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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울림이 있는 웃음

'솔로몬의 선택'에서 기발한 애드리브로 인기 끄는 변호사 김병준

■ 글·조득진 기자(chodj21@donga.com) ■ 사진·지재만 기자

2003. 03. 31

개그맨 뺨치는 입담과 예상 밖의 애드리브로 시청자들을 웃기는 변호사가 등장했다. 생활 속 법률 이야기를 다룬 SBS 프로그램 '솔로몬의 선택'에 출연중인 김병준 변호사가 그 주인공. 옆집 아저씨 같은 외모에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인기를 얻고 있는 그는 의외로 사법고시에 합격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은 남다른 사연을 갖고 있다. 그가 솔직하게 털어놓은 지난 이야기.

'솔로몬의 선택'에서 기발한 애드리브로 인기 끄는 변호사 김병준

SBS TV \'솔로몬의 선택\'에서 구수한 입담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김병준 변호사.


재작년 겨울, 대구 청구고등학교 동창회 자리. 오랜만의 만남에 술잔이 몇 차례 돌아가자 동창들은 저마다 옛 추억에 취해, 술에 취해 발그레한 얼굴들이었다. 김병준 변호사도 그중 한명. 한참 떠들썩한 분위기를 뚫고 지각생 동창 하나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섰다. 김변호사는 오랜 기억의 저편에서 그가 고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으며 그후로 통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임을 떠올렸다.
“반가운 마음에 술을 한잔 권하고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 친구 방송국에서 PD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 술김에 ‘요즘 변호사들 뉴스나 시사프로에 잘 나오더라. 나도 그런 데 얼굴 좀 내밀어보자. 네가 한번 추진해봐라’ 했죠. 개업한 지 얼마 안돼 사건 수임도 별로 없고 해서 방송국에 나가면 뭐 좀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지만 큰 기대는 없었어요.”
그렇게 잊고 지내던 지난해 여름, 그 PD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변호사 네명이 패널로 출연하는 프로그램 하나를 기획중인데, 출연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패널 중 한 사람이라도 만만한(?) 사람이 있어야 되지 않겠냐는 말과 함께. 그 프로그램이 바로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솔로몬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 친구, 내가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인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사실 고교 시절까지만 해도 조용한 편이었거든요.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교 담을 넘거나 밤거리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잘 나가는 친구도 아니었고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죠.”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카메라 앞에서 긴장하지 않고, 능수능란한 유머로 좌중을 웃게 만드는 기술을 갖게 했을까? 고교 시절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던 그가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패스한 것도 또다른 궁금증. 올해로 마흔두 살, 어려서부터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모두 치렀다는 그의 굴곡진 인생에서 오늘의 ‘해피데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북 군위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다. 처음 몇년은 친척집에서 신세를 졌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70년대 말, 누구나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그의 경우는 더 심했다. 지금은 고향 군위에서 하숙을 치고 계시지만,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콩나물 장수, 연탄 장수를 하시며 네 남매를 키우셨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대구에 있는 셋째아들에게 보낼 돈이 넉넉지 않았다. 그는 늘 허기져 있었고, 대학시절에도 생활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솔로몬의 선택'에서 기발한 애드리브로 인기 끄는 변호사 김병준

아내, 아들 현수와 함께. 요즘 이 집안의 구호는 ‘아빠! 최고 최고, 엄마! 예뻐 예뻐, 현수! 도아 도아(좋아 좋아)’다.


“혼자 살다보니 먹는 게 늘 부실했죠. 끼니를 거르기도 일쑤고. 그러다보니 한번에 왕창 먹어두는 버릇도 생겨 위장병을 달고 살았어요. 대학 때는 45㎏에 허리가 25인치여서 여자 바지를 사서 입을 정도였다니까요.”
대학 졸업 후 군대를 지원했지만 신체검사에서 떨어져 ‘방위병’생활을 했다.
86년, 당시 14개월의 짧은 군복무를 마친 그는 다시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그다지 높지 않은 학력고사 점수에, 억지로 맞추어 들어간 대학에선 흥미도, 미래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졸업과 동시에 직장에 취직하는 평범한 생활은 하기 싫었던 것이다. 목표는 사법고시, 우선 법대에 들어가야 했다. 그 목표대로 이듬해인 87년, 성균관대 법대 합격자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끝내 입학은 좌절됐다. 어려운 집안 형편은 그에게 입학금을 대줄 수 없었던 것이다. 입학금만 있으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학에 다니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유가 없었다.
“결국 다시 취직준비를 했어요. 그해 여름에 한국통신에 합격했죠. 꿈을 접고 들어선 길인데 직장생활인들 어디 신바람이 나겠어요? 현실이라는 족쇄가 무거웠고, 그렇다고 박차고 나갈 만한 용기도 없었어요. 그저 하루하루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으로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던 차에 사법고시를 향한 그의 의지에 불을 당긴 일이 발생했다. 바로 스물다섯 한창 나이인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군대를 제대한 동생이 어느날인가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어요. 고교 때 육상선수까지 했던 건강한 아이라 처음에 그냥 지나쳤는데, 어느날은 어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안되겠다 싶어 병원에 데리고 갔죠.”
이런저런 검사를 해보던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더 큰 병원으로 가보는 것이 좋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대구 시내 한 대학병원을 찾아 정밀검사 끝에 나온 결론은 ‘백혈병’. 원인은 알 수 없으며, 너무 늦게 발견돼 희망이 없다는 진단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죠. 백혈병 치료로 유명하다는 병원들은 다 돌아다녔어요. 그러나 하나같이 수술이 불가능하며, 다른 치료방법도 없다고들 하더군요. 그렇게 6개월을 이 병원 저 병원 떠돌다가 끝내 세상을 등지고 말았어요.”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이듬해 평생 농사일로 고생만 하시던 아버지가 동생의 뒤를 따른 것이다. 가족의 죽음을 보며 그는 가슴속 깊이, 삶 자체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제 생애에서 가장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어요. 한번 사는 짧은 인생, 그냥 주어진 환경에 안주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걸을 것인가. 결국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기차 타고 올라와 신림동 고시촌에 입성했죠.”
그때 그의 나이 서른. 빠른 사람들 같으면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판·검사나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할 나이에 그는 고시촌 문을 두드린 것이다.

