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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프런트 에세이│안도현

참여하는 봄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안도현 ■ 사진·조영철 기자

2003. 02. 28

지난달 나는 육로로 금강산에 다녀왔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의 운명 위에도 언젠가는 햇볕이 드는 봄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을 위해 올봄에는 속주머니 속의 지갑을 나 아닌 사람을 위해 한번쯤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 ‘로또’의 허망함 대신 우리 민족의 삶을 반전시키는 거대한 꿈을 꿔봄이 어떨까. 때론 이렇게 참여하는 봄을 기다려보자고 말하고 싶다.

참여하는  봄

요 며칠 사이 베란다로 햇볕이 마구 뛰어드는 것 같다. 예사롭지 않다. 겨우내 아파트 창문 밖에서 머뭇거리기만 하던 햇볕이 창을 뚫고 베란다로 뛰어드는 것이다. 햇볕에 발이라도 달린 것일까. 자박자박 발소리라도 날 것 같다.
나는 소사나무 분재 앞에 쪼그리고 앉아 햇볕을 받는다. 손바닥에 받쳐들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햇볕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아무래도 내 손바닥이 아니라 소사나무 부근이다. 나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소사나무는 최대한 가지를 벌리고 햇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잎눈이 눈을 뜨려는지 나뭇가지에는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돈다. 어린아이가 잠에서 막 깨어나 눈을 뜨기 한 5초 전의 표정을 하고 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까지만 세면 연초록 이파리가 고개를 내밀지도 모른다. 비록 고층 아파트의 베란다에 분재라는 형태로 갇혀 있는 나무이지만, 그도 이 세상의 봄을 불러오는 일에 얼마나 참여하고 싶을까.
참여라는 말이 자주 귀에 들린다. 새로 출범한 정부도 ‘참여정부’를 표방하였다. “국민의 참여가 일상화되는 참여 민주주의의 단계로 발전시키겠다는 점과 진정한 국민주권, 시민주권의 시대를 열겠다는 의미”로 정부의 애칭을 그렇게 정했다고 한다.
말은 시대와 함께 숨을 쉰다. 하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숨을 쉬지 못하고 움츠린 채 지내야 했던 말도 있다. 참여라는 말도 정부의 공식적인 언어가 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은 말 중의 하나다.
지난 60, 70년대에 순수-참여 문학 논쟁이라는 게 있었다. 참여문학론자들은 문학이 당대 현실과 민중의 삶을 외면해서는 안되며, 작가란 고독한 개인으로서의 예술가이기 전에 사회 속의 한 인간이므로 투철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창작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순수문학론자들은 문학예술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작가의 현실 참여는 정치에의 예속 혹은 정치적 의도에 의한 불순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렇듯 매우 원론적 수준에서 오고가던 논쟁이 불을 뿜게 된 것은 참여문학론에 대해 좌파적 이데올로기의 혐의를 덧씌우면서부터다. 현실에 관심을 갖는 모든 문학은 이때부터 ‘좌익’으로 의심을 받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논쟁이 시마저 순수시와 참여시로 두 동강 내어 이해하는 현실을 배태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순수’와 ‘참여’로 시를 양분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평소 우리 시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이분법에 바탕한 말이 나올 때마다 나는 그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고 싶었다.
이제 그런 바보짓거리를 그만둘 때가 되었다. 저기 저 산과 들의 나무들도 봄을 만드는 데 순수하게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

