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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부부의 삶

전원 속에서 꽃과 함께 동화처럼 사는 세계적인 화예디자이너 부부 행크 뮐러·이윤주

“꽃을 매개로 만나 꽃과 더불어 살아가니 이보다 행복할 순 없어요”

■ 글·박진숙 ■ 사진·박해윤 기자

2003. 07. 09

세계적인 화예디자이너와 제자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행크 뮐러·이윤주 부부. 남한산성 기슭에서 꽃과 함께 살면서 꽃보다 진한 향기를 뿜어내며 사는 두 사람의 행복 이야기.

전원 속에서 꽃과 함께 동화처럼 사는 세계적인 화예디자이너 부부 행크 뮐러·이윤주

하얀 수염과 하얀 머리가 인상적인 덩치 큰 외국인이 푸른색 장미를 아기 다루듯 곱게 매만지고 있다. 향기도 맡아보고, 좋지 않은 잎사귀는 솎아주면서 이리저리 바라본다. 이윽고 아무런 도구 없이 빠른 손놀림만으로 아름다운 핸드부케를 만들어냈다. 싱그러운 꽃의 이미지를 그대로 살려낸 핸드부케 속에서 만든 이의 마음이 꽃향기처럼 폴폴 배어나는 것 같다.
‘꽃의 백작’으로 불리는 행크 뮐러씨(53)는 세계적인 화예디자이너다. 그리고 그의 곁에 꽃처럼 머물면서 한국적인 작품세계를 탐닉하는 또 한명의 화예디자이너 이윤주씨(46)가 있다. 이들은 ‘꽃’ 때문에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고, ‘꽃’과 더불어 살아가는 부부다.
남한산성 기슭 계곡 옆에 그림처럼 서 있는 집이 이들 부부가 사는 곳이다. 둥근 지붕과 황토로 바른 벽은 정겨운 한국의 시골집을 그대로 닮아 있다. 아침이면 새소리에 눈을 뜨고, 해가 지면 개구리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하는 소박한 시골집 곳곳에는 아기자기한 꽃 무리가 눈에 띈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꽃내음이 방문객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언뜻 이런 한국적 풍경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뮐러씨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처음엔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남편이 견디기 힘들어했어요. 꽃을 가꿀 정원도 없고, 자연을 느낄 수 없어서 답답해했거든요. 그래서 과감하게 도시를 떠나 이곳으로 온 겁니다.”
남편을 위해 아내는 익숙한 도시를 떠나 이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닮은 것보다는 다른 것이 더 많았을 이들 부부는 이렇게 서로 맞춰가며 살고 있다. 특히 이씨는 남편에 대한 배려가 극진했다. 세계적인 화예디자이너인 남편이 남부러울 것 없던 네덜란드 생활을 청산하고 순순히 한국에 와준 것이 고맙기 때문이다.
전원 속에서 꽃과 함께 동화처럼 사는 세계적인 화예디자이너 부부 행크 뮐러·이윤주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동경은 해왔지만 결혼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어요. 가끔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저 때문에 이국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 미안하기도 해요.”
뮐러씨는 12세 때부터 화예를 시작해 10대의 나이에 각종 대회마다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며 화예계의 전설을 만들었다. 화예 디자인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에서 이름을 알리자 곧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윤주씨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유명한 화예디자이너다. 금연화예연합회 회장인 어머니 우금연씨(71)의 영향으로 초등학생 때부터 꽃꽂이를 배웠는데, 그때부터 이미 뮐러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했다. 어머니가 말하는 화예디자이너 이름에 어김없이 그가 거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대학을 졸업한 후 본격적으로 화예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곧 실력을 인정받았다. 87년 미국 필라델피아 플라워쇼에서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톱10 디자이너’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전시회에 참가해 독특한 디자인으로 호평을 받았다.

