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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소증 딛고 5명의 아이들 돌보는 산골 마을의 ‘피터팬 아저씨’ 김영수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줄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 글·박진숙 ■ 사진·지재만 기자

입력 2003.04.15 10:59:00

네살 때 성장호르몬 분비가 멈춘 이후 몸은 ‘아이’로, 마음은 ‘어른’으로 살고 있는 김영수씨. 그는 다섯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총각 아빠다. 신체적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오히려 아이처럼 살 수 있어 기쁘다고 말하는 ‘피터팬 아저씨’ 김씨의 남다른 인생.
왜소증 딛고 5명의 아이들 돌보는 산골 마을의 ‘피터팬 아저씨’ 김영수


“이세상에는 ‘키 큰 사람이 할 일’과 ‘키 작은 사람이 할 일’이 다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키는 비록 작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소중한 몫을 찾아 열심히 하려고 하죠.”
나이를 먹어도 더는 자라지 않는 동화 속 주인공 피터팬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수씨(36). 그의 외모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145cm의 작은 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예쁘장한 얼굴과 가는 목소리. 아이들과 함께 서면 누가 어린이고, 누가 어른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그는 아이를 다섯명이나 키우는 당당한 가장이다. 커다란 트럭에 작은 몸을 싣고, 농사를 지으며 다섯 아이를 키우는 총각 아빠. 피터팬이 아이들 세계에서 대장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김씨도 ‘즐거운 우리집’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사춘기 때는 작은 키 비관해 자살 시도하기도
“새 학기가 시작되니 자모회에 안 갈 수가 없더라고요. 엄마가 없으니 제가 아빠 역할, 엄마 역할을 다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창피해서 혼났어요. 전 총각인데 아줌마들만 있는 모임에 가려니까 발걸음이 안 떨어지더군요(웃음). 모임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나왔어요.”
그의 집을 찾았을 때 방금 자모회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빨래를 널다가 황급히 나가는 바람에 집이 엉망”이라고 걱정하는 그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다. 빨래 걱정, 아이들 걱정, 살림 걱정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은 천생 ‘주부’였다. 그의 하루 일과 역시 여느 집 엄마와 다르지 않았다.
“하루가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몰라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 깨우고, 식사 준비하고, 밥먹여서 학교 보낸 후 집안 청소를 하죠. 그리고 동물들 먹이 주고, 빨래를 해요. 아이들이 많아서 매일 빨아도 빨랫감이 금세 쌓이거든요. 시내에서 일을 볼 때도 아이들 올 시간에 맞춰 서둘러 돌아오지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조금 놀다보면 저녁 먹을 시간이고, 학교 공부 봐주고, 애들 재우고 책 좀 보면 잠들어버려요. 다른 집과 똑같죠?”
그래도 아이들이 개학을 하니까 방학 때보다는 조금 여유가 있다며 웃는다. 야무진 살림솜씨를 보면 주부 경력이 꽤 될 것 같지만 김씨가 ‘엄마, 아빠 노릇’을 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01년 8월, 소외된 아이들과 더불어 살고 싶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친구 황영규씨(36)와 함께 이곳 단양에 내려왔다. 아내가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황씨는 주말부부를 각오하고 남매를 데리고 이곳에 내려왔다. 황씨는 돈을 벌기 위해 단양 시내에서 직장생활을 해 자연히 살림과 육아는 김씨의 몫이 되었다.
“처음엔 동네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남자들끼리 아이를 키우니까요. 더군다나 제가 키가 작으니 어른이 없는 줄 착각하기도 했어요. 한번은 아이들이 다섯명인 줄 알았는데 여섯명이냐며 물어오는 경우도 있었어요. 때로 제가 전화를 받으면 ‘어른 바꿔달라’고 해요. 제 목소리가 가늘어서 어른인 줄 몰랐던 거죠. 제가 아무리 어른이라고 이야기해도 장난하지 말라며 믿지 않아요(웃음).”

