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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느낌이 있는 여행

일년 중 한달은 유럽여행으로 살아가는 소설가 함정임

“유럽의 묘지는 매혹적인 공간, 죽음의 관조에서 오는 마음의 평온을 얻어요”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박윤희 ■ 사진·김형우 기자

2003. 08. 29

소설가 함정임이 최근 파리여행 에세이 ‘인생의 사용’과 유럽 예술묘지 기행문 ‘그리고… 베네치아로 갔다’를 나란히 펴냈다. 그러고도 모자라 또 파리여행을 계획중인 그를 파리로 떠나기 전날 만나 ‘그가 여행중독자로 사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한부모 가정을 꾸려가며 당당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의 풋풋한 삶.

일년 중 한달은 유럽여행으로 살아가는 소설가 함정임

“내일 파리로 가야 하는데 아직 환전도 못했고 여행 가방도 못 챙겼어요. 아… 어쩌죠?”
소설가 함정임(39)을 만나기 위해 경기도 일산 호수공원 근처 그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종종걸음을 치며 한숨부터 내쉰다. 유럽여행을 하루 앞두고 밤새워 원고를 쓰고 그러고도 잡지사에 넘겨야 할 원고가 남아 있어 컴퓨터 전원을 끄지 못하는 여자 함정임. 그는 한 문예계간지에 장편소설을 연재중인데 살짝 충혈된 눈동자에서 ‘글감옥’에 갇힌 고단함이 읽혀졌다.
하지만 안쓰러운 기분도 잠깐, 원고마감에 쫓긴 그의 가슴은 팔딱팔딱 뛸지 모르지만 필자는 왠지 고소한(?) 기분이 들어 지긋이 웃음을 깨물어야 했다.
최근 그는 이색적인 여행 에세이 ‘그리고… 베네치아로 갔다’와 ‘인생의 사용’을 나란히 펴냈다. ‘그리고…’는 유럽의 묘지를 순례한 그의 감상을 담았고, ‘인생의 사용’은 12년 동안 모국처럼 드나든 프랑스 파리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낱낱이 해부했다. 이런 특이한 여행기를 두권이나 내놓고 또 여행이라니. 파리행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그가 ‘글감옥’에서 받을 형벌이 아무리 가혹해도 동정의 여지가 없다.
“여행은 마약 같아요. 여행하는 도중에도 매일 이곳저곳을 다니고 싶은 무서운 유혹에 시달리죠. 청춘 시절, ‘여행이 끝나자 비로소 길이 시작된다’는 말에 포로가 되어 늘 떠나는 일을 반복했어요. 이번에 낸 책에는 12년 동안 감행해온 제 여행과 삶의 기록을 담았어요.”
일년 열두달 중 한달을 유럽여행으로 사용하는 그는 한마디로 여행중독자다. 늘 파리를 베이스캠프삼아 유럽의 동서남북을 휘젓고 다닌다.
“파리에 있는 친구가 여름 한달 동안 집을 비우면 제가 그 아파트에 들어가 살아요. 제가 머무는 집은 파리 5구 라탱 구역에 있는데 센강으로 산책을 가거나 근처 식물원의 울창한 숲속에서 조깅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죠.”
12년이란 시간의 길이 때문일까. 그에게 파리는 더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친구이자 연인이고 다정한 어머니의 품이다.
특히 노트르담대성당은 그에게 아주 특별한 곳이다. 해마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노트르담대성당인데, 마치 먼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자식이 어머니께 안부를 올리러 가는 것과 같은 심정이라나. 그는 노트르담대성당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위안을 얻는 모양이다.
“파리는 생의 막다른 지점에서 달려가는 구원처나 위안처라고나 할까요? 제가 좋아하는 파리는 예술로서의 도시가 아니에요. 제가 좋아하는 파리의 풍경은 오래된 길, 오래된 벽, 오래된 집과 광장… 뭐 이런 것들인데, 저한테 파리는 인공이되 가장 숨쉬기 좋은 낙원이나 마찬가지죠.”
그는 자신의 망막에 포착된 풍경을 직접 카메라로 옮겨 두권의 여행 에세이에 글과 함께 실었는데 사진만 봐도 그를 사로잡는 파리의 풍경은 마천루나 화려한 샹젤리제 대로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파리의 후미진 골목길과 그곳에서 바라본 하늘, 구름이 그가 열광하는 대상이다. 그는 낯가림을 하는 것일까. 그가 찍은 사진 속의 고즈넉한 풍경을 보니 그 주위를 배회하는 사진 밖의 쓸쓸한 이방인이 겹쳐 떠오른다.
“낯선 여행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추억거리를 만들기보다는 제 내면과 많은 말을 주고받는 편이에요. 그렇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 자유롭고 좋거든요. 외국 남자들이 접근해오는 일은 더러 있죠.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단박에 물리치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저는 파트너가 있는데요’ 하고 말하면 모두 ‘미안하다’며 신사적으로 물러서요(웃음).”