'솔로몬의 선택'에서 기발한 애드리브로 인기 끄는 변호사 김병준

벌써 다음 카페엔 팬클럽도 생겼다.<br> 아이, 여성 팬에서부터 고시 지망생까지 다양하다.


뜻을 세우면 길이 보인다고 고시촌에서 육법전서와 조우한 이래 그에겐 행운이 따르기 시작했다. 92년 초 성균관대 법학과 편입 공고가 났고, 입학금이 없어 포기해야만 했던 그 대학에 드디어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게다가 대학에서도 만년 고시생들을 만나 그들이 수년에 걸쳐 터득한 노하우를 짧은 시간에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는 늦은 만큼 더 열심히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97년 드디어 꿈에 그리던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오랜 세월 꿈꿔온 목표에 도달한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서른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게 도와준 ‘일등공신’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앞섰다.
“아내는 한국통신에 다닐 때 만났어요. 저보다 1년 늦게 입사한 친구였는데 저를 잘 따랐죠. 저 지금은 망가진 몸매지만 그땐 인기 많았답니다. 허리도 날씬하고 나름대로 유머 감각도 뛰어나 사내 여직원들이 군침을 삼키던…, 하하.”
고시공부를 하겠다고 서울에 올라온 이후에도 그에게 아내는 외로울 때 전화할 수 있는 사람, 공부 진도가 더딜 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람이었다. 여름방학 때 한번 다녀가라는 예비 장모님의 말씀에 대구에 내려간 어느날, 그는 훈시와도 같은 장모님의 결혼 이야기에 그 자리에서 ‘언약’을 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사윗감이 멀지 않은 장래에 변호사가 될 것을 미리 짐작이라도 하신 걸까?
“93년 여름, 당시 학생 신분이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결혼식을 올렸죠. 하지만 결혼 후에도 우리는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제 공부 뒷바라지를 하느라 아내는 대구에서 직장을 다녀야 했거든요. 그렇게 꼬박 3년을 주말부부도 아닌 월말부부로 살았죠. 한마디로 결혼만 했을 뿐이지 아내는 청상과부였던 셈이죠.”
요즘은 “돈 못 벌어오는 변호사도 변호사냐?”며 따지는 아내지만 어려운 시절을 함께해준 아내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다고. 게다가 ‘얼떨결에’ 태어난 두돌배기 아들의 재롱에 요즘은 집으로 향하는 걸음이 늘 바빠진다고.
TV를 통해 보는 그의 모습은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권위적이고 뻣뻣한 변호사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냥 친구에게 말을 건네듯 소탈하고 다정다감한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것. 다른 변호사들이 거쳐온 엘리트 코스가 아닌, 많은 어려움을 겪어낸 인생역정이 그처럼 편하고 서민적인 모습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난 2000년 법률사무소를 낸 이후 민사에서 형사·행정 사건, 이혼소송까지 그가 맡고 있는 분야는 다양하다. 특이한 점은 그에게 이혼소송을 맡겼다가 소를 취하하고 다시 합친 부부들이 많다는 점. 그나마 헤어지는 부부도 법정까지 가기보다는 쌍방의 합의로 원만하게 해결되곤 했다.
“저는 모든 일이, 특히 사법시험의 경우 ‘운칠기삼’이라고 봐요. 실력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운이 많이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더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제 경우 공부하고자 할 때 편입제도가 생겼고, 또 시험 보는 해 사법시험 합격 정원이 늘었거든요.”
그러나 어디 운 덕분이었을까. 운을 잘 타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도 실력이 밑바탕에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 행운은 그것을 잡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온다고 하지 않는가.
“변호사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기반을 못 잡았어요. 빚도 많고요. 아내에게 농담으로 ‘열쇠 몇개는 가져와야 하는 거 아니냐?’ 했더니 ‘공부시키느라 열쇠 10개는 더 팔았다’고 하더군요, 하하. 앞으로 기반이 잡히면 어려운 사람, 소외된 사람을 위한 공익소송을 하고 싶어요. 그들이야말로 지금껏 함께 살아온 제 이웃이니까요.”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의 넉넉하고 소탈한 웃음에 만족하며 일어서려는 기자의 소매를 그는 “아, 한마디만 더!” 하며 잡아당겼다.
“거,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고. 출연료 좀 올려달라고 좀 써주세요. 일산까지 가서 반나절을 보내는데, 세금 떼고 기름값 빼면 남는 게 없어요. PD 친구에게 이야기해도 효과가 없더군요. 자꾸 올려달라고 하면 ‘너 없어도 출연할 사람 많아’ 할까 봐…, 하하.”
힘겨웠던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종일관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던 그는 끝까지 기자의 입가에 웃음을 번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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