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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 따라 길 따라 화필기행 6

‘들꽃길 달빛에 젖어…’

■ 기획·조득진 기자 ■ 글·민병욱 ■ 그림·박수룡

입력 2003.11.04 18:09:00

많은 사람들이 이웃집 마실가듯 해외로 떠나는 요즘, 우리의 산과 강, 들과 바다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려는 이들이 있다. “조국 산천의 위대함 앞에서 글과 그림이 막혀 하릴없이 술만 축냈다”고 고백하는 두 벗 민병욱, 박수룡.
이들이 최근 화필기행 <들꽃길 달빛에 젖어>를 펴냈다. 늦가을 음미할 만한 곳을 발췌해 소개한다.
붓 따라 길 따라  화필기행 6

울퉁불퉁 온 산이 금산이요,그 안에 든 절이 금집이다. 부처님도 금빛이고일렁이는 바다도 금바다다.지는 해를 보는 이도 어느새 금빛으로 물든다
노을이 속절없이 잔을 비워내는데 화백은 일어나 또 길을 떠나자 한다. 한반도 땅 끝, 더는 발 디딜 곳조차 없는 이 간두에서도 방랑벽은 채워지지 않는 것인가. 외톨이 고깃배 위를 가로지른 구름을 태우며 이제 바다로 들어갈 채비를 하는 불덩이에 빼앗겼던 넋과 잔을 화백이 다시 채간다.
전라남도 해남 땅이다. 화가는 그리고 기자는 쓰는 화필기행의 첫 꼭지로 해남을 택한 것은 순전히 풍광 때문이었다. “산과 들과 바다가 고스란히 한눈에 들며 자연과 인공도 멋지게 어우러져 신한국 찬가를 쓰는 데 모자람이 없다”는 화백의 꼬드김에 귀가 솔깃했던 것이다. 그러기로서니 땅끝(북위 34도17분38초)에서의 술 한잔조차 낚아채 갈 줄이야….
그러나 그가 길을 재촉한 이유는 금세 드러났다. 해넘이는 해남군의 자랑처럼 땅끝에서 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게서 다리품을 조금 팔아 달마산(489m) 미황사에 올라 보는 낙조가 바로 천하일품이었다. 공룡의 등뼈 모양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늘어선 달마산, 그걸 숨가쁘게 넘어온 겨울 해가 이내 펼쳐지는 바다로 빠져들기 아쉬운지 사위를 온통 황금빛으로 채색했다. 이러니 울퉁불퉁 온 산이 금산이요, 그 안에 든 절이 금집이다. 부처님도 금빛이고 일렁이는 바다도 금바다다. 지는 해에 물든 기자도, 화백도 온통 금사람이다.
창고 1천개가 들어설 정도의 곡창이라는 뜻을 지녔다는 고천암은 88년 바다 물길을 막는 방조제 완공 후 담수호로 거듭났다. 7백만평 간척지와 2백만평 호수, 거기에 51만평의 갈대밭이 빼곡하게 들어차 자연과 인공의 화려한 앙상블을 이룬다. 황금빛 대와 꽃의 출렁임이 20리 넘게 아득히 뻗어나간 갈대밭은 찾는 이들의 동심과 시심을 지피고 어느새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추억 만들기’ 여행지로 떠올랐다.