일년 중 한달은 유럽여행으로 살아가는 소설가 함정임

함정임은 매일 1~2시간씩 인라인스케이트를 즐긴다고 한다.


오로지 여행지에서 그가 동반자로 허락하는 남자는 단 한명. 김태형군(9)이다. 태형이는 97년 서른네살에 생을 마감한 소설가 김소진과 함정임 사이에 태어난 유일한 혈육으로 엄마의 여행길에 자주 따라나선다.
“근거지를 정해놓고 프랑스나 이탈리아 지방을 집중적으로 여행할 때는 태형이를 데리고 나서지만 짧은 기간 안에 동유럽 같은 여러 곳을 돌 때는 혼자 다녀요. 태형이와 함께 여행하는 시간이 무척 행복하긴 하지만 나중에 태형이가 어른이 되어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여행할 수 있는 곳도 남겨두려고 해요.”
초등학교 3학년인 태형이가 꼽는 유럽 최고의 여행지는 이탈리아의 수상도시 베네치아. 피자 한판을 먹어도 ‘분위기’와 ‘스타일’을 중요시한다는 태형이는 “평생 베네치아에서 살고 싶을 만큼 그곳이 좋았다”며 두 눈을 반짝거린다. 여행이 몸에 익어서 그럴까. 경쾌한 몸짓에 차분한 말투를 가진 태형이는 제법 어른스럽다. 함씨가 지나가는 말로 “저희 집 현관문이 닫히면 바로 잠겨버리기 때문에 늘 외출할 때는 ‘열쇠 챙겨야지’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게 돼요. 평소 열쇠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죠” 하자 대뜸 태형이가 엄마의 말꼬리를 붙잡는다.
“엄마, 그렇게 불평하시면 안돼요.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셔야죠. 엄마가 저한테 그랬잖아요. 모든 걸 좋게 생각하라고.”
모자간이 아니라 친구사이 같다. 아들의 ‘충고’를 들은 엄마는 “그래, 알았어” 하며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아들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씩 웃는다.
순간 요절한 김소진씨가 생을 마감하기 전, 그의 두번째 작품집 ‘고아떤 뺑덕어멈’에 남긴 글귀가 머리를 스쳤다.
‘첫아이가 열달 동안 유일한 생명줄로 삼아온 엄마 젖을 떼느라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절박한 생존의 위기감을 느낀 아이의 달라진 눈빛이 어느덧 저를 닮아 있는 것처럼 느껴져 가슴 한구석이 서늘합니다. 아버지, 당신도 제가 젖을 떼는 몸부림을 옆에서 지켜봤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저 가공할 만한 유전자의 위력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살아 생전 모습이 밑그림처럼 어른거리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계십니까?’
그와 남편은 ‘소설가’라는 직업적인 공통점이 있지만, 함씨와 아들은 둘 다 모두 젖먹이 때 아버지를 잃었고 동시에 ‘김소진’을 잃었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작은 김소진’을 보니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프랑스, 베를린 등으로 이어지는 유럽 예술묘지 기행문 ‘그리고… 나는 베네치아로 갔다’의 모티프가 혹 남편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유럽의 ‘묘지’는 상당히 매혹적인 공간이에요. 저는 유럽의 그 어떤 명소보다 묘지에 이끌려요. 뭐랄까. 죽음으로 새로 태어나는 싱싱한 삶을 맛보았다고 할까요. 묘지에 가면 죽음의 관조에서 오는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어요. 그렇다고 묘지기행이 남편의 죽음을 떠올리는 우울한 여행은 아니었어요.”

