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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10년의 약속

올해로 10년째 피아노 연주회 가진 노영심의 일과 사랑

“외롭고 힘들게 이어온 공연, 처음 시작했던 마음으로 다시 10년을 이어갈래요”

■ 글·구미화 기자 ■ 사진·최문갑 기자

2003. 06. 03

94년 노영심이 연주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시작한 피아노 연주회가 올해로 10년째를 맞았다. 공연을 끝내고만난 자리에서 그가 10년 동안 연주회를 한번도 거르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과 윤석화, 이문세, 박상원 등과의 특별한 인연을 들려줬다.

올해로 10년째 피아노 연주회 가진 노영심의 일과 사랑

10년째를 기념하기 위해 5월9일부터 18일까지 열흘간 열린 노영심의 ‘이야기 피아노’ 공연 첫날인 5월9일, 서울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관객들의 차분한 박수소리와 함께 ‘5월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타난 노영심(35)은 자작곡과 함께 가요와 클래식을 자신의 색깔로 편곡해 들려주며 ‘이야기 피아노’를 처음 시작했던 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대학에서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고, 대중음악을 경험한 노영심은 94년 10월의 마지막날, 호암아트홀 공연에서 자신만의 피아노 화법으로 관객들에게 처음 이야기를 건넸다. 그리고 그 이듬해 ‘매년 5월17일에는 옛 친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겠다’고 자신과 약속하고, 5월로 날짜를 옮겨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가 굳이 5월17일로 날짜를 잡은 건 수년 전 초등학교 동창과 한 약속 때문이다.
“95년 5월17일에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공연을 하면 친구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 친구와는 오래 전 연락이 끊겨 친구가 공연에 왔었는 지는 모르겠어요.”
그가 1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피아노를 치기로 한 건 ‘가수 노영심’ ‘작곡가 노영심’이라는 타이틀보다 ‘연주인 노영심’으로 불리고 싶었기 때문. 그는 90년대 중반부터 피아노 소품 앨범을 석장이나 냈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14년 전 변진섭과 함께 ‘희망사항’을 부른 ‘가수 노영심’ 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노래 부른 걸 후회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 사람이 10년 동안 같은 시기에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10년 동안 약속을 지킬 수 있었던 건 그를 사랑하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변함없이 공연 포스터 사진을 만들어준 사진작가 조세현, 학생 시위가 심했던 95년 5월17일,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공연할 때 데모대열에 뛰어들어 확성기를 들고 “데모는 음악당에서 합시다” 하고 외쳐주던 가수 이문세, 95년 5월 공연 이후 매년 연주하는 ‘작은 연못’을 만든 김민기, 그리고 5월16일이 결혼기념일이라 매년 그의 공연 무렵이면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나 아쉬움을 남겼지만 “열번째 공연은 꼭 함께하자”고 약속했던 연극배우 윤석화. 되돌아보면 그는 그들과 함께한 너무나 많은 추억이 떠오른다고 한다.

“13년째 가깝게 지내는 윤석화 언니는 내게 힘을 주는 초생달 같은 존재”
올해로 10년째 피아노 연주회 가진 노영심의 일과 사랑

가수보다 피아노 연주자로 불리고 싶다는 노영심.


“(이)문세 오빠가 확성기를 들고 데모대열에 뛰어들었을 때 (박)상원 오빠는 교문 밖에서 전경의 곤봉을 빌려 들고 공연 보러 온 사람들을 안내했어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조세현씨와 함께한 포스터 작업은 그에게 특별한 사진들과 더불어 값진 기억들을 남겼다.
“95년, 포스터 사진을 찍기 위해 조세현 선생님과 함께 피아노를 트럭에 싣고 무작정 거리로 나섰어요. 도시를 배경으로 찍겠다는 막연한 구상이 있었는데 문득 무너진 성수대교가 떠올랐죠. 처음 강남 쪽에서 시도했을 때는 진입을 막았어요. 우기고 우겨서 강북 쪽에서 진입해 무너진 성수대교 위에 피아노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죠. 아마 미리 공문을 띄우고 허락을 받으려 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거예요. 2001년에는 바닷가에 피아노를 놓고 촬영했는데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함께 갈 사람들을 응모했거든요. 즉석에서 제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함께 도시락도 먹었어요. 즉석 야외 공연이 된 셈이죠.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바닷물이 밀려오는 바람에 피아노가 바닷물에 잠겼어요. 그거 건져내느라 사람들이 도시락 먹은 힘 좀 썼죠(웃음).”
첫날 공연에서 노영심은 “우울하고 절망스러울 때마다 힘을 주는 초생달 같은 존재”라고 표현하며 윤석화를 무대 위로 불러내고는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연주했다. “열번째가 되면 꼭 함께하자”고 했던 윤석화가 약속을 지킨 것. 연주가 끝나기 전에 눈물을 보인 윤석화는 관객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같은 곡을 노래하는 것으로 노영심에게 화답했다.

올해로 10년째 피아노 연주회 가진 노영심의 일과 사랑

그는 벌써 내년 공연 제목을 ‘5월의 약속’으로 지었다.


