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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화제

고 정몽헌회장 유지 이어 경영권 사수 나선 현대엘리베이터 회장 현정은

“이제 저는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미망인에서 현대그룹의 회장으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 글·이영래 기자 ■ 사진·김형우 기자

입력 2003.12.03 11:12:00

지난 8월 정몽헌 회장 타계 이후 세간의 관심은 고인의 미망인인 현정은 여사에게로 쏠렸다.
현정은 여사가 정몽헌 회장의 유지를 이어받아 경영 일선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회장 취임은 현대가의 또 다른 분쟁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세간에 화제를 뿌리고 있는
현대그룹의 경영권 분쟁 속에서 ‘국민기업화’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 현정은 회장을 만나보았다.
고 정몽헌회장 유지 이어 경영권 사수 나선 현대엘리베이터 회장 현정은

지난 8월4일 현대그룹의 적통을 이어 대북경협사업을 추진해온 정몽헌 회장이 현대 계동사옥에서 투신 자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세간의 관심은 한때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재계를 호령했던 현대그룹의 경영을 과연 누가 맡게 될 것인지에 쏠렸다.
고 정몽헌 회장은 현정은 여사(48)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다 비보를 듣고 급거 귀국한 큰딸 지이양은 26세, 둘째딸 영이양은 19세, 외아들 영선군(18)은 고교 3학년 재학중으로 모두 너무 어리다. 따라서 처음 경영을 맡을 사람으로 지목된 것은 현정은 여사의 어머니인 김문희 여사(75·용문학원 이사장)였다. 잘 알려진 대로 현정은 여사는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과 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76) 부부의 딸. 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이 노환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터라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9.43%를 가지고 있는 김문희 이사장이 거론된 것이다. 하지만 김문희 이사장이 고령인데다 현대가의 적통을 잇기엔 정통성이 떨어진다는 점 등의 약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일선에 나선 것은 현정은 여사였다. 현정은 여사는 지난 10월21일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으로 취임, 직접 경영에 뛰어들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현대그룹의 지주회사로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을 맡는다는 것은 곧 현대그룹 회장이 된다는 의미다. 현대를 비롯한 삼성, SK, LG 등 국내 4대 재벌가에서 부인이 경영권을 승계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현회장의 행보는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더욱이 며느리들의 대외활동이 전무했던 현대가의 전통적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그의 경영 일선 등장은 충격에 가까웠다.

도와주는 줄 알았던 정상영 명예회장측, 현대그룹 인수 공식 선언
고 정몽헌회장 유지 이어 경영권 사수 나선 현대엘리베이터 회장 현정은

지난 11월12일 도선사에서 고 정몽헌 회장의 백일 탈상제를 마친 현정은 회장은 “남북경협 등 고인이 남긴 큰 뜻을 계승 발전시켜 현대그룹이 재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 1976년 고 정몽헌 회장과 결혼한 현회장은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및 동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페얼리디킨슨 대학원에서 인간개발론을 전공했다. 그러나 걸스카웃 연맹 이사, 대한적십자사 여성봉사 특별자문위원 등을 역임한 것 외에 특별히 기업 경영과 관련한 경험을 쌓은 적은 없었다. 남편의 유지를 이어 현여사가 현대가 경영에 나선 데 대해 동정과 격려의 여론도 많았으나 그 반면 비전문경영인이 세습에 나섰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이래저래 뉴스메이커가 된 그에게 여러 번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1백일 탈상 전에는 어떤 인터뷰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고사했다. 그러나 1백일 탈상을 기다리기도 전, 생각지도 않은 일이 터졌다. 11월초, 현대 엘리베이터의 지분을 사 모으고 있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 시장에선 정상영 KCC 회장측이라고 추측하고 있었으나 섣불리 확신할 수는 없었다. 1백일 탈상 전에 설마 시숙부가 경영권 찬탈을 노리고 M&A에 나서지는 않았으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또 지난 8월, 외국인들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1.48%를 매입, 경영권 유지에 대한 위기론이 떠돌 당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매입해 M&A 논란을 차단시킨 주체가 정상영 회장이었던 탓도 있다.