왜소증 딛고 5명의 아이들 돌보는 산골 마을의 ‘피터팬 아저씨’ 김영수

그가 트럭을 몰고 읍내로 나가면 “차가 저절로 간다”며 사람들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작은 키 때문에 운전석에 앉으면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때로 “애가 운전을 하면 어떡하냐”며 야단치는 할머니도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반말을 하며 아이 취급을 당하는 일도 다반사다.
“하지만 키가 작아서 좋은 점도 있어요. 일단 사람들이 경계를 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금세 열어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절 너무 좋아하죠. 성인들과 함께 있을 때는 제가 이방인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무조건 환영받아요.”
이미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를 벗어 던진 듯 밝게 웃는 김씨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이겨내야 했던 고통들은 만만치 않았다.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두살 무렵 아버지가 사업에 손을 댔다가 크게 망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셨고 이때부터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형제들은 할아버지 손에 맡겨졌고 어머니는 돈을 벌러 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덟살 때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그는 서울에서 자취를 하던 누나에게 갔다. 국수집을 경영하던 삼촌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일을 돕기도 했다. 어머니와는 초등학교 6학년이 돼서야 함께 살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제일 먼저 절 데리고 병원으로 갔어요. 그때까지도 키가 자라지 않았지만 정확한 원인은 몰랐거든요. 병원에서는 성장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 것이 원인이라고 하더군요. 1백만명 중에 한명 꼴로 나타나는 희귀병이라고 해요.”
네살 때 이미 성장호르몬 분비가 멈췄지만 성장판은 남아 있어 아주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키가 108cm로 유치원 아이들 정도에 불과했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키 때문에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중학교에 들어가 교복을 입으니까 눈에 확 띄었어요. 완전히 놀림감이 되었죠. 예민한 시기여서 키 때문에 무척 비관을 했어요. 하루는 집에 가다 상여가 나가는 걸 봤어요. 순간 산다는 게 다 허무하고 부질없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자살을 결심하고 뒷산에 올라갔어요. 산으로 올라가는데 크고 작은 돌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생각했죠. 그래,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도 있는 거라고. 자살하려는 독한 마음으로 한번 살아보자고 말이죠.”
그때부터 그는 ‘독하게’ 열심히 살았다. 속상할 때면 더 밝고 씩씩하게 굴었고, 남들 앞에선 당당하게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학교 마스코트’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성장호르몬이 나오지 않으니까 2차 성징을 거치지 않았어요. 그래서 수염도 없고, 변성기도 없었죠.”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작은 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하던 무렵 그에게 또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7년 동안 서서히 목이 굵어졌는데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날 목을 만져보니 혹이 있는 거예요. 깜짝 놀라 병원을 찾았죠.”
병원에서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갑상선암은 다른 암에 비해서 완치율이 높았다. 몇달 동안 방사선 치료를 받은 결과 기적처럼 깨끗하게 나았다. 그러나 재발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한달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아야 했다.
병을 앓고 난 후 그는 어릴 때부터 꾸어왔던 ‘고아원 원장’의 꿈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완강하게 반대했다. 앞으로 안정된 목사로서의 삶이 보장되어있는데도 고생을 자처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암투병으로 체력이 많이 약해진 터였다. 가족들에게 진정한 목사의 길은 교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한 후에야 그는 짐을 꾸려 단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왜소증 딛고 5명의 아이들 돌보는 산골 마을의 ‘피터팬 아저씨’ 김영수

김영수씨는 교회목사라는 안정된 미래를 포기하고 상처받은 아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단양에 내려가 ‘즐거운 우리집’을 운영하고 있다.


‘즐거운 우리집’은 김씨가 2개월 동안 강도 있고 교통도 좋은 곳을 찾아 옥천, 영월, 정선 등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폐교를 개조한 것이다. 사옥은 살림집으로, 학교는 캠프장으로 개조했다. 그리고 학교텃밭에 옥수수, 감자, 배추 등 고랭지 특용작물을 심고 토종닭, 오골계, 오리 등을 기르기 시작했다.
현재 ‘즐거운 우리집’ 식구들은 모두 7명. 김씨와 친구 황영규씨, 황씨의 아이들 남매, 그리고 지난해 5월과 6월에 들어온 세명의 아이들이다. 또 삽살개, 진돗개 등 개 6마리도 한가족이다.
“새로 온 아이들 중 두 아이들은 남매였는데, 부모가 너무 아이를 방치한다고 이웃에서 연락을 해왔어요. 엄마는 정신지체 장애인이고, 아빠는 날마다 술을 마시고 엄마를 때렸대요. 그래서 엄마가 가출을 하면 아이들은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아야 했다더군요. 부모 동의를 얻고 데려왔는데 처음엔 정서가 불안해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다른 아이는 남자아이인데, 툭하면 친구들을 때리고 욕을 하는 등 성격이 거칠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씨는 사랑으로 그 아이를 변화시켜 나갔다. 때로 엄하게 때로 한없이 자애롭게 대한 결과, 지금은 많이 안정되었다고 한다. 다른 아이들은 자기 부모가 있어 김씨를 부를 때 ‘삼촌’이라고 하지만 그 남자애만은 김씨를 ‘아빠’라고 부른다. 좀더 부모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 일부러 허락한 것이다.
물 맑고 산세 좋은 이곳에서 그들은 여름이면 냇가에 가서 가재와 새우를 잡고, 겨울이면 눈썰매를 탄다. 며칠 전에는 냉이와 쑥을 캐왔다. 김씨는, 아이들이 어른이 돼서 힘들 때면 무엇보다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으로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몇명 안되지만 앞으로 12명 정도의 아이들과 함께 작은 대안 가정을 꾸려나갈 겁니다. 그렇게 하려면 진짜 엄마를 만들어주어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20대 때 결혼을 할 뻔했어요. 그때는 제가 한 사람의 남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과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랑하던 여자를 떠나보내야 했지만 이젠 그러지 않을 겁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니까요.”
마침 학교 스쿨버스가 도착했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다섯명의 아이들이 “삼촌”하며 매달리고 안겼다. 다섯명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친구들은 어땠는지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 보따리를 그에게 풀어놓기 바빴다. 김씨 역시 아이들이 학교 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만난 사람들처럼 이야기를 했다. “오늘 입고 간 옷이 왜 이렇게 더러워졌어? 손이 너무 시커멓구나. 가서 씻자” 하며 아이들 옷매무새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그에게서 엄마의 사랑이 느껴졌다.
“어릴 때는 신체적 콤플렉스에다가 부모님마저 안 계셔서 무척 힘들었어요.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힘들었던 경험들이 이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 무척 큰 도움을 주는구나 하고 생각해요. 저나 아이들이나 어린 시절에 무거운 짐을 졌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그는 얼마후면 고마운 독지가의 도움으로 성장호르몬을 정기적으로 맞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 지금보다 최고 14cm는 더 클 수 있단다. 그러나 그의 키가 커지는 걸 아이들은 별로 반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어른’이 돼버리면 함께 놀 수 없을 것 같아서다. 물론, 김씨는 염려하지 않는다. 몸은 ‘어른’이 된다 하더라도 마음은 여전히 ‘아이’로 남아 있을 테니 말이다.

여성동아 2003년 4월 4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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