happy 700 고지를 적시는 달빛 - 강원도 평창
붓 따라 길 따라  화필기행 6

평생 못 잊을 그 날처럼 달빛이 사람을 적시는 밤,젊은이 역시 제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는다.그 순간에도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는 손에 잡힐 듯 들렸을 것이다…
강원도 평창 길에서 마주친 새로움은 사람에 관한 것이다. 우리 들꽃만을 고집스레 길러 보여주는, 오대산 자락 한국자생식물원의 김창렬 원장이 그다. 처녀치마, 며느리밑씻개, 홀아비꽃대 등 사람명칭 식물원과 낙지다리, 뻐꾹채, 개불알꽃 등 동물이름 식물원을 함께 거닐며 그는 열에 들뜬 듯 우리 풀 우리 꽃 얘기를 한다.
자생식물원에 뿌듯한 마음을 심어놓고 나서면 차로 10분 거리에 월정사가 있다. 일주문을 지나 장쾌하게 뻗은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다시 그를 생각한다. 언젠가 오대산 어느 사찰 스님이 했던 말이 귓전에 맴돈다. 죽음은 호수요, 삶은 그 호수 위에 이는 작은 물방울과 같은 것이니….
그 작은 물방울 같은 삶을 어떻게 사느냐를 놓고 우린 매일 티격태격이다. 풀 심고 꽃 가꾸며 수천수억 개체와 더불어 사는 김원장의 식물나라 정치가 인간세계 정치보다 좋으면 좋았지 못할 게 없는데도 우린 그런 삶을 너무 쉽게 잊고 있다. 전나무 숲을 거닐며 절로 옷깃을 여미는 것은 숲을 돌아 흐르는 계곡 물이 뿜어내는 서늘한 기운 탓만은 아닐 것이다.
오대산 동대(東臺)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절을 지어 월정사라 했다던가. 찌를 듯 날카로운 기암으로 이루어진 설악산과 달리 듬직한 육산, 오대산이 품어주어서인지 고즈넉한 안온감을 준다. 중국의 오대산처럼 여기도 문수보살 등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라는데 불사에 문외한인 기자의 눈에도 둥근 덕이 절을 감싸안은 듯 편안하다.
달빛 이야기라면 평창이 자랑하는 작가, 가산 이효석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소설 은 달밤에 흐드러진 메밀꽃밭을 지나 다음 장터로 이동하는 장돌뱅이의 인생유전을 그렸다. 대화까지는 팔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한다.
평창군은 전체 면적의 65%가 해발 700m 이상 고지대다. 대개 700m 지점은 고기압과 저기압이 만나는 곳으로 사람 살기에 가장 쾌적한 위치라고 한다. 군민들은 그래서 자신들을 ‘해피(happy) 700의 주민’이라고 부른다. 거기에 달빛이 쏟아진다. 그리고 가슴을 적신다.

붓 따라 길 따라  화필기행 6

강변 모텔에 누워도 달빛은 떠나갈 줄을 모른다.방안 가득히 차앉은 달빛이 스산해 창문을 열면강바람에 쓸리는 대숲의 속삭임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해질녘 그곳에서는 마른 돌이끼 냄새가 난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래밭을 시샘한 것일까, 석양을 품은 초록 강이 황금 비단을 두른 양 출렁인다. 어스름 땅거미가 지기 전, 마을에선 저녁밥 짓는 연기가 산자락을 애무하듯 휘돌며 올라간다. 콧등을 간질이며 날아가는 연기를 잡으려고 몸을 솟구는 강아지의 뜀질이 풋, 웃음을 자아낸다.
정다운 풍경에 넋을 앗긴 나그네의 코에 와 닿는 건 매캐한 연기가 아니다. 슬금슬금 가슴을 적셔오는 주체 못할 그리움이다. 누른 숭늉이나 곰삭은 젓갈 맛 같기도 하고 또는 그 둘이 합쳐진 듯도 한 옛 시골집 냄새….
경상남도 하동 땅에 섰다. 버스는 하동읍을 출발한 지 불과 2분도 안돼 왼쪽으로 섬진강을 만난다. 전라도 광양으로 나가는 낡은 인도교 밑에 비취빛 물과 은빛 모래밭을 굽어보며 어우러진 솔밭이 한눈에 든다. 먼 옛날 신라와 백제의 사신들이 모여 담판을 짓기도 했다는 곳이다. 하늘을 찌르는 소나무 7백여 그루가 2천평 가량의 터에 빽빽하다. 맑은 강 흰 모래톱에 늘푸른 송림이니 그야말로 섬진청류(蟾津淸流)에 백사청송(白沙靑松)이다. 자연과 기개가 뒤엉킨 그곳에선 정치꾼들의 소소한 싸움박질이나 작은 사연에 애면글면하는 일상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광평송림에서부터 악양 평사리를 거쳐 화개장터로 가는 국도 19번은 섬진강을 따라 달리는 길이다. 봄부터 늦가을까지는 강 안 이곳 저곳에 어부와 아낙들이 점점이 서서 재첩을 잡거나 은어 낚시를 한다. 무릎까지 물이 차는 여울에선 베잠방 차림에 릴을 감는 낚시꾼이 한가롭고, 가슴까지 올라오는 물속에서 아낙들은 거룻배 옆 붉은 플라스틱 들통에 열심히 재첩을 주워 담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찬바람이 뺨을 치는 요즘 어부나 아낙네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강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심히 제 길을 간다.

