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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솔직한 고백

영화배우 김지미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영화같은 사랑과 결혼, 또 한번 이혼을 선택한 이유”

■ 글·구미화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3.12.03 12:02:00

지난해 11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어 화제를 모은 영화배우 김지미가 이혼 후 처음으로 자신의 심경을 드러냈다. 최근 울산 MBC 주최로 마련된 주부 대상 인생특강에 강사로 나서 이종구 박사와의 결혼생활과 이혼을 결심한 이유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것. 그의 인생고백을 지상 중계한다.
영화배우 김지미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영화같은 사랑과 결혼, 또 한번 이혼을 선택한 이유”

출연작 7백여편, 세번의 결혼과 세번의 이혼, 그리고 장안을 떠들썩하게 할 만큼 요란했던 한 번의 연애. 영화배우 김지미(63)는 자신의 이름 앞에 따라붙는 화려한 수식어만큼 연기도 사랑도 누구보다 정열적으로 한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스크린에서 사라진 지도 여러 해 지났고, 나이도 환갑을 넘겼지만 그의 사랑이야기는 여전히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더욱이 지난해 11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남남이 된 심장전문의 이종구 박사(71)가 최근 27세 연하의 사업가와 재혼하고, 나란히 방송에 출연하면서 김지미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그는 이혼 후 딸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오래 머무는 등 언론과의 접촉을 피해왔다.
그런 그가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지난 10월28일, 울산 MBC가 마련한 주부 대상 강연에 강사로 나선 것. ‘김지미의 황혼열차’라는 타이틀이 붙은 그의 강연은 오후 2시로 예정돼 있었으나 12시가 넘어서면서부터 주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부들을 위한 행사였지만 머리가 희끗한 남자 방청객들도 눈에 띄었다. 시계 바늘이 오후 2시를 가리킬 무렵엔 이미 3백개의 객석과 무대 앞에 마련된 보조 의자를 꽉 채우고도 계단조차 빈틈을 찾기 어려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리해 있었다.
마침내 진한 주황색 투피스를 입고, 비슷한 색상의 머플러를 목에 두른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에선 박수와 함께 탄성이 터져나왔다. 환갑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가녀린 몸매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세기의 미녀’라는 수식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키 160cm에 몸무게 50kg, 열일곱 꽃다운 처녀시절의 몸매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무대에 올라 숨을 고른 뒤 마이크를 잡은 그는 “일도 사랑도 열심히 했다. 사실 영화배우로서는 어느 누구보다 노력했기 때문에 이 바쁜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운을 떼고, 사회자 없이 두시간 가까이 자신의 사랑과 결혼생활에 대해 비교적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영화배우 김지미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영화같은 사랑과 결혼, 또 한번 이혼을 선택한 이유”

김지미는 이날 혼자 무대에 서 두시간 가까이 자신의 인생을 담담하게 회고했다.


“제가 올해로 예순세살입니다. 많이 먹었죠? 열일곱살에 배우가 돼서 스무살에 결혼을 하고, 스물한살에 낳은 딸이 지금 마흔두살입니다. 둘째가 서른일곱이고요. 손자 손녀가 여섯명입니다. 저 역시 보통 어머니로 남은 생을 가족들에게 많이 할애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는 자신이 마치 황혼 열차에 탄 기분이라며 “어느새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평범한 어머니, 언니, 동생, 할머니로 돌아온 게 참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열일곱살 여고생이던 1957년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이번 강연의 타이틀 ‘김지미의 황혼열차’는 다름 아닌 그의 데뷔작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지난해 이혼한 이종구 박사와의 만남부터 이별까지 전 과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아 강연 도중 여러 차례 주부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그는 이박사와 얽힌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은 네번이 아닌 세번 결혼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기도 했다.

영화배우 김지미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영화같은 사랑과 결혼, 또 한번 이혼을 선택한 이유”

김지미는 고민 끝에 또 다시 이혼을 선택했지만 가족들이 이해해주기 때문에 행복하고 당당하다고 한다.


