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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여자의 삶

시골 5일장에서 '동동 구리무’파는 아줌마 시인 안효숙

“가난하지만 서로 따뜻하게 감싸안는 시장통 사람들에게서 사는 맛을 배웠어요”

■ 기획·최미선 기자(tiger@donga.com) ■ 글·장다혜 ■ 사진·홍상표

2003. 04. 14

충청도의 옥천장, 신탄진장, 금산장, 영동장, 금요장 등 오일장을 떠돌며 화장품을 파는 장돌뱅이 안효숙씨. 두 아이의 엄마로 자신의 시장판 인생을 고스란히 담아낸 그의 책 '나는 자꾸만 살고 싶다'는 발간 열흘 만에 1만부 이상이 팔려나가며 세인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그의 삶은 책이 발간되기 전 이미 인터넷 피플475닷컴에도 고스란히 녹아들면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바 있다. 비록 가난하지만 추운 겨울 매서운 칼바람을 이겨낸 봄볕 처럼 살아가는 그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시골 5일장에서 '동동 구리무’파는 아줌마 시인 안효숙

안효숙씨(43)가 장터를 생의 터전으로 삶고 떠돌이처럼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연과 남편의 사업실패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만 했던 자신의 얘기를 ‘그 여자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실었을 때 하루 조회 횟수가 수천건에 이를 만큼 그의 글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억척스럽게 살아온 삶이었기에 떠돌이 장꾼의 단단하고 억센 이미지를 떠올리며 안씨를 만났을 땐 참으로 당혹스런 기분이었다.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려 있는 것 같은 순한 눈매와 조용한 말씨는 거친 장돌뱅이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햇볕 드는 담벼락 밑에 조용히 피어 있는 작은 꽃처럼 느껴지는 가녀린 여인의 모습 이었다.
언제부터 오일장을 다니는 장꾼이 되었냐고 물으니 안씨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한 3년 되었다”고 간단히 대답한다. 그 정도 장사 경력이면 어느 정도 장사꾼 기질이 엿보일 만도 하련만 그는 지금도 여전히 구석진 곳에 자리를 펼 만큼 숫기가 없는 편이라고 했다.
“원래 남편이 의류매장을 운영했었어요. 그때는 돈 걱정은 별로 안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IMF가 터지면서…” 여기까지 말을 하던 그는 한참동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5년전 많은 사람에게 아픔을 안겨주었던 IMF는 안씨 가족에게도 어김없이 펀치를 날리며 치유할 수 없는 생채기를 남기고 말았다.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가게는 이미 남의 손에 넘겨졌고 그의 집안에 있는 물건 또한 그 어느 것 하나 남김없이 경매 딱지가 붙었다. 그 딱지 하나하나가 감히 손댈 수 없는 저승사자의 손 같았다는 안씨. 전기도 가스도 모두 끊어진 거실에서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절망감에 쌓여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한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은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날마다 술에 의존해 살았다. 그리고 술에 찌든 남편은 심한 술주정과 함께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다. 망연자실해 있던 남편은 보기에도 위태로운 유리조각처럼 변해갔다.
때문에 남편의 눈을 피해 다니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더 많았던 안씨. 그러나 그런 남편의 모습보다 안씨를 더 참담하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과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내 거리로 내몰려 아이들의 작은 몸 하나 의지할 데 없었던 터라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을 시집에 맡겨야 했던 것. 당시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에 막 올라갔을 무렵이었다.
안씨는 아이들에게 당분간 헤어져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점에 데리고 갔지만 아이들은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은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 모습을 보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살아야지요. 아이들을 위해서 뭐라도 하면서 살아야지요. 남편은 여전히 술에 빠져 살았죠. 그래서 저 혼자 서울로 가서 식당일을 하게 됐어요. 그때 밀입국한 조선족 여인하고 식당 뒤에 딸린 방을 함께 사용했는데 하루 종일 일하고 그 방에 들어서면 서로 위로할 새도 없이 잠에 골아떨어지기 일쑤였어요.”
몸은 고달팠지만 조금이나마 돈을 만질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넘기던 와중에 한달도 채 못되어 뜻하지 않게 식당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는 안씨. 식당으로 찾아온 남편이 행패를 부리며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조건 그를 데리고 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고향 근처로 내려와 싸구려 여인숙에서 생활을 시작했지만 아이들을 데려올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시골 5일장에서 '동동 구리무’파는 아줌마 시인 안효숙

장사를 마치고 아이들이 잠든 옥탑방으로 돌아오면 안씨는 거의 매일밤 인터넷에 장터얘기를 쓴다.


