릴 것”이라며 건네준 것은 마약이었다.
마약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95년 마약사범으로 구속되어 8개월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교도소에 갇혀 있는 동안 가족들 누구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가족들의 외면과 갑자기 전과자가 되어 세상 끝에 몰린 그는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자살을 기도했다. 수건의 실을 빼 끈을 만들어서 목을 맸지만 실패했고, 굶어죽으려고 모든 음식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교도관들이 호스를 통해 억지로 죽을 먹이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삶의 의지를 상실한 채 감방 한 구석에 엎드려 있는데, 교도관들이 햇빛을 봐야 한다며 억지로 저를 끌고 밖으로 나가더군요. 그때 양지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죄수들을 봤어요. 절망 같은 현실 속에서도 살기 위해 바둥대는 그 모습이 감동을 주더군요. 그들을 보며 저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이 일을 계기로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경기도 시흥에 있는 ‘어린 양의 집’ 등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봉사활동을 펼치며 사랑을 베풀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날 마약반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마약검사를 해야 한다는 그들의 말에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따라갔어요. 저는 떳떳했으니까요. 그런데 일주일 뒤 양성 반응이 나왔다며 저를 구속시키더라고요. 그동안 마약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 양성 반응이라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죠. 억울하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는 또다시 실형을 선고 받고 억울한 수감생활을 했다. 그로 인해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의 아버지는 경쟁자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가족마저도 자신의 결백을 믿지 않는 것 같아 원망과 절망에 빠져 있던 그에게 어머니의 편지가 전해졌다. “우린 널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도 널 사랑하신다. 내가 널 사랑하듯이”라는 편지를 읽고 그는 다시 마음을 추슬렀다.
그런데 얼마후 마약을 하지도 않았던 자신이 왜 억울하게 마약 사범으로 끌려오게 됐는지를 알게 되었다. 첫번째 수감생활을 할 때 알게 된 후배가 있었다. 부모가 동반 자살을 해서 고아가 된 것이 딱해 잘해줬고 출감 후에도 곧잘 만나곤 했다. 그런데 후배가 마약 판매를 계속하면서 자신이 경찰에 잡히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3개월 전에 마약을 탄 음료를 김장윤에게 먹였던 것이다. 사회 고위층의 아들인 그를 밀고하고 자신은 빠져 나가려는 음모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후배의 자백으로 김장윤은 구속된 지 1년만에 보석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무죄가 판명된 것은 아니었다. 사건이 대법원에 상고중이었기 때문에 6개월동안 2주에 한번씩 계속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마음고생만 계속 해야 했다.
“1년을 죄 없이 감옥에서 보낸 것도 억울한데, 6개월동안 나를 계속 의심하는 수모를 받으며 재판을 한다는 게 참기 힘들었어요.”

마약으로 뒤틀렸던 음악인생, 아내 만나 새 삶 찾은 ‘닥터레게’ 김장윤

김장윤은 힘들 때 신수경씨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그에게 누구보다 힘이 되어준 사람이 동료가수였던 신수경이었다.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란 노래로 한창 인기를 끌던 신수경은 연예계 활동에 회의를 느껴 갑자기 활동을 중단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4년만에 막 돌아온 상태였다. 두 사람은 우연히 압구정 길거리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당시 신수경은 그녀가 영국으로 간 사이 급변한 사회와 가요시장에 적응하지 못하던 상태였고, 김장윤은 이어지는 재판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예전부터 같은 기획사에 소속되어 알고 있던 처지라 둘은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 그동안 그가 겪었던 방황과 고통들을 듣고 신씨는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그리고 그가 재판을 받으러 갈 때마다 항상 동행했고, 마지막에 무죄 판결을 받을 때도 함께 했다.
“무죄 판결을 받고 같이 울었어요. 그동안의 일들이 파노마라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하지만 억울하단 생각은 버리기로 했어요.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아직도 방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런 고통조차도 가치 있게 느껴지거든요.”
김장윤은 “어려움을 함께한 이 여자야말로 내 모든 걸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자 앞으로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함께해줄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4년의 연애 끝에 지난해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가 이루고 싶은 가장 큰 꿈은 국내 최초로 민간교도소를 설립하는 것이다. ‘교도소가 바로 범죄의 온상’이라는 것을 경험한 그이기에 민간교도소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현재 민간교도소 설립을 적극 추진중인 그는 이를 위해 최근 아내와 함께 ‘ONE’이라는 앨범을 냈다. 그에게 있어 그 앨범 안에 실린 곡들은 바로 희망이다. 그 희망이 자라서 그가 꿈꾸는 일을 이룰 수 있길 바란다.

여성동아 2004년 4월 4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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