“사실은 제가 이종구 박사와 세번째 결혼을 했다고 하면 확실하거든요. 그런데 언론에서는 죽어도 네번이라고 하는 거예요(웃음). 그럼 연애한 것도 결혼인가요? 데이트한 것도 결혼인가요?”
그는 59년 자신이 출연한 ‘산너머 바다 건너’를 연출한 홍성기 감독과 결혼해 첫딸을 낳고, 곧 이혼했다. 그리고 스물세살에 영화배우 최무룡과 재혼했으나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헤어졌다. 그후 76년 가수 나훈아와 숱한 화제를 뿌리며 연애를 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그리고 92년에 이종구 박사와 결혼했으니 결혼은 세번 했다는 것. 강연 중반에 그는 나훈아와의 관계를 “연하의 남자와의 긴 연애”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딸 가진 부모들은 사윗감으로 의사, 판사, 변호사 같은 전문 직을 가진 사람을 선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헤어졌는지 궁금하시겠죠. 직업이 가정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는다는 걸 또 한번 느꼈어요. 제가 쉰두살에 결혼해서 11년간 결혼생활을 했어요. 마지막이 될지 또 있을지 모르겠는데 마지막이어야죠. 솔직히 말해서 이젠 저도 징그럽습니다. 여러분, 부부지간의 문제는 부부 두 사람밖에 모르는 일인데 자꾸 왜 헤어졌냐고 물어보면 이거 참 답답해요. 제가 재판이혼을 하고 그 이튿날 외국으로 떠났는데 주위에서는 못 할 말이 뭐 있냐며 할 얘기 다 하라고 하더라고요. 여러분들도 이 이야기가 가장 궁금하시죠?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해야겠네요.”
그는 어머니가 위독해 찾아간 병원 응급실에서 이박사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캐나다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귀국해 종합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이박사가 어머니의 주치의가 된 것.
“(이박사가) 저희 어머니께 참 잘해줬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3년을 더 사셨는데. 아마도 어머니는 의사 사위를 두면 당신이 더 오래 사실 걸로 생각하셨던 모양이에요. 그가 제게 관심을 보이자 어머니가 저를 자꾸 떠미셨어요. 그 뒤로 7∼8개월 동안 이박사는 사람을 시켜서 아침저녁으로 러브레터를 하루 두장씩 꼭 보냈어요. 외국에 나가도 팩스로 편지를 보냈고요. 열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저도 넘어가고 말았죠.”

결혼초 매달 월급 봉투 받고 감사하며 살았지만 병원 개업하며 마찰 잦아져
결혼 후 그는 화려한 명성과 달리 집안에서는 평범한 주부로 지냈다고 한다. 집에 돌아오면 그저 누군가의 아내이고 어머니일 뿐인데 밖에서처럼 대우받으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피곤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그의 집에는 트로피 하나, 영화 스틸 사진 하나 걸려 있지 않다고 한다.
“공식석상에서는 영화배우지만 집에서는 저도 그저 여자이고 밥하는 아주머니죠. 직접 간장 된장 담그며 모든 음식을 제 손으로 다 했어요.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기대한 것과 달리 실망스러운 점도 있었겠죠.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전 다양한 결혼생활을 하지 않았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전부 예술가하고 사랑을 했습니다. 저희 전남편 홍성기 감독, ‘산너머 바다 건너’ 등 여러 영화를 만드신 분이고, 두번째 남편 최무룡씨는 저 이상으로 여러분이 사랑해주셨던 순수한 예술가입니다. 세번째는, 세번째라고 하면 우습지만 화제를 가장 많이 일으켰던 연하의 남자, 그 사람 대한민국에서 노래 제일 잘하는 가수예요.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내놓아도 제일 잘해요. 그런 분들과 3년, 5년, 2년 이런 식으로 짧게 생활을 했는데 마지막 그 사람과는 앞의 세 사람을 합친 것보다도 더 오래, 11년을 같이 살았어요. 매달 3백50만원이 든 월급봉투를 받았습니다. 나머지는 서로 묻지 않고 모든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생활하기로 했죠. 11년 만에 파탄이 나기는 했지만 한 3년은 감사하며 살았어요. 평생에 월급봉투라는 걸 받아보지 못했으니까요.”
수천만원, 수억원이 오가는 연예계 생활에 비하면 사실 3백50만원이 초라할 수도 있지만 그는 월급봉투를 받아들 때마다 가슴 뭉클해하며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게 그 사람이 한달 동안 노력한 대가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나 3년쯤 지나면서 남편과 관계가 석연치 않다는 걸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결혼 3년째라면 이박사가 강남에서 개업의로 독립하고, 그가 이박사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다. 그는 이박사를 위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강남의 빌딩에 병원을 차리게 하고, 병원을 홍보하기 위해 부부가 나란히 토크쇼에도 출연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 결과 병원은 성업을 이뤘지만 병원이 잘될수록 둘 사이에는 오히려 마찰이 잦아졌다고. 서로 격식을 차리다 보니 풀어버려야 할 불만들을 제때 풀지 못해 두 사람 사이의 골은 깊어만 갔다고 한다.

영화배우 김지미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영화같은 사랑과 결혼, 또 한번 이혼을 선택한 이유”

그는 강연을 마치고 방청석으로 자리를 옮겨 주부들과 사진 촬영을 했다.


