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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솔직한 고백

‘국무총리 인준 청문회’로 홍역 치렀던 장상 근황

“생일날 남편이 ‘다시 일어서라’며 오뚝이 인형 건네줄 때 눈물이 핑 돌았어요”

■ 글·최호열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3.06.03 14:40:00

지난해 7월, 헌정사상 첫 여성총리로 지명되었지만 국회 청문회에서 낙마한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이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털어놓은 자서전 ‘지금도 나는 꿈을 꾼다’를 펴냈다. 청문회 파문 이후 1년 가까이 언론과의 접촉을 철저히 피해왔던 그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가습 답답한 속사정 &두 어머니를 모시고 산 결혼생활 이야기.
‘국무총리 인준 청문회’로 홍역 치렀던 장상 근황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65)에게 지난해 7월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시간으로 남을 것이다.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로 지명되었지만 언론과 국회 청문회에서 난도질당한 채 낙마했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을 통해 비춰진 그의 모습은 학력위조, 위장전입, 땅 투기, 아들 국적문제 등으로 얼룩진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사회지도층 인사 그 자체였다. 반면 그의 해명은 언론에 의해 철저히 무시돼 국민들은 제대로 들을 수조차 없었다.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깊은 상처를 남긴 총리 인준 실패가 있은 지 1년여 만에 그가 자서전을 통해 당시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지금도 나는 꿈을 꾼다’가 그것.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를 완강하게 거절했던 그를 만나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장 전총장을 만나기 위해 자택을 찾았을 때 기자는 두번 놀랐다. 우선 그의 밝은 표정이었다. 아직 당시의 아픔과 앙금이 남아 있을 법도 하건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또한 ‘아파트 두 채를 불법적으로 터서 만든 1백평 호화주택’이라는 당시 보도와 달리 그의 집은 방이 많다는 것 외에 특별히 호화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 총리 인준 부결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시장도 다니고, 여행도 하고…, 비교적 자유롭게 지냈어요. 처음엔 사람들이 악수를 청하고, 사인을 해달라고 하는 게 부담스러워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기도 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날 위로하는 건데 왜 내가 그걸 힘들어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다음부터 저를 알아보는 분이 있으면 ‘텔레비전에서 많이 본 사람 같죠? 청문회 열심히 보셨네요’ 하고 먼저 말을 걸었어요. 그러니까 어이없어 하며 웃더군요. 집에 있을 때는 자서전을 쓰거나 그동안 바빠서 못 보았던 책들을 읽으며 보냈죠. 며칠 전엔 제 모교인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남편(박준서 연세대 교수)과 함께 ‘자랑스런 동창상’을 준다고 해서 다녀왔고요.”
-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텐데, 자서전을 썼다는 게 의외입니다. 자서전을 쓴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국회 인준이 부결된 후 제 서재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장상! 넌 어떤 사람이냐’고 스스로 자문을 해보았어요.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제 삶을 찬찬히 돌이켜보며 글로 끄적거렸는데, 그게 많은 위로가 되었어요. ‘적어도 내가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확신도 다시 한번 갖게 되고…. 그러다 욕심을 내어 자서전까지 쓰게 되었어요. 요즘은 친구들에게 자서전을 써보라고 권해요. 삶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온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거든요.”
- 가족들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 같습니다.
“남편은 저보다 더 마음 아파했어요. 솔직히 전 좋은 아내는 아니에요. 남편 넥타이를 골라주길 하나, 집안일을 하나…. 그래도 남편은 제가 고지식할 정도로 법을 지키며 산다는 것을 알아요. 예를 들어 남편은 차를 몰다가 횡단보도에 사람이 없으면 그냥 지나가기도 하는데, 그러면 제가 ‘안돼, 빨간 불이야’ 그래요. 남편은 그게 재미있는지 횡단보도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차를 멈추곤 꼭 저를 보며 ‘갈까 말까’ 하며 놀려요. 그런 마누라에게 ‘위법’이니 ‘탈법’이니 하니까 친구들에게 ‘이 사회가 이럴 수는 없다’며 울분을 토하더군요. 10월3일이 제 생일이었는데 남편이 주섬주섬 뭘 꺼내더니 선물이라며 오뚝이 인형 두개를 주더라고요. ‘오뚝이처럼 일어서라’며…. 눈물이 핑 돌더군요.”