원림 정자에 스민 풍류가객의 혼 - 전남 담양
붓 따라 길 따라  화필기행 6

정자는 나와 달과 청풍과 강산이 하나 되는 매개체요 접점이다.내가 곧 달이고 청풍이며 강산이니 도대체 한 점 꾸밈이 있을 리 없다.사방에 보이는 것은 오직 강산의 형형색색,마음이야 한껏 여유롭지 않겠는가.
원림(園林)과 정자의 고향. 한잔 술에 겨워 바람과 달과 강을 노래하는 땅. 대나무 소나무 배롱나무에 메타세쿼이아까지, 온갖 나무들이 세상의 번잡을 싱긋 웃으며 둘러쳐 앉히는 곳. 전남 담양의 겨울은 뭘로 감싸지 않더라도 그냥 푸근한 느낌을 준다.
사실 소쇄원을 찾기 전 식영정(息影亭)에서 우리는 이미 주눅들었다. 그림자도 쉬는 정자라니, 그 멋들어진 이름에 기가 죽고 광주호를 내려보며 무등산을 건너보는 절경에 넋을 잃었다. 한사코 자기를 쫓아다니는 그림자마저 예선 쉰다니…. 아, 옛 선비들은 몸을 쉰다 함은 명리까지 철저히 쉬는 것임을 어쩌면 이처럼 명쾌하게 밝혀놓았더란 말인가.
지금 식영정 밑으로는 887번 지방도로가 달리고 그 아래 광주호가 출렁인다. 하지만 4백여년 전에는 석병풍이 둘러쳐지고 화사하게 붉은 목백일홍(자미·紫薇) 사이로 개울이 흘렀던 모양이다. 백일홍 꽃잎이 여울을 발갛게 물들인다 하여 자미탄이라 했는데 석병풍과 자미탄은 76년 광주호 축조공사 때 매몰됐다. 매몰이란 용어를 써버리니 일대 경관이 완전히 망가진 것처럼 들릴지 모르나 석병풍 자미탄이 없음에도 이곳 경치는 일품이다.
면앙정 식영정을 거쳐 조선조 정자문화에 대한 예비지식을 갖춘 다음 소쇄원을 찾았음에도 거기가 주는 충격은 몸이 떨릴 정도로 시리다. 20∼30m 높이의 왕대 숲을 지날 때부터 물씬 남도의 정취에 젖는가 싶더니 그 푸르름이 언제 있었냐는 듯 연한 황토색 흙담장과 마주치게 된다. 바로 소쇄원 입구다.
원림 정자 순례를 마치고 담양읍내로 들어오는 길에 관방제림의 울울한 나무군과 맞닥뜨렸다. 300∼400년씩 된 팽나무 느티나무 군락이 1.5km나 늘어섰는데, 소쇄원 계곡 맑은 물에 씻은 마음인데도 아련한 그리움에 움칫 떨리는 것을 나는 어쩌지 못했다.



붓 따라 길 따라  화필기행 6

일만이천 봉우리 중 천분의 일이나 보았을까.그런데도 마음이 이처럼 둥둥 뜨니감춰진 속살 모두를 다 본다면 과연 또 무엇을 느낄런가.

누가 물은 다투지 않는다고 했는가. 너럭바위를 타고 쏜살같이 내려가다, 떨어지지 않으려 바둥대는니 차라리 뛰어내려 산산이 부서지는 물보라를 보라. 다투어 쏟아지는 그 장렬함에도 산도 놀라 일곱 색깔 무지개를 걸어주지 않는가.
금강산 일만이천봉, 그 중에서도 계곡경치가 으뜸인 외금강 구룡연 코스는 요즘 아우성이다. 앙지다리를 건너자마자 헉, 숨막히게 길을 막은 세존봉의 깎아지른 절벽과 마주보는 옥류봉 자락에 단풍이 붉게 타올랐다. 운보의 바보 산수화에서나 보았던 소나무들은 단풍 빛이 눈부신지 한발씩 비켜 앉았다.
요즘 금강산 계곡에 넘쳐나는 건 물이다. ‘풍악(楓樂)’이란 가을 이름에 맞게 단풍이 익고, 거기에만 하늘은 흰구름을 띄우는데, 그걸로 모자랐는지 차고 넘치는 물이 수천 수만의 퍼포먼스를 이루어낸다.
땀을 뚝뚝 흘리며 겨우 상팔담을 내려다보는 구룡대에 올라서야 숨을 고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번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백길 낭떠러지 밑으로 펼쳐지는 기묘한 풍광…. 여인의 가슴팍 같은 산을 빙그르르 에워싸고 여덟개의 푸른 보석이 목걸이처럼 둘러쳐졌다. 그냥 푸르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살을 벨 듯 시리게 보이는 여덟개의 돌확 연못은 여인의 홍조처럼 빨간 뾰족산 단풍과 대비돼 가슴에 쿵쿵 부닥쳐온다.
삼일포는 외금강과는 또 다른 마력을 지녔다. 강릉 경포대, 양양 낙산사 등과 함께 관동8경으로 유명한 절경답게 산과 호수와 섬, 나무와 바위의 조화가 일품이다. 비로봉, 옥녀봉에서 동쪽으로 밀려 내려오는 외금강과 고성평야, 그리고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도 출중해 삼일포를 내려보는 봉래대 위에 서면 신선이라도 된 듯 흥이 절로 인다.
허가받아야만 오는 땅, 금강산. 문득 그리움이 세차게 밀려든다. 삼일포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등에 업고 외금강 봉우리들을 눈에 넣을 듯 쳐다보며 그 이름을 나직이 외워본다. 남측 관광객들은 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느라 정신이 없다.