“저도 노년에 답답한 게 있으면 옆사람 깨워서 ‘나 지금 가슴이 답답하다’고 털어놓거나 ‘기침이 나니까 물이라도 떠다달라’고 말할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해서 (결혼)하는 걸로 생각했거든요. 애정은 둘째 치고, 편안한 상대가 옆에 있어야겠다는 생각으로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지지고 볶으면서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게 건전한 가정인데 저는 항상 ‘네, 그러세요’ 하며 살았어요. ‘다녀오셨어요’ ‘다녀왔습니다’ ‘나가요’ ‘안녕히 다녀오세요’ 이랬죠. 부부라면 싸움을 하고도 금세 ‘이리 와봐’ 하면서 껴안기도 하고,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큰소리 ‘뻥뻥’ 치고 해야 하는데 격식 차리다보니 거리감만 생기고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분이 ‘저 늦어요’라고 하면 저는 ‘네 알았어요’ 하며 살았다니까요. 저 몹시 피곤하게 살았어요.”
결혼 3년째부터 두 사람 사이에 생긴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도 그가 10년 넘게 결혼생활을 유지했다는 건 사실 좀 놀라웠다. “평생 매 맞을 각오를 하고 나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았다”고 말하던 그가 아닌가.
“이혼을 진작부터 하려고 했죠. 결혼 3년 만에 변화가 찾아오면서 ‘이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용단을 내렸어야 하는데…. 제가 20∼30대였다면 그랬겠죠. 여섯명이나 되는 손자 손녀들도 있는데…. 그냥 ‘사진 액자 속에 둘이 들어앉아 있는 것처럼 살자’ 하고 살았어요. 그러다 뒤늦게 이혼을 한 거죠. 제가 지금까지 한 일에 대해서는 후회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연애를 했다고 야단을 치면 야단을 맞았고, 이혼했다고 공격하면 다 받았어요. 제가 한 일에 대해서는 다 책임을 졌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예요. 최무룡씨와 간통죄로 잡혀들어 가기도 했는데 그 후에 촬영하고 돌아왔더니 대문 앞에 (최무룡씨의) 아이들 네명이 쪼르르 서 있더라고요. 전부 데리고 들어가 키웠어요. 그런 일도 있었는데 제가 못할 게 뭐 있겠어요. 그렇게 후회라고는 해보지 않고 살았는데 요번만은 후회를 했죠. ‘왜 진작 이혼을 하지 않았나’ ‘왜 11년을 끌었나’ 하고요. 함께 자식을 낳은 남편하고도 5년을 살다가 끝을 냈는데 이거 너무 바보 같은 생각을 한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자유롭고 편안해요.”
그는 62년 최무룡과 함께 간통죄로 구속되고 그 다음해 결혼했다. 그는 강연 도중 최무룡과의 일화도 소개했는데 이미 결혼해 세 딸과 아들을 둔 최무룡과 문제를 일으킨 건 “서로 인격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감정이 통하고, 속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편한 상대였기에 후회는 없다고. 그는 뒤늦게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와 형식과 체면을 벗어던진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한다.
“요즘은 굉장히 행복해요. 아침 6시쯤 일어나 신문의 기사와 광고까지 빠짐없이 읽어요.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야 하니까요. 또 혼자 사는 법도 배워야 하고. 잠옷바람에 머리 뒤숭숭한 채로 먹고 싶은 것들 챙겨 먹으며 편안한 자세로 지내니까 이제야 살 것 같아요. 아니 내가 이 좋은 걸 왜 11년씩이나 놓치고 살았나 싶어요. 체면만 생각하고, 틀에 맞춰 사느라 속으로 골병만 들고….”
이렇듯 행복을 만끽하고 있지만 주위에선 여전히 그가 노년에 혼자 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모양이다.
“외롭고 쓸쓸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저녁에 불러내 같이 식사하자는 분들도 많아요. 그래서 동정받으면서 저녁 먹고 돌아오는데 속으로는 제가 행복해서 웃어요. 웃으면서 동정받는 거죠.”
그가 타인의 동정까지도 웃으며 즐길 만큼 당당하고, 행복할 수 있는 건 무엇보다 가족들의 이해와 애정 덕분이라고 한다. 그는 요즘도 출가한 딸을 비롯해 여러 친지들이 머물고 있는 미국을 자주 찾는다. 한번 건너가면 몇 개월씩 머물다 오는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형제, 자식들과 어울리며 그동안 못했던 사랑을 나누며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저는 어머니로서 딸로서 아내로서 최선을 다하고 살았어요. 모든 면에서 그만한 성과가 있었는데 단 한가지가 병신이에요. 가정이 온전치 못했다는 것. 그런데 다행히 자식들이 다 이해해요. ‘어머니 잘하셨어요’ 하니까 참 편안해요. 자식들이 엄마를 끔찍하게 생각해서 ‘고생하고, 편치 않았어도 가족들이 인정을 해주니까 그것이 보람 아니냐’며 용기를 많이 주죠.”
그는 주부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남겼다.
“유명하고, 파워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가정을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오산입니다. 결혼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을 때 가장 편한 상대와 해야 한다는 걸 제가 이 나이가 돼서야 깨달았어요. 집안 좋고, 돈이 많다고 해서 그 집에 딸을 시집 보내려고 하지 마세요. 딸이 불행해져요. 제겐 조카가 서른두명이 있는데 사람 외에 다른 것은 보지 말라고 말해요. 그 사람의 장래에 희망을 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다고요. 완전하게 갖춰진 사람을 만나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지요. 완전하게 갖춰진 것을 얻으려면 그만큼 희생이 필요하니까요.”
대외적인 타이틀이 아닌 순수한 인간끼리 맺어져 격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것. 사랑과 결혼에 있어서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은 그가 찾아낸 결론이었다.

여성동아 2003년 12월 4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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