‘국무총리 인준 청문회’로 홍역 치렀던 장상 근황

- 인준 부결 소식을 들었을 당시의 심정은 어땠나요?
“청문회 직전에 신문을 보면서 예감이 안좋았어요. 처음엔 이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갈수록 고약해지더라고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가나 싶을 정도로 심했죠. 아마 여성이 총리가 되는 게 자기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저는 스스로 도덕적으로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걱정은 안했지만 이미 만들어놓은 어떤 틀에 자꾸 저를 몰아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인준이 부결된 후 사람들에게는 괜찮다고 했지만 솔직히 마음은 아팠어요. 부도덕이란 말만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고, 가슴에 피멍이 들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도 ‘다 내 부덕의 소치’라는 말이 가슴에 다가오더군요.”
네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47년 어머니와 함께 월남한 장상 전 총장. 궁핍한 피란 시절을 거치며 학창시절을 보낸 그의 삶은 자수성가 그 자체였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이화여대 수학과, 연세대 신학과, 예일대 신학대학원 석사과정,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박사과정을 모두 장학금으로 다니며 학자의 꿈을 일궈냈다. 또한 96년 기혼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이화여대 총장에 취임, 6년 동안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남편 박준서 교수(64)와는 64년 연세대 신학대학 편입생 동기로 만나 우정을 쌓아오다 70년 예일대에서 함께 석사과정을 밟으며 사랑을 꽃피웠다. 박교수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지원자로 장 전총장을 외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 남편이 집안일을 많이 도와주는 편이었나요?
“유학 하는 동안 첫애를 낳았는데, 낮에는 제가 보고 밤에는 남편이 봤어요. 책가방을 싸놓고 있다가 남편이 저녁 7시까지 들어오면 바로 도서관에 가서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애는 주로 밤에 아픈 적이 많아 남편이 고생을 했죠. 그래도 남편은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어요. 뿐만 아니라 늘 제 의견과 능력을 인정해주는 남편에 대해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린 지금까지 항상 평등하게 살았어요. 위 아래로 누이가 여섯이나 되는 외아들이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예요.”
- 유학 시절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장학금으로 겨우 생활하는 와중에 저는 한국에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께 생활비를 부쳐드려야 했기 때문에 항상 빠듯했죠. 더구나 아이가 생긴 후로는 장학금 가지고는 부족해 둘 다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어요. 하지만 우린 돈 때문에 한명이 공부를 포기하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보통 7년 정도 걸리는 과정인데 10년이나 걸린 것도 똑같이 일하면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에요. 공부를 마치고 77년 한국에 돌아올 때 비행기 삯이 없어 난감한 일을 겪기도 했죠.”
‘국무총리 인준 청문회’로 홍역 치렀던 장상 근황

장전총장은 요즘 새학기 강의준비에 열중하고 있다.