참여하는  봄

월드컵 응원 열기가 한창 고조되어 있을 때, 사람들은 서로 이렇게 묻곤 하였다.
“너도 붉은 티셔츠 샀어?”
‘Be the Reds’(붉은 악마가 되라)가 적힌 티셔츠를 구입했냐는 물음이었다. 청소년들이야 붉은 셔츠에 대해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붉은 셔츠를 입고 응원에 참여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40대 이후의 세대, 반공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기성세대에게 붉은 티셔츠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 무엇이었다.
근대의 시작과 함께 한국인에게 붉은색은 오로지 좌파의 다른 이름이었다. 사회주의자를 ‘빨갱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운 나라가 한국이다. 심지어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에서는 빨간 모자를 쓰고 다니다가 좌파로 몰린 사람도 있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전해진다. 최근까지도 출판물이나 광고물의 표지에 붉은색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을 경계하는 풍토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붉은색은 겨우 거리의 우체통, 헌혈을 관장하는 기관의 적십자 상징, 여성들이 입는 겨울 양말과 내의에서만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붉은색이 당당했던 시절도 있었다. 조선시대 왕들의 정복인 곤룡포는 붉은 비단으로 지어졌다. 정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왕 이외의 신하들이 붉은 옷감의 옷을 입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왕실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붉은색은 재앙과 악귀를 물리치는 의미로 곧잘 쓰였다. 새집으로 이사를 할 때 붉은 팥죽을 쑤어 액운을 제거하는 풍습이나 아들을 낳았을 때 금줄에 붉은 고추를 여러 개 꽂아두는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붉은색은 태양과 젊음, 숫처녀를 상징하는 역동적인 색이었다.
월드컵의 응원 열기와 함께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는 동안, 나는 그 붉은 티셔츠를 한번도 입지 못했다. 그 당시야 빨간색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왠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붉은색으로 일체가 되어 무의식중에 포옹하고 껑충껑충 뛸 때, 내 마음속의 레드 콤플렉스는 쉽게 가슴을 열지 않았다. 내가 적극적으로 응원에 참여하는 것을 붉은색이 뜯어말렸던 것이다.
며칠 전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이런 광고 문구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붉은 힘을 모읍시다’
물론 헌혈에 참여하자는 취지의 광고 카피였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게 ‘공산주의자를 모읍시다’라는 뜻으로 자꾸 읽히는 것이었다. 지하철 의자에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참여하는  봄

지난달에 금강산 육로 시범관광단의 한 사람으로 금강산에 다녀왔다. 뱃길로 두어 번 취재차 다녀온 터라 사실 금강산에 대한 설렘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반세기 만에 비무장지대 안에 뚫린 육로를 통해 북으로 간다는 것, 유람선 안에서 잠을 자면서 가지 않고 대명천지에 눈을 번쩍 뜨고 간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자못 흥분되어 있었다.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1.2km, 북쪽으로 300m쯤 새로 닦은 길을 지나자 북한쪽 통문이 나왔다. 인민군들이 군데군데 경계를 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북한 땅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사람도 사람이지만 병사들의 등 뒤로 펼쳐진 산이 그렇게 황량할 수 없었다. 키가 1m가 넘는 성성한 나무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민둥산이 전부였다. 안내를 맡은 관광 조장의 이야기를 들어본즉, 나무를 땔감으로 써왔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금강산 온정리 부근에서 청솔가지 한단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는 소녀를 보면서 북쪽의 연료 사정이 어떤지 짐작이 갔다. 눈이 녹으면서 질척질척해진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소녀를 붙잡고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었지만, 그 아이와 나 사이에는 한길도 넘는 철책이 가로놓여 있었다. 나는 그 소녀의 삶에 참여할 수 없었고, 그 아이도 내 삶에 참여할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참여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편의 삶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올봄에는 속주머니 속의 지갑을 나 아닌 사람을 위해 한번쯤 열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지갑에서 뭉칫돈을 내놓으라는 말이 아니다. 로또복권으로 인생의 반전을 꿈꾸는 일이 얼마나 허망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이제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민족의 삶을 반전시키는 거대한 꿈을 구상해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1천원씩을 모으면 4백억원이 되고, 1만원씩을 모으면 4천억원이 되는 ‘대박’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데 팔짱을 낀 채 방관하거나 지나치게 간섭만 하고 있을 것인가.
대지에 봄이 찾아오듯이 우리 민족의 운명 위에도 언젠가는 햇볕이 드는 봄이 찾아올 것이다. 그날이 와서 지난 겨울에 북한 어린이에게 우유 한통, 내의 한벌 사준 일밖에 없어 부끄럽다고 말하는 사람이 좀 많아져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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