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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향기로운 사랑에 대하여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박범신 ■ 사진·최문갑 기자

입력 2003.01.13 10:17:00

나는 ‘사랑은 잘츠부르크의 암염과 같다’고 말한 스탕달의 잠언을 잊지 않는다.
유리그릇 같은 사랑을 금강석 같은 재질로 만들기 위해선 자기희생의 인내와 시간의 세례를 견뎌내는 힘이 필요하다.
깊고 향기로운 사랑에 대하여
프랑스 작가 스탕달은 그가 쓴 에서 사랑을 가리켜 “잘츠부르크의 암염(巖鹽)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고향이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잘츠부르크는 질 좋은 소금이 많이 나는 고장으로 더 유명했다. 땅에서 나는 염화나트륨의 결정이 바로 암염, 돌소금이다. 바닷물에서 채취한 소금보다 순도가 훨씬 높은 암염은 지각변동에 의해 거대한 숲이 땅에 묻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형성된 것이다. 무색, 투명의 이 백색소금이 알고 보면 지층에 눌린 숲의 나무들이 부식되어 생겨난다는 점이 놀랍다.
사랑은 희열인가. 물론 사랑은 극적인 충만감과 기쁨과 쾌락을 동반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은 절대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과 현실적인 결핍 때문에 끝없는 내적 분열의 함정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일반적으로 충만감과 기쁨과 쾌락은 짧고 번뇌의 고통은 길고 깊다.
‘잘츠부르크의 암염’이 은유하는 사랑의 두가지 특성. 스탕달이 염두에 둔 첫번째 특성은 바로 땅 밑의 어둠을 꿋꿋이 견뎌내는 인내를 말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무가 땅 속에서 투명하고 유익한 결정체가 되기 위해선 음습한 어둠과 무거운 지층의 압력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 작은 결핍 때문에 받아야 하는 상처들과 절대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것에서 생기는 내적 분열의 번뇌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사랑의 기쁨은 찰나적 기쁨으로 끝낼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필요한 덕목은 결핍과 분열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나무가 땅에 묻혀 썩듯이 내가 ‘썩는’ 고통스런 과정이다. 내가 썩어 없어지지 않고 어떻게 타인의 자아가 내 안으로 들어와 소금 같은 빛나는 결정체로 자리잡을 수 있겠는가. 인용이 좀 길지 모르지만, 철학자 헤겔의 다음과 같은 잠언도 바로 사랑의 그런 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본다. 헤겔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에서 첫번째 계기는 내가 나만의 독립된 인격이고자 하지 않는 것, 또 독립적이고자 하더라도 나 자신을 결점이 많은 불충분한 것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계기는 내가 한 사람의 인격에서 내 자신을 획득하려 한다는 것, 내가 다른 사람 속에서 보람을 얻으며 또 다른 사람도 내 속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최대의 모순이며 이성으로 이 수수께끼를 풀 수는 없다. 부정이면서 또 긍정적인 자기의식의 미묘함이 사랑에서처럼 어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순을 낳는 동시에 그것을 풀어 나가는 것이다. 모순을 푸는 것으로 사랑은 윤리적 합일점에 도달한다.”
다시 스탕달로 돌아가서 ‘사랑은 잘츠부르크의 암염과 같다’는 비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완성된 사랑의 두번째 덕목을 살펴보자. 그것은 시간의 문제다. 나무들이 소금이 되려면 오랜 시간의 세례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시간의 세례를 통과하지 않은 사랑의 불꽃이란 언제 사그라질지 모르는 매우 불온하고 불안한 불꽃일 수밖에 없다. 스탕달은 사랑이 진정함을 얻으려면 시간과의 투쟁에서 이겨내야만 한다는 것을 ‘잘츠부르크의 암염’을 빌려 절묘하게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결핍과 상처에 눌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라는 시간의 맹세를 저버리고 쉽게 이혼에 도달하고 마는 요즘의 풍조에선 사랑의 참된 윤리적 합일점에 도달할 수 없다. 부식과 숙성의 시간을 통과해야만 나무들은 썩어 아름다운 결정체 소금이 되는 것을.