- 유학중에 태어난 장남의 한국국적포기로 청문회 때 논란이 일었는데, 어떻게 된 건가요?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돼 법무부에서 국적정리약정서라는 공문을 보내왔어요. 2개월 이내에 이중국적 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 어떤 조치를 받아도 이의없음을 서약하라는 것이었죠. 미국에서는 본인이 18세가 된 후 스스로 선택을 하는 것이지 부모가 선택할 수 없게 되어 있어 미국국적을 포기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런데 한국은 어느 한쪽을 포기하라고 하고….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국국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법에서 하라는 대로 한 게 오히려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당혹스러웠어요.”
- 당시 또 문제가 되었던 게 아파트 두채를 불법 개조해 1백평 호화주택에서 산다는 것이었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었나요?
“아파트는 아무리 커도 방이 5개 넘는 집은 없어요. 시어머니 방, 부부침실, 두 아들의 방 한개씩, 남편 서재를 마련하면 제 공간은 없어요. 사람들은 부부가 서재를 같이 쓰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특히 총장이 되면서 중요한 학교서류를 집에 가져올 때도 있는데, 제 방이 없어 분실할까봐 늘 전전긍긍했어요. 학교 일로 손님이 찾아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려고 해도 제 방이 없으니까 불편하고…. 그러다 전에 살던 목동아파트 한 채 값으로 이곳(남가좌동)에선 두채를 살 수 있다고 해서 이사를 온 거예요. 부동산에 확인을 해보았는데, 이렇게 개조를 하는 게 불법이 아니라고 해서 한 건데…. 그런데 이곳 역시 방이 6개나 되는데도 방 배정을 하고 나니 역시 제 방이 없는 거예요. 시어머니가 아프셔서 가정부 방을 따로 마련해야 했거든요. 결국 안방에 딸려 있던 화장실을 개조해 처음으로 저의 서재를 만들었죠.”
사실 그의 서재는 서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작은 앉은뱅이 밥상 하나가 들어갈 정도. 하지만 이곳에서 그는 총리 인준 실패의 고통을 이겨내고 자서전을 집필했다. 그는 “주부들도 숨을 돌릴 수 있는 혼자만의 방이 필요하다. 그래야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정될 수 있다”며 충고했다.

‘국무총리 인준 청문회’로 홍역 치렀던 장상 근황

장상 전 총리의 친정어머니와(왼쪽) 시어머니(오른쪽)가 함께 살때 모습(왼쪽 사진). 이화여대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가운데 사진). 남편 박준서 교수와 찍은 부부사진(오른쪽 사진).


-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부터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지금도 흔한 일이 아닌데, 살면서 갈등 같은 건 없었나요?
“친정어머니에게는 자식이 저뿐이고(언니는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 남편은 외아들이었기에 저희가 같이 모신 거죠. 두분 모두 인내심이 강한 분들이라 겉으로 갈등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전 느꼈죠. 친정어머니는 딸집에 얹혀 산다는 생각에 사위와 밥상을 같이한 적이 한번도 없을 정도로 고지식한 분이었어요. 저희 집은 시어머니께서 살림을 하셔서 월급봉투를 다 시어머니께 가져다 드렸는데, 친정어머니는 그게 마음에 걸렸었나봐요. 사람들이 ‘훌륭한 딸을 두어서 좋겠다’고 하면 ‘그런 소리 마쇼. 쟤가 남자였으면 월급봉투 나에게 줄 것 아니오’ 그러는 거예요(웃음). 그리고 친정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당신이 보시기에 우리가 돈을 헤프게 쓰는 걸로 보였던 모양이에요. 예를 들면 달걀을 한판만 사도 될 걸 왜 두판씩 사느냐, 티슈 화장지를 한장씩 안 쓰고 왜 두장씩 쓰느냐며 항상 설교를 하시곤 했죠. 시어머니는 ‘사돈 말이 맞다’고 하면서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도 친정어머니가 3년을 누워 계시다 89년 돌아가실 때까지 시어머니가 병수발을 다 해주셨어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 청문회 때도 살림을 시어머니가 다 했다고 말한 것 때문에 말이 많았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월급 봉투를 건네드리면서 어머니가 살림을 하셨어요. 시어머니는 저에게 ‘너는 사회 일을 할 사람’이라며 등을 떠밀었을 정도였죠. 친구들이 경제권을 빼앗기면 안된다고 말렸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 저는 살림에서 벗어나 좋고, 시어머니도 며느리에게 아쉬운 소리 안해도 되니까 좋은 거죠. 오히려 가끔 저에게 용돈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볼 정도였어요. 사실 저나 남편은 월급봉투 이외에 강연, 원고료 수입이 있어 그걸로 용돈을 해결했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용돈 달라는 말을 안하니까 딴주머니를 찼다며 오히려 섭섭해하시더라고요(웃음).”
- 그런데 청문회 때 위장전입 등 모든 의혹을 어머니에게 떠넘겨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주부가 어찌 그리 집안일에 무심할 수 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게 저와 시어머니의 역할분담이고, 서로 즐거워했어요. 전 언론 보도를 인정할 수 없어요. 귀국 후 주상복합아파트에서 전세를 살았는데 건물주가 그곳을 담보로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났어요. 건물 전체에 차압에 들어왔죠. 그러자 살림을 도맡고 있던 시어머니가 당장 길거리로 나앉게 될 것을 우려해 작은 아파트를 하나 샀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 세입자들이 돈을 모아 아파트를 아예 사기로 결의를 했어요. 우리만 빠질 순 없잖아요. 그렇게 돼서 잠깐 동안 두채를 소유하게 된 건데 부동산투기라고 몰아붙이는 건 납득할 수 없죠.”

