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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가출하고 할머니는 한쪽 눈이 실명 직전, 소아당뇨 앓는 일곱살 슬기의 딱한 사정

■ 기획·최호열 기자 ■ 글·안소희 ■ 사진·정경진

입력 2003.08.29 17:34:00

아빠의 가출, 엄마의 재혼으로 부모와 연락이 끊긴 채 4년째 할머니와 살고 있는 일곱살 슬기는 소아당뇨를 앓고 있다. 그러나 할머니 혼자 어렵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형편이라 치료비는 커녕 생활비조차 감당하기 힘겨운 상황이다. 게다가 할머니마저 심한 스트레스로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벼랑 끝에 선 슬기네 가족의 절박한 사연.
아빠는 가출하고 할머니는 한쪽 눈이 실명 직전, 소아당뇨 앓는 일곱살 슬기의 딱한 사정

소아당뇨를 앓는 슬기와 한쪽 시력을 잃어가는 할머니 정석순씨.


슬기(7)가 오빠 국석이(10)와 함께 할머니에게 맡겨진 것은 4년 전이다. 가정불화로 부모가 이혼한 후 처음 1년 동안은 외가에서 지냈지만 엄마가 재혼을 하면서 친할머니인 정석순씨(66)가 남매를 맡게 된 것이다.
“평생 혼자 두 아들을 키웠는데 이제는 슬기와 국석이가 제가 거두어야 할 몫인가 봅니다.”
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노름과 여색에 빠져 집안을 돌보지 않는 남편과 이혼하고 두 아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 혼자 몸으로 가진 것 없이 파출부에서부터 시장좌판, 행상까지 안 해본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두 아들을 키웠다. 그러나 하늘은 그렇게 소중하게 키운 할머니의 희망을 꺾어버렸다. 둘째아들이 28세 되던 해, 교통사고로 할머니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게다가 맏아들(41)조차 정씨의 속을 태우고 있다. 명문대를 나온 장남은 졸업 후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댔지만 하는 일마다 제대로 풀리질 않았다. 급기야 거듭된 실패로 실의에 빠진 그는 부인과 이혼하고 남매를 부인에게 맡긴 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소식 끊긴 지 3년 만에 집으로 전화 한통 했습디다. 아이들 잘 부탁한다고.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니 잘 먹고 잘 잔다고 하면서 한참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그냥 끊었어요. 못난 자식이라 괘씸하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너무 불쌍해요.”
할머니는 전화선 너머로 들리던 쇳소리 같은 아들의 목소리가 몇날며칠 귓가를 떠나지 않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빠는 생사를 알 수 없고 엄마도 재혼 후 연락을 끊어버려 슬기와 국석이의 양육은 오롯이 정석순 할머니의 몫으로 남았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근근이 생계를 잇는 할머니 혼자 몸으로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나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은 할머니의 또 다른 희망이 되어주었다. 남매는 말썽 한번 피우지 않고 건강하게 자랐다.
그러나 지난 6월 할머니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학교에서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슬기가 소아당뇨로 밝혀진 것이다. 소아당뇨는 거의 완치가 불가능하며 평생 당뇨병을 안고 살아야 한다. 당뇨병이란 혈액 속의 당분(포도당)이 몸에 정상적으로 축적되지 못하고 배설되거나 혈액 속에 과다축적됨으로써 아무리 많은 양의 식사를 해도 충분한 영양공급이 되지 못하는 병이다. 그 자체로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병이며 특히 신장질환, 실명, 소화기계통 질환 등 무서운 합병증을 수반하는 병이다.
“담임선생의 전화로 슬기의 병명을 처음 들었어요. 전화기를 붙들고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죠. 그 불쌍한 것이 평생 고칠 수도 없는 병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니…. 시집은 갈 수 있을지, 그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이런 걱정을 해야 한다는 게 너무 가슴 아파요.”

