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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나눔의 삶

40년 넘게 어려운 이웃에 의술 베푼 공로로 국민훈장 받은 가천길재단 회장 이길녀

“제가 일군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할 생각입니다”

■ 글·최호열 기자 ■ 사진·지재만 기자

2003. 07. 09

인천의 작은 산부인과 의사로 시작해 맨손으로 의료왕국을 건설한 이길녀 가천길재단 회장. 40년 넘게 의료봉사활동을 주도하고 의대를 설립해 인재양성에 힘써온 공로로 최근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그의 남다른 나눔의 삶.

40년 넘게 어려운 이웃에 의술 베푼 공로로 국민훈장 받은 가천길재단 회장 이길녀

지난 4월7일, 그동안 각종 의료봉사활동을 주도하고 인재양성에 힘써온 공로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가천길재단 이길녀 회장(72)은 독특한 성공신화를 이룬 ‘여장부’로 통한다. 58년 인천에서 산부인과의원을 개원하면서 의료계에 진출한 후 맨손으로 6개의 병원과 7개의 전문의료센터, 4개의 의학연구소를 갖춘 거대한 의료재단을 건설하고, 가천의과대학 설립과 경원대학교 인수 등 교육사업에 뛰어드는가 하면 경인일보를 인수해 언론계에 진출하는 등 각 분야를 아우르는 ‘이길녀 왕국’을 건설했다.
그런데 그의 성공신화엔 남다른 것이 있다. 수익을 끊임없이 사회에 환원하면서도 오늘날 거대한 왕국을 이룬 것이다. “나누어줄수록 가진 게 더욱 커져갔다는” 그의 독특한 성공 뒷이야기를 듣기 위해 인천에 있는 가천길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직함은 대표적인 것만 해도 가천길재단 회장 외에 경원대 총장, 경인일보 회장, 가천의대 재단이사장, 가천문화재단 이사장 등 5개. 다섯 사람이 할 몫을 혼자서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서일까, 그는 고희를 넘긴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고 건강해 보였다. “너무 젊어 보인다”며 피부관리의 비결을 묻자 “피부관리는커녕 화장할 줄도 모른다”며 웃었다.
“오늘 인터뷰가 있다고 하니까 ‘메이크업이라도 좀 하고 사진을 찍으라’며 여직원이 화장을 해주더군요. 화장하는 것도 순서가 있다고 하는데, 복잡해서 전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대충 하고 살아요.”
건강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일어나면 공복에 냉수를 마신다든지, 아침식사를 건강식으로 한다든지, 규칙적으로 운동을 한다든지 하는 건 남의 이야기다. 그저 아무리 늦게 집에 들어가더라도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아침잠을 충분히 자는 정도가 건강관리의 전부라고 한다.
“제가 명색이 의사인데도 특별한 건강법이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을 하면 좋다고 하는데, 귀찮아서 못하겠어요. 일어나면 허겁지겁 우유 한잔 마시고 나갈 준비하기도 바쁜데요, 뭘(웃음). 건강을 위해 이것저것 신경 쓰면 그게 더 피곤해요.”
그는 일 속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는 게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했다. 물론 아무리 바쁘게 일해도 그게 좋아하지 않는 일이라면 스트레스를 받아 건강에 안 좋겠지만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힘든 줄을 모른다는 것.
과거 그가 한창 산부인과 진료 현장에 있을 때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근 10년 동안을 하루 한끼로 때운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보다 못해 그의 건강을 염려한 친언니가 달걀노른자를 넣은 우유라도 마시게 하려고 종종걸음으로 쫓아다녔지만 그 우유 한잔을 마실 시간조차 없었다고.

40년 넘게 어려운 이웃에 의술 베푼 공로로 국민훈장 받은 가천길재단 회장 이길녀

지난 4월7일 국민훈장을 받은 이길녀 회장(왼쪽). 2001년 12월 베트남 한센병(나병) 환자를 위한 직업훈련원 준공식 때의 모습.