풍류가 흐르는 강, 영험이 깃든 산 - 경남 밀양
붓 따라 길 따라  화필기행 6

바람결 풍경 소리에 마음은 한없이 산사 주변을 떠돈다. 창문을 여니 운무가 맞배지붕을 누를 듯 내려앉고 있다. 석등에서 나온 가물가물한 빛이 그런 운무와 어울려 무지개처럼 절을 감싼다.
바람이 풍경(風磬)을 울리는가, 아니면 풍경이 바람을 부르는가. 산속 요사채에서 맞는 밤은 그야말로 청아하다. 먼 듯 가까운 듯 나무들이 울고 계곡이 우릉대는 소리 또한 낮고 중후한 배경음으로 깔린다.
찰그랑거리는 풍경 소리에 마음의 티끌이 털려 나간다. 어쩌다 신발 끄는 소리라도 들린 듯싶어 문을 열면 바람만 가볍게 문풍지를 간질이고 있다. 졸졸대는 약수터 옆 돌계단을 지나 대광전 이르는 길에 밝혀놓은 보라색 불빛도 어슴푸레하다. 객의 마음은 벌써 명징의 세계로 달려간다.
산의 이름은 재약산, 절은 표충사다. 산에 덮인 풀이 모두 약초요, 흐르는 물 또한 약수란 뜻에서 재약(載藥)이란 이름을 얻었다. 원래 죽림사, 영정사로 명명됐던 절은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승병을 이끌어 왜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사명당 송운대사의 사당(祠堂)을 이곳으로 옮기며 표충사란 이름을 갖게 됐다.
굵은 빗줄기 소리에 잠이 깨었다. 표충사 경내 37개 누·전·각·당의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와 처마를 타고 내리는 낙수 소리…. 가람 전체를 휘감은 대나무밭을 어루고 핥으며 내려앉는 비에 후드득 놀라 떠는 댓잎의 탄식…. 이 모든 것이 잘 짜인 오케스트라처럼 어우러진다. 멍이 풀리듯 시원한 가슴을 헤집고 새벽 예불을 드리는 스님들의 목탁소리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진다.
표충사를 나와 삼랑진읍으로 내려갔다가 왼쪽 산길로 꺾어 30여분을 올라가 만난 것은 경이, 그 자체였다.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가는 고부랑 산길이 지겹게 느껴질 무렵 느닷없이 숲이 어느 순간 뚝 끊기더니 크고 작은 물고기 형태의 검은 돌밭이 한눈에 가득히 들어왔다.
만어산의 불영경석이다. 수천 수만 개의 돌이 하나같이 머리를 바싹 쳐들었다. 산 위에서 울리는 소리를 귀담아들으려는 모양 같기도 하고 숨이 막혀 빠져나와 하늘로 치솟으려 발버둥 치는 모습 같기도 하다. 만어산 정상께부터 중턱까지 약 100m. 울퉁불퉁 뻗어나간 바위는 온갖 형상의 박제 물고기를 산 가득 심어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돌은 두드려보면 경쇠소리가 난다. 돌 하나하나가 다 고개를 치켜든 것도 신기한데 몸에선 쇳소리가 나니 문득 이 돌들이 모두 살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인다. 말로는 도무지 설명이 불가능한 어떤 신비를 만났을 때의 떨림이 뱃속 깊숙이 전해진다.

여성동아 2003년 11월 4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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