길거리에 나앉을 위기 치료비 마련 막막하기만
할머니는 검사결과가 믿어지지 않아 몇군데 병원을 들러보았지만 서둘러 큰 병원으로 가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당장 입원시키라는데 돈이 있어야지. 동네 미장원 젊은이한테서 겨우 20만원을 빌려서 일단 입원부터 시켰죠. 그땐 체면이고 뭐고 아무 의사 선생님이나 붙잡고 사정했어요. 그랬더니 고마우신 분들이 입원비를 면해주지 뭡니까. 정말 그때 고마운 마음은 뭐라 말로 할 수가 없어요.”
슬기는 1주일간 입원해서 식이요법, 혈당수치검사, 인슐린 투여법 등 당뇨병 치료를 위한 생활수칙을 익혔다. 입원해 있는 동안 할머니는 병원과 집을 오가며 두 남매의 아침저녁을 챙겨주고 자신은 점심을 굶고 다녔다. 밥 한끼 사먹을 돈도 주머니에 없었기 때문이다.
퇴원 후 슬기는 식이요법, 하루 두번의 인슐린 주사투여 등 당뇨병 치료과정을 의젓하게 잘 따르고 있다. 오빠 국석이 또한 동생 앞에서는 함부로 먹을 것 얘기를 하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런 모습이다. 하지만 앞으로 슬기의 당뇨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얼마의 돈이 필요할지 모른다. 꾸준히 들어가는 약값만 한달에 20만∼30만원이고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처럼 갑자기 언제 위험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빠는 가출하고 할머니는 한쪽 눈이 실명 직전, 소아당뇨 앓는 일곱살 슬기의 딱한 사정

정씨는 손녀 생각만 하면 마음이 답답해 눈물을 쏟곤 한다.


그러나 할머니 혼자 운영하는 작은 식당은 불경기 탓에 손님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얻어 쓴 빚도 8백만원이 넘는다. 슬기네 가족에게 그 빚은 감당하기 힘든 큰돈이다.
“탁자 4개 놓고 하는 장사지만 그래도 요즘처럼 힘든 때가 없었어요. 어떨 때는 1주일 매상이 2만4천원이 전부예요. 음식이 상해 버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한 달에 40만원 하는 가게세 못 낸 지가 넉달이 넘고, 보증금 5백만원에 월세 20만원 하는 집세는 밀리고 밀려서 보증금을 다 까먹었어요. 이제 월세 30만원에 살고 있는데 그나마 벌써 두달째 밀려서 거리로 내쫓길 판이고…. 먹고 살기도 팍팍한데 슬기까지 저렇게 되니 밤이면 잠이 안 와요.”
작은아들의 죽음과 큰아들의 가출, 계속되는 생활고로 스트레스가 심해져 할머니는 한쪽 눈의 시력까지 점점 떨어지고 있다.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이 나빠져 음식을 하기가 예전 같지 않다. 이대로 가면 영영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병원에서는 당장 수술할 것을 권했지만 할머니에겐 엄두도 나지 않는 일이다.
“전 한쪽 눈이라도 괜찮으니 다행이에요. 그보다 어린것이 당뇨병 때문에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혼자 제 몸에 주사바늘을 꽂는 걸 보면 억장이 무너져요. 한번은 하도 답답해서 아이들에게 ‘우리 어디 가서 죽어버릴까’ 하고 못난 말을 한 적도 있어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싫대요. 꼭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한테 베풀고 사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겠대요. 아이들 아비가 이 얘길 듣고 용기를 얻어 꼭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어린아이들도 서로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가는데 온 가족이 모여 살면 이기지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며칠 전은 슬기의 생일이었다. “나는 케이크를 못 먹으니까 생일잔치도 못하겠다, 그치?” 하며 할머니 눈치를 살피는 슬기를 위해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케이크를 특별 주문했다. 동네 빵집에서는 극구 돈을 받지 않고 케이크를 만들어주었다. 국석이와 슬기 그리고 할머니 단 세 식구가 둘러앉은 생일상이었지만 세상 어느 잔치보다 소중한 자리였다. 내년 슬기의 생일엔 아빠도 함께할 수 있기를, 그리고 세상의 온정으로 슬기의 작은 행복이 꺼지지 않기를 기대한다.


여성동아 2003년 9월 4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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