“3백65일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환자를 봤어요. 24시간 병원 문을 열어놓고 환자만 오면 한밤중이고 새벽이고 일을 했지만 순간 순간이 행복했어요. 그런 강행군 속에서도 피곤한 걸 몰랐죠.”
그는 그렇게 일한 것이 결코 돈 때문은 아니었다고 한다.
“만약 돈을 벌 목적으로 의사가 되었다면 미국유학을 마친 후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남았을 거예요. 어려서부터 의사가 되어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곳에서 힘닿는 데까지 손을 뻗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뿐이에요.”
실제 그는 개원 초기부터 극빈자에 대해서는 무료진료를 해주고, 지금까지 도서벽지에 살고 있는, 10만명이 넘는 여성들에게 자궁암 무료검진을 해주었다. 또한 대부분의 병원들이 돈이 되는 대도시나 신도시에 병원을 지어 확장해갈 때 그는 거꾸로 양평, 철원, 백령도 등 의료취약지역에 병원을 설립하거나 인수해 그곳 주민들에게 의료혜택을 제공했다.
이외에도 92년 ‘새생명 찾아주기 운동본부’를 만들어 치유가 가능한 질병인데도 치료비가 없어 고통받거나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새생명의 길을 열어주었는데, 지금까지 그의 도움을 받은 난치병 환자만 1천8백여명에 달한다.
그의 나눔 정신은 해외로까지 이어져, 2001년 12월 베트남 빈딩성에 한센병(나병) 환자들의 자활을 위한 직업훈련원을 세우기도 했다.
“50년대까지만 해도 한센병 환자들이 많았어요.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환자들을 매일 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만 해도 정부에선 돈이 없어 그런 사람들을 치료해줄 수 없었어요. 다행히 외국에서 지원을 해서 나환자촌도 만들고, 치료도 받을 수 있었죠. 저도 소록도 등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했는데, 옆에서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니 마음이 아팠어요. 이제 우리나라도 잘살게 되어 더는 한센병 환자들이 발생하지 않지만 의료 후진국에서는 아직도 한센병 환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어요. 이젠 우리가 도와줄 차례라고 생각을 했죠.”
의료 후진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돕기 위해 92년 한센국제협력후원회를 만든 이회장은 95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초청으로 베트남의 나환자촌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들을 보며 과거 우리나라 나환자들의 참혹했던 실상을 떠올린 그는 의료시설과 함께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97년 베트남 정부와 연간 3백명의 연수생을 배출할 수 있는 직업훈련원을 베트남에 만들어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곧이어 IMF 외환위기로 국내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규모를 축소, 18만3천달러(약 2억원)를 들여 연 1백명의 한센병 환자와 가족들이 봉제기술을 배울 수 있는 직업훈련원을 만들어주었다. 2001년 12월7일 열린 준공식에 베트남 정부의 주석(대통령에 해당)과 부주석(국무총리에 해당)이 모두 참석할 정도로 이 일은 베트남에선 의미가 큰 사업이었다.
“훈련원이 원활히 유지될 수 있도록 앞으로 10년 정도는 꾸준히 운영비를 지원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베트남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한센병 환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현재 준비중에 있어요.”

40년 넘게 어려운 이웃에 의술 베푼 공로로 국민훈장 받은 가천길재단 회장 이길녀

촌각을 다투며 살았던 지난날을 후배들에게 이야기하는 이길녀 회장.