안씨는 식당에서 번 돈으로 손수레를 마련해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지만 매일같이 빚독촉에 시달려야 했다. 붕어빵 판 돈으로 빚을 갚는 것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먹을 것을 해결하기에도 빠듯할 만큼 빈곤한 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나 빈곤보다 더 참기 힘들었던 것은 남편의 태도였다. 날마다 술에 절어 사는 남편은 폭언을 일삼으며 대충 살자고 했다. 눈에 아른거리는 아이들이 엄마를 그리며 떨어져 살고 있는데 어떻게 대충 산단 말인가. 그럴 때마다 안씨는 남편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무슨 결심을 했는지 배를 타고 일본이나 중국으로 나가 보따리 옷장사를 하겠다고 했다.
“여기 있어봤자 노점상밖에 할 게 없고 그렇게 버는 돈으로는 배고픔밖에 해결하지 못한다면서 외국에 나가 돈을 벌면 부쳐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이 외국으로 나가겠다고 했을 때 붙잡지 않았다는 안씨. 그가 남편에게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돈을 벌어다주는 것보다 ‘폭력 남편과 아빠가 아닌 가족을 아껴주는 가장’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었다.
외국을 돌며 옷이라도 팔아보겠다며 남편은 행상을 떠났고 그녀는 매일 손수레를 끌고 나가 빵을 구워 팔았다. 남편이 떠나고 난 후 안씨는 대전에서 집값이 가장 싼 지역의 산언덕배기에 있는 방을 구하면서 여인숙 생활을 접었다. 남편이 떠난 후 홀로 남은 그는 당시 혼자 쓸쓸하게 지냈던 6개월의 생활을 이렇게 글로 풀어냈다.
‘하루 종일 손수레에서 붕어빵을 굽고 집으로 돌아오면 불이 꺼져 있다. 아무도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다. 열쇠를 찾아 방문을 열면 어둠이 방안에 깊게 고여 있었다. 방안에 들어서면서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아이들을 데려오려면 힘을 내야 하는데… 기껏 죽지 않으려고 밥을 먹었다. 밥이 안 넘어가면 죽지 않으려고 죽을 끓여 먹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오려면 방 한칸이라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돈을 한푼이라도 아껴야 했어요. 그때 수제비 참 많이 먹었어요. 붕어빵 만들고 남은 밀가루로 수제비를 끓이면 바닐라 냄새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게 참 역겨웠지만 쌀 한톨 사는 돈도 그때는 아까웠어요.”
1백원짜리 동전까지 아껴가며 몇푼의 돈을 모아 산언덕에서 내려와 옥천의 한 시골마을에 있는 빈집을 구해 아이들을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딸아이가 엄마랑 헤어지면서 충격을 받았는지 갑작스럽게 시력이 떨어져 보기만 해도 눈이 빙글빙글 도는 커다란 잠자리 안경을 썼어요. 그때 딸아이가 저한테 이렇게 말하더군요. 엄마와 헤어지고 나서 속울음을 많이 삼켰다고요. 더 이상 아이들과 헤어져 있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아이들을 데리고 왔어요.”
막상 아이들을 데리고 오긴 했지만 사는 형편은 여전히 힘들었다. 때문에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아이들을 보면 그동안 꽁꽁 얼어붙은 것만 같았던 몸에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는 안씨.
옥천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한 2년은 가난했지만 그녀에게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풍경도 아름다웠고 시골 사람들의 인심도 아름다웠다. 비록 임시고용직이었지만 면사무소에서 일을 하는 행운도 얻었다. 아이들이 있으니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던 길목도, 아담한 채송화가 피어있는 이웃집 마당에서 뚝뚝 떨어져 내리는 ‘능소화’ 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 했다. 하지만 그런 소박한 행복의 시간도 남편이 돌아오면서 더 이상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남편은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남편의 술버릇과 폭력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참다 못한 그는 남편과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남편을 피해 아이들과 함께 또 다시 보금자리를 옮겨야 했다.
“사람을 포기한다는 게 쉽진 않지만 우연히 딸아이의 일기를 보고 나서죠.”
그러나 안씨는 남편에 대한 얘기도, 딸아이의 일기 내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현재 여성보호센터의 보호 아래 대전으로 나오면서 음식점이 즐비한 동네 상가에 있는 옥탑방을 구했다. 어른은 허리를 구부려야만 들어갈 수 있는, 천장이 유난히 낮은 다락방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마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살던 집 같다, 창문으로 별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하면서 오히려 엄마를 위로하는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시골 5일장에서 '동동 구리무’파는 아줌마 시인 안효숙