깊고 향기로운 사랑에 대하여
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의 이혼율이 2백16쌍당 1쌍이라고 한다. 놀라운 통계가 아닐 수 없다. 이유는 여러가지로 꼽힌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이유는 여성의 의식화일 것이다. 90년대 우리는 사회, 문화적으로 강렬한 페미니즘의 폭발을 경험했다. 오랜 민주화운동의 당연한 결과였다고 본다. 누구의 아내이기 이전에 어머니이자 누이들인 여성들이 수대에 걸쳐 받아온 비인간적 차별을 생각하면 80~90년대 페미니즘 폭발은 오히려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가부장제의 비인간적인 이데올로기로 여성을 묶어두고서야 어떻게 참된 민주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하지만 놀라운 이혼율을 보라. 이혼은 당사자들의 상처에서 끝나지 않는다. 결혼은 제도권의 인정과 뒷받침을 확보하는 것으로 사회계약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부부해체는 곧 가족의 해체가 되며, 그렇기 때문에 분열과 고통은 다른 많은 이들에게 전가된다. 가장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는 사람은 아이들일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부부를 적대적 관계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우리는 혼인서약에서 서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며 살겠다고 맹세했다. 성서의 비유를 빌려 말하자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를테면 자기 자신을 추월하는 지름길로, 삶을 향기롭게 하고 견실하게 하는 무형의 소중한 재산임을 혼인서약에서 우리는 피차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거기엔 ‘소중한 재산’을 잘 지켜내고 더 발전시키라는 무언의 요구가 물론 덧붙여져 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자기희생은 곧잘 간과된다. 사랑의 달디단 과실(果實)만을 꿈꾸었지 내가 과실을 익히기 위해 물을 주고 바람을 막아주고 또 햇빛을 잘 받도록 불철주야 애써야 한다는 의무는 염두에 두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렇다. 세상에 공짜로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것이 어디 있는가. ‘과실’만을 생각하면 실망과 좌절은 거의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매양 그가 나와 같이 생각하고 나와 같이 행동하기를 바라지만 나 같은 다른 이는 단 한명도 없을 뿐더러, 더 나아가 나와 같으면서 ‘좋은 것’을 더 갖고 있는 이를 바란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사랑을 ‘우연한 것’으로만 간주하는 어리석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많은 젊은 부부들이 왜 그는 나처럼 생각하고 나처럼 행동하지 않느냐,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본다. 애당초 사랑보다 그가 줄 ‘과실’에 마음을 많이 둔 결혼은 더더욱 그렇다. 요컨대 이혼율은 ‘참을성’과도 관계 있다는 것이다. 결혼생활에서 참을 만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참아 얻어내고 싶은 어떤 이상도 없을 때 혹은 그가 참는 건 전혀 보지 못하고 오로지 나만 일방적으로 참고 있다고 느낄 때, 그 관계는 깨어진다. 사랑의 완성을 우연에 의존하려 하면 참고 견디는 일은 절대 계속되지 않는다.
이혼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부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대영제국의 왕관을 기꺼이 포기하고 두번이나 이혼경력이 있는 윌리스 심퍼슨 부인과 결혼해 평생 해로했던 에드워드 8세는 말년에도 심퍼슨 부인과의 만남과 결혼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술회했으나, 나는 그가 심프슨 부인과의 만남을 후회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혼을 생각한 적은 있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때로 놀라운 성찬인 게 사실이지만 또 때때로 깨어지기 쉬운 유리그릇과 같은 것도 사실이다. 삼가는 마음으로 소중히 들고 있지 않으면 언제 손에서 떨어져 나가 박살날지 모르는 것이 사랑이다. 외부에서 주는 충격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외부적인 충격과 억압이 없을 때라도, 오로지 우리 스스로 방심하고 게으르고 철이 없어서 사랑의 소중한 유리그릇을 놓쳐 깨뜨리는 젊은 부부가 알고 보면 얼마나 많은가.
‘잘츠부르크의 암염’.
나는 언제나 스탕달의 잠언을 잊지 않는다.
유리그릇 같은 그것을 금강석 같은 재질로 만들기 위해선 자기희생의 인내와 시간의 세례를 견뎌내는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스탕달처럼 짧은 문장에 정확히 담아낸 사람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단지 사랑을 일상화시키는 역할로 끝나지 않는다. 일상화는 슬픈 일이지만 일상화조차 견뎌내고 나면 다른 것들, 이를테면 참된 인간 우의로서의 향기로운 사랑이 찾아든다. 그때 만나는 사랑은 어느덧 유리그릇이 아니라 금강석처럼 변해 있어 내 손에서 설령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쉽게 깨뜨려지지 않는다.
깊고도 향기로운 새해가 되길 바라면서.


여성동아 2003년 1월 46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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