그는 의사이기에 어려운 환자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처럼, 여성이기에 ‘모성보호’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01년 한국여성재단에서 여성과 아이들의 건강과 인권을 위한 모성보호기금을 모금하기 시작하자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이를 실천하고 있다. 길의료재단 산하 6개 병원에서 신생아가 한명 태어날 때마다 1만원씩 모성보호기금으로 적립하고 있는 것. 이렇게 적립된 금액이 현재 2억4천여만원에 달한다.
“저도 여성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오늘날까지 설움을 많이 당했어요. 그래서 우리의 딸들에게 그런 설움을 되풀이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일에 제가 먼저 앞장을 서는 건 당연한 일이죠.”
언뜻 생각해보면 50년대에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후 미국유학까지 다녀왔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하는 등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그가 ‘우리의 딸들에게 내가 당한 설움을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그는 모르는 소리라고 했다.
“유교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저라고 예외였겠어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집안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랐죠(웃음). 여성이기에 당하는 푸대접은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전 누구보다도 열심히 환자를 돌봤어요. 학생 때도 밤을 새워 공부한 적이 없을 정도로 잠이 많은 저였지만 환자를 위해서는 꼬박 사흘 밤낮을 잠 안 자고 돌본 적도 많으니까요.”
서울대 의대를 나와 미국 유학까지 한 의사라는 자체만으로도 환자들이 몰릴 만했다. 게다가 ‘수술보증금’ 없이 수술을 하고, 돈이 없는 사람은 다음에 갚으라며 무료로 진료를 해주자 금세 소문이 퍼져 그야말로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자연히 병원은 나날이 커져갔고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길의료재단에 이르게 되었다.
“제가 남자였다면 사람들은 ‘저 사람은 저렇게 열심히 살았으니까 성공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라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여자이니까 그동안의 과정은 무시된 채 ‘여자가 어떻게 저렇게 큰 병원을 가지게 되었을까’ ‘뒤에서 누가 돌봐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정경유착이다’ 등등 온갖 소문이 나돌았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 가슴이 아팠죠.”
그런 설움을 잊을 수 있게 해준 것은 오로지 의사로서의 열정과 보람이었다.
“환자를 보는 시간의 어느 순간을 돌이켜보아도 그렇게 행복한 시절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미쳐서 살았어요.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내 손으로 살렸을 때, 그리고 치료비가 없다고 해서 다음에 갚으라고 하고 그냥 보낸 후 저도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쌀이나 생선, 채소 같은 것을 가져와 울면서 ‘선생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하는 말을 들을 때면 가슴이 찡했죠.”
일흔이 넘은 데다 빠듯하게 짜인 일정 속에서도 병원에 오면 항상 병실을 둘러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는 천상 ‘의사’였다.
“초등학교에 다니기 전부터 불쌍한 것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어요. 아이들에게 돌을 맞아서 다리를 다친 도둑고양이가 있으면 데려다 씻어주고 헝겊으로 다친 데를 묶어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잘 나아요. 어려서부터 의사 자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절친했던 소꿉친구가 전염병으로, 중학교 2학년 때는 아버지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의사만 있었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친척어른의 말을 듣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
죽음이 그에게 의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주었다면 교회에서 아이들을 치료를 해주는 봉사활동을 하던 이영춘 박사는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었다. 남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사는 의사의 길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분의 영향을 받았나 봐요. 의사가 되면 당연히 고향에 가서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유학이 끝났을 때도 다른 사람들은 ‘한국은 너무 가난해 돌아가보았자 병원 유지하기도 힘들다’며 미국에 주저앉았을 때도 저는 병원이 되고 안 되고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고통받는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40년 넘게 어려운 이웃에 의술 베푼 공로로 국민훈장 받은 가천길재단 회장 이길녀

이길녀 회장은 초등학교때부터 의사를 꿈꾸었다고 한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다. 그에게 “지금까지 마음에 드는 남자를 한명도 못 만난 것이냐”고 짓궂게 묻자 “환자를 돌보느라 남자를 만날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 그런 부분에선 정말 무미건조한 삶을 살았다. 돌이켜 생각하니 억울하다”며 웃었다.
“하지만 남편과 아이들에게 쏟을 애정을 환자들에게 쏟았고, 그 순간 순간이 너무 행복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아무리 낮에는 환자에 매달리느라 아무 생각이 안 든다고 하더라도 혼자 있는 밤이면 누구나 외로움을 느끼는 법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도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의외였다.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다고 하면 사람들이 저에게 ‘사람이 외로울 때가 왜 없어요’ 그러는데, 저는 정말 외로울 때가 없었어요. 사람들이 하도 저에게 그런 질문을 많이 해서 저도 심각하게 ‘내가 늙어서 외로우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했을 정도예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는 혼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의사, 교수, 모든 직원들을 다 제 자식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번은 어느 모임에서 우리 병원 의사들 이야기하면서 ‘우리 애들이’라고 했다가 누가 ‘결혼하셨어요?’ 하고 물어 한창 웃었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제 그의 나이 때문일까, 최근 그의 후계 문제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는 여전히 건강하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이길녀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제게 자식이 없으니까 그런 질문을 많이 하는데, 전 자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물려주지는 않았을 거예요. 제가 이룬 모든 게 사회의 소유이지 제 것이 아니니까요. 전 항상 저 혼자 일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직원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그럼 직원들이 저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을 한 것인가, 그렇지 않아요. 이 사회를 위해 일한 거지…. 그러니까 당연히 사회에 환원을 해야죠.”
그는 궁극적으로는 병원, 대학, 신문사, 박물관 등 그가 소유한 모든 기관을 통괄하는 가천길재단을 사회에 환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미 길의료재단은 사회에 환원한 상태다. 그러면서 그는 연세재단 이야기를 꺼냈다. 연세대학교는 다른 대학들과 달리 특정한 주인이 없지만 대신 모든 구성원들이 설립자의 정신을 계승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 오늘날 명문사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
“우리 가천길재단 역시 혈연이나 개인적인 인연과 상관없이 제 철학과 이념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할 겁니다.”
하지만 당장 일선에서 물러설 계획은 없다고 했다. “아직은 열심히 일할 건강과 의욕에 넘쳐 있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젊고 활기차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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