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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체 두 아들 보살피며 난소암 투병중인 윤인숙씨 딱한 사연

■ 기획·최호열 기자 ■ 글·안소희 ■ 사진·정경진

입력 2003.10.02 16:16:00

정신지체로 사회생활이 어려운 남편과 역시 정신지체를 앓는 두 아들 뒷바라지로 평생 고달픈 삶을 살아온 윤인숙씨는 지난해 2월, 난소암 3기 판정을 받고 투병중이다.
가족의 보살핌 없이 외롭게 병마와 싸우고 있는 윤씨의 딱한 사연.
정신지체 두 아들 보살피며 난소암 투병중인 윤인숙씨 딱한 사연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은 물론 눈썹까지 모두 빠져버린 채 희미한 미소로 첫인사를 건네는 윤인숙씨(44).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왔건만, 마냥 곱고 해맑은 모습이다.
“처음 병명을 들었을 때는 그냥 (치료를) 포기하려고 했어요. 아이들한테 빚만 남기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뿐인가요.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치며 여기까지 온 세월이 서럽고 지긋지긋해서 이제는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녀가 처음 난소암 3기 진단을 받은 것은 지난해 2월. 그때까지 3개월이 넘도록 정말 까무라칠 것만 같은 통증에 시달렸지만 직장을 다녀야 했기에 진통제에 의지해 고통을 참았다. 그렇듯 이를 악물고 버텨온 인숙씨도 암이라는 의사의 말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가족처럼 지내오던 교회 식구들이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찾아보면 반드시 길이 있을 것이라는 말에 인숙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아들 진광이(19)와 은광이(15)에게 아직 엄마의 손길이 절실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죽음조차도 사치라고 느껴졌다.
은광이와 진광이는 어려서부터 지능이 낮아 정규 교육과정을 소화할 수 없었다. 특수학교에서 수준에 맞는 적절한 전문교육을 받아야했지만 그날그날 먹고사는 일을 걱정해야 하는 인숙씨에겐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일반학교 특수반에 편입되어 진광이는 고교 졸업반, 은광이는 중학교 2학년이지만 읽고 쓰기도 제대로 못한다. 특수반이라고는 해도 다양한 신체장애아와 정신장애아들을 함께 교육하는 수업방식이 은광이와 진광이에게 적절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란 기대하기 어려운 일.
그 때문인지 은광이와 진광이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인지능력이 떨어진다. 지금 엄마 인숙씨가 얼마나 큰 병을 앓고 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와 같은 정신연령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아이들 얼굴을 보며 다시 한번 모질게 마음을 먹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도움을 청했어요. 당장 필요한 수술비는커녕 입원비도 없었지만 주위 분들이 참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병원 선생님들도 도와주시고 낯모르는 분들도 어찌나 고마우신 분들이 많은지….”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지난해 2월부터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난소암은 난소에 악성종양이 생겨 점차 퍼져나가는 것으로, 흔히 복막으로 전이돼 복수가 차오르게 된다. 난소암 3기에 접어든 인숙씨가 옆구리에 통증을 느낀 것은 바로 복막에 복수가 고였기 때문. 일단 복수를 빼낸 후 난소와 자궁을 적출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는 15차례가 넘게 입원하여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다. 몸속에 남아 있는 암세포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보통 3∼4주에 한번 1주일 정도 입원하여 항암치료를 한다. 혈관을 통해 항암제를 투여하는데 약이 어찌나 독한지 혈관이 약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기 일쑤다. 그러면 다른 혈관을 찾아야 하는데 인숙씨는 2년 가까이 치료를 받다 보니 혈관을 찾기가 어려워 한참이나 씨름해야 한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도 인숙씨는 얼굴이 하얘져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약 기운 때문에 구토를 계속하는데 먹은 것이 없어 노란 위액만 나올 뿐이다. 아이들 아빠가 간병해주면 조금 낫지 않겠냐는 질문에 인숙씨는 힘없이 웃는다.
“아이들 아빠요?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가장노릇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에요. 지난 세월동안, 한때는 좋아질 거라는 기대도 했지만 결국 어리석은 바람이었어요.”

정신지체 두 아들 보살피며 난소암 투병중인 윤인숙씨 딱한 사연

윤씨는 암투병 중에도 두 아들 생각에 목이 메인다.


인숙씨가 남편 장상룡씨(46)를 만나 결혼한 것은 20년 전. 상룡씨는 지능이 낮고 언어장애가 있었지만 고아로 자라 초등학교도 다녀보지 못한 상룡씨를 늘 안쓰럽게 생각했던 인숙씨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결심했다. 사랑과 노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결혼 후 상룡씨는 몇 개월 동안 소식을 끊은 채 부랑자처럼 지내다가 들어오기 일쑤였다.
그래도 인숙씨는 남편이 아이를 낳으면 책임감이 생기리라 믿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남편은 변함이 없었다. 하루는 인숙씨가 포장마차를 하며 푼푼이 모아둔 동전단지를 몰래 들고나가 도박으로 날려버리기도 했다. 가정을 꾸려가야 할 책임은 고스란히 인숙씨의 몫으로 돌아왔다.
“식당일, 파출부, 도배일, 포장마차… 안해본 일이 없어요. 저도 철이 없어서 그 나이 먹도록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었지만 당장 아이들이 굶는데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있나요? 아이들이 어릴 땐 일하기가 쉽지 않았죠. 우리 진광이 은광이랑 한겨울에 길바닥에 나앉은 때도 있었어요. 어릴 때 제대로 못 먹이고 못 입혀서 커서도 애들이 저렇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져요.”

정신지체 앓는 두 아들 두고 죽을 수 없다고 마음 다져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다 인숙씨는 작은 가구공장에 취직해 자리를 잡았다. 60만원도 채 안되는 월급이었지만 10년 넘게 근속하며 비록 비닐하우스로 만든 집이지만 마음 편한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집앞 텃밭에서 먹을거리를 길러 먹고 쌀은 교회에서 얻고 아이들 옷가지며 학용품도 주변에서 얻어 생활했다. 그래도 잠시나마 ‘희망’을 꿈꾸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작은 ‘희망’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일까? 난소암 수술과 치료비로 들어간 돈만 3천만원이 넘고 오로지 인숙씨의 노동으로 연명하던 생계는 고스란히 빚으로 남아 현재는 4천만원이나 된다. 앞으로 꾸준히 받아야 할 항암치료비 또한 1회에 2백만원이 넘어 언제까지 치료를 계속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렇지만 벼랑 끝에 선 인숙씨에게 희망은 생각지 않은 곳에서 의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얼굴 모르는 사람들의 도움이 바로 그것. 교회식구들도 자기 일처럼 인숙씨와 아이들 뒷바라지에 나섰고 동네 태권도 관장은 몇년째 진광이에게 무료로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정부의 생계비지원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프기 전에는 솔직히 매일 도망가고 싶었어요. 제 한몸 편하게 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저에게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소원이 있다면 우리 진광이 은광이도 남을 도우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선 제겐 아직 할 일이 있는 거죠.”
고통에 신음하며 등을 새우처럼 구부린 채 연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고 두 손을 꼭 쥐며 말하는 인숙씨. 시련 속에서 건져올린 그녀의 희망이 이대로 사그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여성동아 2003년 10월 4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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