일년 중 한달은 유럽여행으로 살아가는 소설가 함정임

‘여행이 끝나자 비로소 길이 시작된다’는 말에 매혹되어 늘 떠날 채비를 하며 사는 소설가 함정임.


자신을 ‘소설가 함정임’이라는 독립된 주체로 보려하지 않고 자꾸만 ‘김소진의 아내’로 묶어내려는 시선이 못마땅한지 그는 불편한 심경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지금은 거의 다 극복이 됐지만 한때는 그렇게 사적인 영역으로 저를 국한하는 시선이 참 견디기 어려웠어요. 도대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죠. 남편이 일간지 문화부 기자이면서 소설가여서 웬만한 신문사 문화부 기자와 다 친분이 있어요. 남편이 죽고 나서부터 제가 무슨 소설을 발표하면 다 죽은 남편과 연관지어 평을 하니까 힘들더라고요. 도대체 나는 뭔가.”
이런 복잡한 그의 심경은 세계적인 조각가 로댕의 연인 카미유 클로델과 언뜻 닮아 있는 듯했다. 파리여행중 그는 생 루이 섬에 있는 카미유 클로델의 집을 방문한 후 이런 글을 남겼다.
‘로댕에게 앗긴 사랑과 재능으로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정신병원에서 죽어간 비운의 예술가. 조각가의 동생인 시인 폴 클로델은 누이를 단단한 이마, 마력적인 두 눈빛, 소설에서나 드물게 나오는 파란 두 눈의 소유자라고 묘사했다. 그 마력적인 파란 눈이 흐릿해지고 희미해져서 현실도 환상도 암흑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녀는 정신병동의 창살에 갇혀 지내야 했다… 허공을 응시하는 카미유의 텅 빈 눈이 내 가슴마저 뻥 뚫어놓는다… 황혼에 그늘진 그 이름, 카미유 클로델을 어루만져주고 싶다.’
그는 카미유 클로델의 오래된 초상 앞에서 자신의 상처받은 자아를 만났는지도 모른다. 한때 그는 요절한 남편의 그림자 때문에 단 한줄의 글도 쓸 수 없어 수개월 동안 천년의 고도 경주를 거닐며 간신히 숨을 쉬었다고 한다. 초승달의 곡선과도 닮아 있는 수많은 무덤과 남산의 능선을 보며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애증도 보름달처럼 커졌다가 초승달처럼 작아졌다를 반복했으리라. 두살 때 만난 아버지의 죽음에서 서른셋에 만난 남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십 평생은 죽음을 관조하도록 훈련받는 시간이었으니까.
“남편은 ‘허공’같은 존재죠. 있는 듯하면서도 없고, 없는 듯하면서도 존재하는 그런 허공.”
모순과 부조리의 옷을 겹겹이 입고 있는 삶의 정체는 죽음을 통해 좀더 확연히 드러나는 법. 그의 깡마른 체구에 담겨진 삶의 내공은 바위를 뚫는 소나무 뿌리처럼 단단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그의 등뒤에 대고 “프랑스말 가운데 어떤 단어가 제일 좋아요?” 하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세사비(C’est sa vie)! 프랑스말로 ‘그 사람 인생이야!’라는 뜻인데 세라비(그게 인생이야)라는 말과 함께 파리지엔들이 가장 잘 쓰는 말이에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남의 입에 오르내리기 좋은 경우에 파리지엔들은 어깨를 한번 으쓱 하면서 짧게 한마디 하죠. ‘세사비!’ 그 사람 인생. 그 사람 일. 그 사람 생각…. 그러니까 남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여행이 끝나자 비로소 길이 시작된다’라는 말에 매혹되어 늘 떠날 채비를 하며 사는 소설가 함정임. 그가 이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또 어떤 ‘인생의 사용법’을 우리에게 들려주게 될지 한껏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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