전원 속에서 꽃과 함께 동화처럼 사는 세계적인 화예디자이너 부부 행크 뮐러·이윤주

부부가 함께 화예디자이너의 길을 걷고 있는 행크 뮐러·이윤주 부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90년 대만의 한 화예전시회에서다. 뮐러씨를 본 이씨는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핸드부케의 일인자인 뮐러씨처럼 꽃꽂이를 할 수 있을까 싶어 “손 좀 보여주시겠어요?” 했던 것. 이때 뮐러씨는 “핸드부케를 만드는 데 손의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며 그의 작은 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2년 뒤, 이들은 다시 만났다. 이씨가 남아프리카공화국 화예협회 초청 전시회에 초대되어 어머니와 함께 건너갔을 때 뮐러씨도 당연히 초청됐던 것. 하지만 이씨에게 이 자리는 뮐러씨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였을 뿐이다.
“우리 모녀는 알아서 갔는데, 남편은 자가용 비행기로 초청을 받았더라고요. 그것을 보고 정말 하늘같은 사람이구나 생각했죠. 또한 다른 작가들은 자기가 쓸 꽃을 모두 자기 나라에서 가져와 작품을 만드는데, 남편은 현지 밀림에서 나무와 꽃을 바로 베어와 작품을 만들었어요. 경이로움 그 자체였죠.”
뮐러씨 역시 대만에서 당돌하게 질문했던 여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씨 작품을 눈여겨보았다. 소박하고 기품 있는 이씨의 작품이 만든 사람의 성격을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전시회가 끝난 뒤 버려진 꽃을 혼자 다듬고 있는 이씨를 본 뮐러씨는 감동을 받았고,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성실한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무렵 유럽의 화예디자인을 배우고 싶어했던 이씨가 뮐러씨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하면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로만 생각했던 이씨는 어느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뮐러씨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함께 식사하던 동료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뮐러씨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것. 이씨는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해 하면서도 스승의 작품세계를 열심히 칭찬했다. 그러자 뮐러씨는 “나는 윤주를 좋아한다.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재차 물었고, 그제야 의미를 알아들은 이씨는 “나는 한국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말로 거절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뮐러씨는 뜸도 들이지 않고 “나도 한국에 가서 살지 뭐” 하고 대답했고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95년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친정이 워낙 엄격해서 반대가 심했어요. 남편에게 딸이 4명이나 있거든요. 외국 사람인데다 아이들도 있다고 하니까 집안 어른 누구도 허락하지 않으셨죠. 하지만 남편을 직접 만나보고는 소탈하고 진지한 모습에 마음을 놓으시더군요.”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소탈한 성격의 뮐러씨는 ‘세계적 거장’이라는 호칭에 얽매이지 않고 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일본, 대만을 다니면서 이미 동양의 문화가 낯설지 않았기에 적응도 빨랐다. 그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한국 사람들과 삼겹살에 막걸리를 즐기는 시간을 무척 좋아한다. 매운 음식도 탈이 나서 자주 먹진 못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아직까지 도전하고 있다. 이들 부부의 밥상은 동서양이 조화를 이룬 ‘퓨전 스타일.’ 감자가 주식인 네덜란드의 음식에 이씨의 ‘신김치’가 오른다.
“전 신김치만은 빼놓지 않고 챙겨 먹었어요. 제 건강비결이기도 하고요. 시지 않은 김치는 식초를 타서 먹을 정도예요. 신김치만 있으면 밥 두 공기를 뚝딱 해치우죠. 남편은 저보고 속았다고 해요. 이렇게 잘 먹는 줄 몰랐다며 식비가 많이 든다고 농담을 하죠(웃음). 하지만 결혼 초에는 신김치 냄새가 너무 고약하니까 남편에게 미안하더라고요.”
뮐러씨의 아이들이 네덜란드에 있어 이씨 부부는 종종 네덜란드에 들르곤 하는데, 신혼 초에 네덜란드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때도 신김치를 싸 가지고 가긴 했지만 막상 식사시간에 꺼내놓고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 먹을 수는 없는 일. 이씨는 식탁과 베란다를 오가며 저녁식사와 신김치를 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뮐러씨는 웃으며 “누가 김치 먹지 말라고 구박했느냐”며 냄새가 고약한 신김치를 식탁에 올려놓도록 했다.

전원 속에서 꽃과 함께 동화처럼 사는 세계적인 화예디자이너 부부 행크 뮐러·이윤주

8년째 한국에 사는 뮐러씨는 삼겹살에 막걸리잔 비우는 것을 즐길 정도로 한국에 익숙해졌다.


이들 부부가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하며 사는 법은 이렇다. 상대방의 고유성을 인정해주고, 서로 자기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아직까지 뮐러씨는 한국말을, 이씨는 네덜란드 말을 잘 못한다.
수줍은 듯 두 사람의 결혼 이야기를 나긋나긋하게 들려주는 아내의 모습을 뮐러씨가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그런 그의 표정엔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듯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을 집안 곳곳에 꽃장식을 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들의 식탁에 꽃이 빠지는 일은 단 하루도 없다. 또한 이따금씩 직접 꽃다발을 만들어 선물로 주기도 하는데, 그때가 이씨는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사실 화예디자이너에게 꽃을 선물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맞는 부부라 해도 위기는 찾아오는 법. 이들 부부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씨는 결혼 초 한국남자라면 말하지 않아도 알만한 것들을 일일이 말해야 하는 게 힘들었고, 뮐러씨도 나름대로 새로운 문화 속에서 적응하느라 힘겨웠다. 고비가 찾아왔을 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남편이었다. 한국여성의 특성상 터놓지 않고 끙끙대며 가슴에 묻어두는 아내의 모습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아내의 힘든 부분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는 뮐러씨 덕분에 부부는 슬기롭게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꽃에 둘러싸여 살기 때문일까. 부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들 부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순간을 보기 힘들었다. 두 사람 모두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화예디자이너지만 오히려 실험정신을 버리지 않고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뮐러씨는 아내와 같은 길을 걸어가며 한국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뮐러씨는 결혼 후 한국에 살면서 웅장하고 직선적인 자신의 작품계를 더 넓혀 아내의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작품세계의 장점을 접목시켜 나갔다.
“꽃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아내와 “마음의 평온을 주기 때문에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편. 두 사람은 가슴이 따뜻한 디자이너, 소박한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아가는 부부로 남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바쁜 꽃이다” 라고 표현하는 뮐러씨의 농담에 이씨는 살짝 눈을 흘기며 “남자는 다 똑같다니까” 하며 웃었다. 꽃 속에서 큰 소리로 웃는 부부의 해맑은 웃음이 꽃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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