비록 허름하고 작은 옥탑방이지만 두아이와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뿌듯하다고 하는 안효숙씨.


방은 어떻게 구했지만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시골에서는 그나마 적은 돈으로도 생활이 가능했지만 도심에서 느끼는 빈곤은 그대로 살 속을 파고드는 한겨울 칼바람 같았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아들의 학비도 문제였다. 안씨는 무작정 학교로 찾아가 교장선생님한테 딱한 사정을 얘기해 보기로 했다.
“지금 대전에 있는 두 아이들 학교 교장선생님 은혜는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거예요. 그동안 제 얘기를 하고 학비에 대한 얘기를 했더니 교장선생님이 오히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고 하면서 아무 걱정 말고 아이를 학교에 맡기라고 하셨죠. 그때 정말 너무 고마워서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어요.”
다행히 아이 학비는 해결되었지만 생활비가 문제였다. 안씨는 생활정보지를 한아름 들고와 이곳저곳을 찾아보다 대형마트에서 생필품을 판매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하지만 전화로 통화한 내용과는 달리 안씨에게 맡겨진 것은 4차선 도로에 서서 면도기를 파는 일이었다.
“저처럼 잘 모르고 온 사람들을 봉고차에 태우더니 도로에 내려놓고 차가 가버리는 거예요. 마트에서 일하는 건 줄 알고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하얀 민소매 상의에 검은 치마를 입고 출근을 했는데 그런 차림새로 도로에서 면도기를 판다고 생각해보세요. 장난을 치려는 운전자들이 경적을 울려대기도 하고…. 처음엔 용기가 나질 않아 두시간 동안 그냥 서 있기만 했어요. 그러나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겠기에 근처 슈퍼에 가서 소주 한 팩을 사들고 와 단숨에 들이키고 용기를 내어 면도기를 팔았지만 남는 게 별로 없었어요.”
면도기를 파는 것도 매일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그 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때문에 다른 일을 찾으려는 참에 그런 안씨를 보다 못한 친척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화장품 공장을 하는 친척이 안씨에게 화장품을 무료로 대주며 충청도 지방에는 여러 지역에서 오일장이 서니까 그곳에서 장사를 해보라는 말까지 일러주었다.
“그때부터 오일장을 다니기 시작한 거예요. 처음에는 너무 부끄러워서 구석진 곳만 찾아서 자리를 폈어요. 화장품도 나름대로 예쁘게 진열해놓고요. 처음에는 한개도 못 팔았지만 무료로 받은 화장품이라 마음은 편했어요,”
장터에 나가 일을 해보니 가난한 건 안씨만이 아니었다. 빨래집게를 파는 아줌마, 목도리를 둘둘 감은 채 눈만 빠끔히 내놓고 물러터지다시피한 감 몇개를 앞에 놓고 하루 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 장터에 나와 있는 아주머니들은 모두 어린아마냥 콧물을 훌쩍이고 있었고 그 콧물을 닦아내는 손등은 하나같이 터지고 손마디 끝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면서 안씨는 늘 가슴 한켠에 찡한 무언가를 담고 살아야 했다.
“한해 동안 피땀 흘려 농사지은 먹을거리를 팔려고 오일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손끝을 보면 대부분 얼어 피가 맺혀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괜히 눈물이 나요. 그래서 제가 손에 바르는 화장품을 하나씩 돌렸더니 화장품을 받아든 아주머니들은 제게 시금치, 파, 무… 이런 것들을 주세요. 싫다고 하면 막 혼내면서 안겨주고 가죠.”

