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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슬픔도 힘이 된다

비극적 가족사 아픔, 무대 위에서 연기로 승화하는 배우 나자명

■ 글·조득진 기자 ■ 사진·홍중식 기자

입력 2003.12.03 15:04:00

대학로의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는 연극배우 나자명.
연기는 물론 번역에서 각색, 연출까지 다방면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그에겐 그러나 남모를 슬픔이 있다. 우리 현대사의 소용돌이에 휘둘렸던 삶과 상처를 딛고 연극무대에 우뚝 선 그를 만났다.
비극적 가족사 아픔, 무대 위에서 연기로 승화하는 배우 나자명

지난 11월 중순 대학로 학전블루소극장에서는 격정의 무대가 펼쳐졌다. 호주 원주민이 영국의 침략을 받으면서 겪은 아픔의 역사를 다룬 연극 ‘슬픔의 일곱 무대’가 바로 그것. 지난 96년 호주 원주민 출신 작가 웨슬리 이녹스가 직접 연출을 맡아 호주 전국 순회공연을 벌여 화제를 모았던 작품으로, 모노드라마로 진행됐다.
어두운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고, 이어 나타난 배우 나자명(35). 그는 70분에 달하는 공연 시간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을 감당하기엔 작고 가냘퍼 보였다. 그러나 침략에 짓밟힌 역사와 그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처절하고 질박한 삶을 노래하는 호주 원주민 여자로 변한 그는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니었다. 슬퍼 보이는 그의 눈은 때로는 광기로 빛나고 때로는 환희의 절정을 표현했다. 우리네 한 서린 창 같기도 하고, 인디언의 민요 같기도 한 그의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침략과 학살에 의해 사라진 인종의 이야기이지만 아름답게 그리려고 노력했어요. 투쟁과 원한이 아닌, 고통을 극복하는 모습과 ‘우리는 슬프다’는 호소를 보여주고 싶었죠. 배우에겐 무척 소중한, 그래서 관객에게도 아주 볼만한 연극이었어요.”
배우 나자명. 낯선 이름이지만 한국보다 외국에서 활동할 기회가 많았을 뿐, 좋은 작품만 만나면 번역에 각색, 연출, 연기까지 도전해 연극계에서는 ‘작은 거인’으로 통하는 배우다. 지난 94년부터 2년간 런던의 액터스튜디오에서 공부한 후 98년에는 6개월 동안 한국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문부성에서 지원하는 해외예술가 초청연수를 받기도 했고, 그동안 뮤지컬 ‘판타스틱스’, 연극 ‘햄버거에 대한 단상’ ‘쥐’ ‘만두’ ‘지피족’ ‘산씻김’ 등에 출연했다. 외국에선 뮤지컬 ‘캣츠’ ‘코러스라인’ 연극 ‘레드 시스터즈’ ‘슬픔의 일곱 무대’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그가 연극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지난해 동경국제예술제에 초청돼 일본인이 연출한 모노드라마 ‘슬픔의 일곱 무대’의 주연으로 출연하면서부터다. 일찍이 연극 ‘오적’ 일본 공연을 통해 현지 연극계의 호평을 받았던 그는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했다.
“키도 작고 얼굴도 예쁜 편이 아니어서 미인을 원하는 국내 무대에 서지 못하는 이유도 있지만(웃음) 외국 무대에 자주 서는 것은 좋은 대본, 좋은 시스템을 얻어오려는 속셈 때문이에요. 국내에 좋은 작품을 많이 소개하고 싶어서 원작자와 연출가를 졸졸 따라다니다 보니 ‘참 독한 사람이다’ 하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자명(自明)’, 스스로 빛을 내고 싶다
그의 본명은 나미숙. ‘자명’이라는 이름은 어릴 때 집에서 부르던 것으로, 배우가 되면서 예명으로 쓰기 시작했다. 스스로 자(自)에 밝을 명(明). 스스로 빛을 낸다는 뜻.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정했어요. 또 ‘자명’이라는 단어엔 ‘당연한, 바뀌지 않는’이란 뜻도 들어 있죠. 어떤 상황에서도 옳은 것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을 갖고 싶어서요.”
그의 예술적 끼는 아버지로부터 대물림한 것이라고 한다.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생일 때 불현듯 학교로 찾아와 그를 데리고 기차를 타곤 했다. 갯벌, 산, 들녘 등 때묻지 않은 시골로 데리고 가 사진을 찍어주며 그를 자연 속에 노닐게 했다.
“네 자매 중 막내고, 바로 윗언니와 열다섯살이나 터울이 있어서 그런지 아버지는 저를 유독 귀여워하셨죠. 그리고 늘 말씀하셨어요.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빛내는 사람이 되라고.”
바로 윗언니가 1970년대 촉망받던 무용수 나수란. 하지만 그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78년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언니 나수란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군사정권의 감시와 탄압을 받으면서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비극적 가족사 아픔, 무대 위에서 연기로 승화하는 배우 나자명

지난 88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 뒤 ‘캣츠’ ‘코러스라인’ 등 대중 뮤지컬에 출연하기도 했던 그는 최근에는 줄곧 소수 민족과 약자의 설움을 담은 연기를 하고 있다.


“시골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원인도 모르고, 목격자도 없었죠. 더 무서운 것은 그 누구도 죽음의 의문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군사정권 시절이라 그랬던 것 같아요.”
하루 아침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것을 보면서 그의 내면엔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람들과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우울증을 불러왔고, 한때 자살을 꿈꾸기도 했다.
“그때 연극을 만났어요. 조명에 비친 흰 먼지, 상대 배우의 땀 냄새, 거친 호흡 등 정말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죠. 이후 무대는 제 삶의 배경이 되었어요.”
하지만 늘 배고프고 힘겨운 곳이 연극판. 오랜 무명시절을 보내며 ‘연극을 왜 하는가’ 방황도 하고, 마음속 불꽃을 바깥으로 폭발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극은 절대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보면서 예술은 타협하거나 나눌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인간의 권리를 위협하는 바탕에는 뿌리깊은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연극은 사회적 편견을 없애는 작업이죠. 나를 사랑하는 것, 나와 틀린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말이에요.”
많은 예술 장르 중 연극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함이라고. 평소 ‘우주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개성이 강한 그도 무대에 오르며 자신과 타인이 결과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며 안도의 숨을 쉰다고 한다.
그는 내년 2월 연극 ‘레드 시스터스’를 통해 다시 일본 무대에 선다. 이후 이 공연을 한국에서도 선보일 예정. 장기적으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제3세계 작품을 공연한다는 계획이다.
일본 연극계에서 ‘사막에 꽃을 피우는 듯 감동적인 호소력과 흡인력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은 나자명. 환히 웃던 첫 만남, 인터뷰 도중의 흐느낌,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크게 손짓을 하던 마지막 인사까지…. 그는 무대 밖에서도 격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천생 배우’였다.

여성동아 2003년 12월 4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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