정년퇴임을 앞두고 교수로서 명강의했다는 소리 듣고 싶어
- 고부관계가 무척 좋았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도 갈등이 없진 않았을 법 한데….
“다른 걸로 갈등은 없었는데, 가끔 토라지실 때가 있어요. 시어머니는 항상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고 싶어하는데 제가 일이 바빠 대화를 못할 때가 있어요. 그게 2~3주 계속되면 토라지셔서 저를 불러 통장과 가계부를 주며 ‘며느리가 있는데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되겠냐, 앞으로 네가 해라’ 그러세요. 그럼 전 다음날 저녁에 장미꽃과 슈크림 케이크를 사들고 귀가해 죄송하다고 하면 금새 풀려요. 그러고 나서 통장과 가계부를 돌려드리면 꼭 ‘직접 살림을 해보니까 어렵지?’ 하면서 받으시죠(웃음).”
- 시어머니가 99년부터 거동을 못하셨는데, 그후부터는 직접 살림을 하신 건가요?
“그땐 제가 총장을 하느라 바빠서 몰랐는데, 남편이 다 한 것 같아요. 남편도 당시 연세대 부총장이라 바빴을 텐데 제가 집안 일에 신경을 안 쓰도록 무척 배려를 해줬어요. 전에는 제가 남편 커피는 타주곤 했는데 총장이 된 후로는 남편이 직접 타 먹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제가 커피를 타주면 자기가 탄 것보다 맛이 없다고 해요. 그런데 요즘 집에 있으니까 왠 공과금이 그렇게 많은지…(웃음).”
- 마지막으로 다시 공직 제의를 받는다면 수락하실 건가요?
“제가 지난 청문회 때 배운 것 중 하나가 가정법에는 대답하지 말라는 것이었어요(웃음). 그때 총리직 제의를 수락한 것은 총장 임기가 끝나는 시점이었고, 더구나 안식년이라 1년 동안 강의가 없어 6∼7개월 정도 일하면서 공정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작은 기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어요. 하지만 그렇게 날벼락을 맞을 줄은 몰랐죠(웃음). 2005년 2월이 정년퇴임이라 앞으로 강의할 수 있는 시간이 세 학기밖에 안 남았어요. 지금 생각은 교수는 다시 할 수 없는 것이니까 우선 강의에 충실하고 싶어요. 제 꿈이 명강의를 하는 것인데, 그동안 명강의를 했다는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좀 더 성실하게 준비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고, 그후엔 어떤 형태로든 우리 사회가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정도를 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탤 생각이에요.”
책제목처럼 그가 꾸고 있는 꿈이 이뤄지길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성동아 2003년 6월 4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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