시골 5일장에서 '동동 구리무’파는 아줌마 시인 안효숙

남편 사업이 부도난 후 거리로 내몰려 아이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을 때 가장 가슴아팠다는 안씨.


오일장을 다니면서 그녀가 느낀 것은 사람 사이의 정이었다. 구석진 곳을 찾는 그녀에게 장터 사람들은 자신들의 옆자리를 기꺼이 내주었고 비가 오면 함께 비닐천막도 쳐주었다. 그래서 장돌뱅이 일이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장사수완이 부족한 그는 화장품을 많이 팔지는 못했다. 그저 하루 벌어 하루 생활할 만큼씩만 팔려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한 친구가 와선 그에게 장사하는 방법을 바꾸라고 조언을 하고 갔다.
“어차피 난전 장사니까 장사도 싸구려처럼 하라고 하더군요. 예쁘게 진열하지 말고 물건을 한꺼번에 다 쏟아놓으라고 했죠. 그래야 화장품 값이 싼 것처럼 보인다고요. 그러면 사람들이 몰려들 거라고 하더군요.”
안씨는 친구가 시키는 대로 했다. 길바닥에 물건을 쏟아놓고 앉아있길 일주일. 거짓말처럼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밍크코트가 어울릴 것 같은 멋쟁이 아줌마가 친구들에게 선물한다며 많은 양의 화장품을 주워담기도 했다. 처음으로 주머니가 두툼해지면서 몸은 차가운 맨땅 위에 있었지만 마음은 따뜻한 봄날 같은 느낌이었다. 딱히 화장품이 잘 팔려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화덕 위에 올려진 구운 가래떡을 사서 장터 사람들과 나눠 먹으면서, 할머니 손을 이끌고 와 ‘동동 구리모’를 참깨와 맞바꿔가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보면서 그의 얼었던 마음에도 봄볕이 스며들었던 것이다.
‘질긴 것이 목숨보다 더하다’고 소리치며 1천원에 다섯켤레짜리 양말을 파는 아저씨, 시어머니에 시할머니를 병수발 5년 만에 떠나보낸 후 이제는 시아주버니 병수발을 한다는 두부장사 아줌마, 어미 없는 손자녀석 과자값이라도 벌어야 한다며 호두 몇알을 들고 나온 할머니…. 그들을 바라보면서 안씨는 더 이상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장바닥에는 힘들어도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제 그도 그들과 함께하는 오일장 떠돌이 장꾼이 되었기 때문이다.
난전을 마치고 아이들이 잠든 옥탑방으로 돌아오면 안씨는 거의 매일밤 인터넷에 장터 얘기를 썼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봄바람처럼 느껴지는 장터 사람들의 인정과 민들레 같은 서정이 담긴 글을 읽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방을 두드렸다. 실제로 인터넷에 실린 그녀의 글을 읽고 추위에 손을 녹이라고 작은 ‘손난로’를 들고 서울에서 충청도 오일장을 찾아오는 이도 있었다.
한때 엄마보다 더 어른스러웠던 딸은 엄마에게 이런 시를 썼다.

‘이다음에 크면 엄마에게 비단신을 신겨드릴 거예요./ 커다란 궁전을 지어 엄마가 좋아하는 책이 가득한 도서실도 만들어드리고/ 고생하는 엄마를 위해 엄마의 시중을 들어드릴 사람도 구해드리고/ 엄마에게 비단옷을 만들어드릴 거예요./엄마가 좋아하는 꽃이 가득한 넓은 정원도 꾸며드리고/ 엄마의 식탁에는 날마다 백 개의 촛불을 켜드릴 거예요/ 그리고 엄마가 가고 싶어하는 나라 여행도 시켜드리고/ 나는 엄마에게 효도할 거예요/엄마 제가 클 때까지 참으세요/ 엄마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드리겠어요’



너무 어른스러워서 걱정했던 딸이 이제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사고 싶어하는 열네살 사춘기의 소녀로 접어들었다. 그보다 두살 많은 아들은 아들대로 어느새 늠름하게 자라주었다. 올곧게 자란 두 아이를 바라볼 때 그는 이미 왕관을 머리에 쓴 기분이라고 했다. 이제 그는 작은 옥탑방에서 다시 행복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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