두 사람은 지난 90년, 윤석화가 자신의 연극 ‘사의 찬미’의 음악을 노영심에게 부탁하면서 인연을 맺은 뒤 13년째 둘도 없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언니는 제게 ‘길’ 같은 존재예요. 언니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언니의 일상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소중하고, 제게 영향을 미치거든요.”
열번째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 촬영 때 노영심이 입은 흰색 블라우스는 윤석화가 준 것. 이날 공연에 입고 나온 독특한 디자인의 원피스도 두 사람이 함께 홍콩 여행을 갔을 때 윤석화가 골라준 것이라고 한다. 윤석화가 얼마 전 생후 1개월 된 아기를 입양한 건 노영심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윤석화의 아기를 향한 간절한 열망을 뒤늦게 안 노영심은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그의 고민과 갈등을 몰랐던 게 참 미안했다고 말한다.
“사실 좀 놀랐어요. 정말 오랫동안 생각해온 일이라며 이미 다 결정을 내린 뒤에 얘기했거든요. 그리고 막상 아기를 안고 있는 언니를 보니까 정말 오랫동안 준비해온 일이란 걸 알겠더라고요.”
첫날 공연에서 눈길을 끈 또 한 사람은 그가 언젠가 피아노와 함께, ‘자신이 가장 의지하고,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표현했던 남편 한지승 감독이다. 한지승 감독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 영화 ‘친구’에 출연했던 영화배우 서태화와 함께 객석에 자리를 잡았다. 노영심은 공연 말미에 “공연 준비한다고 밥도 못해주고, 남편이 아픈 것도 모르고 내 일만 했지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려주는 남편 ‘한지승’”이라며 감사의 마음과 미안함을 전했다.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흘간 공연을 해야 하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안마도 해줬다고 한다.
“전에는 제가 간지럼을 타서 안마 같은 걸 못견뎌했거든요. 그런데 잠을 푹 자고 싶어도 어깨가 아파 잠을 못 이루니까 안마를 해주더라고요. 그 손길이 참 좋았어요.”
2001년 5월26일 결혼한 이들 부부는 서로 일을 하느라 챙겨주지 못하는 걸 늘 미안해하며 작은 것이라도 따뜻하게 해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평소 산책하기를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두 사람이 시간이 맞을 때 종종 하는 일은 ‘골목길 찾기.’
“영화에서는 왜 ‘헌팅’이라고 하죠. 영화에 쓸 만한 아름다운 골목길, 장소, 풍경을 찾는 일을 같이 해요. 가회동, 삼청동, 후암동의 골목길이 ‘예술’이거든요.”
영화 ‘하루’로 대종상 감독상을 받기도 한 남편이 끝까지 영화작업을 하는 사람으로 남길 바란다는 노영심은 결혼하면서 “부부가 같이 작업을 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고 약속했지만 사회에 좋은 밑그림을 남길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작업은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집안일을 ‘콩나물 명상’ ‘설치미술’ 이라 이름 붙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해요”
여전히 화장기 하나 없이 해맑은 모습으로 수줍게 웃는 소녀 같은 그도 남편과 산책을 즐기는 주부가 됐다. ‘주부’라는 말 대신 ‘가정을 가진 여성’이란 표현을 더 선호한다는 그는 공연을 아기자기하게 기획하듯 집안일에도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콩나물 다듬기는 ‘콩나물 명상’, 설거지는 ‘봉사활동’, 가구를 재배치하는 것은 ‘설치미술.’ 피아노를 치거나 글을 쓰다가 막힐 때 집안일을 하면 도움이 돼요. 결혼생활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어요(웃음).”
그는 집안일을 꼭 해야만 하는 의무사항이나 책임으로 생각했더라면 그러지 못했을 텐데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즐거워진다고.
열흘간의 공연을 무사히 마친 그에게 제일 하고 싶은 일을 물으니 웃음과 함께 “김치찌개”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남편이 제가 해준 음식을 참 좋아해요. 아마 열심히 칭찬해서 자꾸 하게 만들려는 고단수 수법인 것 같아요. 공연이 끝나면 김치찌개를 끓여달라고 했어요. 그동안 못해준 것 다 해주려고요.”
설레는 마음으로 1년을 기다려온 공연을 무사히 마친 그는 첫날 공연이 가장 아쉬웠다고 한다. 조심스럽게 컨디션을 유지해 왔는데 공연 첫날 아침 급체를 하는 바람에 두 시간을 버틴 게 신기했을 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이번 공연은 첫날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공연 기간 내내 피아노를 정말 열심히 쳤어요. 너무 외롭고 힘들게 이어온 공연이지만 제겐 그것도 참 따뜻했어요. 앞으로 사람들에게 더 헌신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준비해야죠.”
그는 10년 전 처음 공연을 시작할 때는 ‘모차르트처럼’ 편곡을 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으나 지금은 기분 좋고 경쾌한 곡이 좋다고 한다. 10년째 공연에서는 실수를 하더라도 발랄하고 솔직해지는 그런 맑은 음악, 담담하고 담백한 연주를 하고 싶었다는 그는 “10년이 지나고 나니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다시 10년 후를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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