고 정몽헌회장 유지 이어 경영권 사수 나선 현대엘리베이터 회장 현정은

11월18일 고 정주영·정몽헌 회장의 선영을 찾은 현정은 회장은 시종일관 엄숙한 표정으로 결의대회를 치렀다. 그는 KCC측에서 법적 대응을 해와도 “복안이 있다”며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11월14일 결국 KCC 측은 ‘설마설마’하던 논란에 쐐기를 박듯 결국 현대그룹 인수를 공식 선언했다. 경험이 없고 정씨가 아닌 현회장에게 현대가의 적통을 잇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이유야 어찌됐건 2000년 벌어졌던 현대가 ‘왕자의 난’의 재판을 보는 듯한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날 한 신문의 시사만화에 묘사된 현회장은 “시숙부 당신 천벌 받을 거야” 하며 울면서 쫓겨가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보따리를 안고 아이들을 이끈 채. “삼촌이 도와주는 줄 알았다”는 말에 시장은 두 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탈상도 하기 전 지분을 매입, 조카며느리의 경영권을 찬탈한 것은 너무했다’는 반응과 함께 다른 한쪽에선 ‘시장이란 냉정한 것이다. 경험이 없기 때문에 결국 경영권도 지키지 못한 것 아닌가’하는 반응이 있었다.
결국 현회장이 경영권을 뺏기고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또 한번 극적인 반전이 시작됐다. 현회장측이 비장의 역습을 감행한 것. 지난 11월17일 현회장측은 현대그룹 국민기업화 선언을 했다. 국민주 1천만주를 공모해 유상증자를 통해 현대그룹을 국민기업화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번 국민주 발행이 차질 없이 추진, 증자가 마무리되면 정 명예회장과 KCC측의 지분율은 현 31.25%에서 11.2%로, 범현대가를 포함한 지분도 44.39%에서 15.95%로 각각 낮아진다. 현회장측 지분 역시 28.30%에서 10.17%로 떨어진다. 그러나 우리사주에 신주의 20%가 우선 배정됨에 따라 현회장측 지분은 신주 상장 예정일인 12월19일에는 우리사주 지분 12.81%를 포함, 총 22.98%의 지분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정 명예회장측 지분을 압도하게 된다. 결국 KCC측에 대항, 경영권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공고히 한 셈이다.
현정은 회장은 선언 직후인 11월18일 현대그룹 임직원 2백여명과 함께 고 정주영, 정몽헌 회장의 선영을 찾아 고인들의 유지를 받들어 대북경협사업을 완수하고 현대의 적통을 이어가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경영 경험이 없는 것과 경영 능력이 없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11월19일, 드디어 기자회견을 열어 현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인사말을 통해 “고 정몽헌 회장이 갑자기 떠난 후 안타까운 시선으로 아낌없는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며 사의를 표한 뒤 “지난 반세기 동안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현대그룹은 국민의 신뢰를 자산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가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해온 우리나라 대표 기업입니다. 저희 현대그룹에 기회를 주십시오!” 하며 호소했다. 다음은 기자회견 일문일답.
-갑자기 국민기업화를 선언하게 된 배경은?

“경영권 분쟁 때문이 아니다. 현대그룹을 국민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은 고 정몽헌 회장이 구상했던 것으로 이제야 실천에 옮기게 됐다. 회장님을 잃고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가족들은 현대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그래서 고인의 경영철학을 되돌아보며 경영진과 상의해 결정한 것이다.”



고 정몽헌회장 유지 이어 경영권 사수 나선 현대엘리베이터 회장 현정은

기자회견을 통해 현정은 회장은 대북송금 비자금 등 현대그룹이 범한 과거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한 뒤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현대아산 적자 누적이 상당하고, 대북경협사업은 난항이 예상된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님과 남편 정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겠다. 남북경협은 개인과 회사보다 국가 발전과 미래를 내다보며 해야 하는 일이다. 현대아산은 자체적으로 이익을 내기 위해 금강산 관광 활성화에 노력하고 있고, 개성공단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 현대그룹 현 경영진은 경영악화의 책임이 있다.
“인사문제는 이사회를 통해 결정할 문제다.”
- 현회장에 대해 국민들이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룹 회장으로서의 면모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경험이 없는 것과 경영 능력이 없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나는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사업가와 결혼해 옆에서 보고 배운 게 많다. 정회장께서는 생전에 이미 그룹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했다. 그룹 계열사들이 수익을 내고 있어 문제가 없다.”
-정상영 회장과 최근 연락한 적이 있나? 정몽준 회장 등 다른 형제들의 반응은 어떤가?
“최근 며칠간 뵙지 못했으나 평소 존경하는 경영자이므로 앞으로도 자주 찾아 뵙고 자문을 받겠다. 가족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정상영 회장이 상중에 이미 현회장에게 상속 포기를 강요했다는 말이 있다.
“앞서 말했듯 가족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현정은 회장은 현재의 사태가 가족간 경영권 분쟁으로 비쳐지는 것을 무척 경계하는 듯 국민기업화가 경영권 방어를 위해 내놓은 묘안이 아님을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정상영 회장 등 가족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오후 현정은 회장의 어머니 김문희 여사는 “갑작스럽게 상을 당해 슬프고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저쪽(정상영 명예회장)에서 딸을 불러 상속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현회장이 한때 상속 포기를 검토했으나 주변에서 해운경기도 좋아질 것이고 국가경제도 나아질 것이라며 반대했다. 고민 끝에 상속을 포기하지 않으니까 저쪽에서 화를 낸 것 같다. 정몽헌 회장이 생전에 정 명예회장에게 2백90억원의 부채가 있었는데 49재가 지난 뒤 우선 80억원을 갚았다. 그전에도 정 명예회장측이 자꾸 화를 내는 게 빚을 안 갚을까봐 그러는 줄 알고 빚 일부를 갚았는데, 오히려 그쪽이 더 격노했고 그 이후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대량 매집하기 시작해 일이 커졌다”고 주변 상황에 대해 밝혔다.
국민기업화를 위한 공모주 청약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규모가 워낙 큰데다 투자란 엄연히 수익을 보고 하는 것인데 대북경협사업 등의 사업 전망이 그다지 밝지만은 않기 때문. 또 KCC측의 법정대응을 비롯해 앞으로 그가 헤쳐나가야 할 현안은 너무도 많다. 과연 현정은 회장은 이 모든 고난을 이기고 고인의 유지를 지켜낼 수 있을까? 그의 행보를 지켜볼 일이다.

여성동아 2003년 12월 4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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