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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스포츠 스타 그 이후의 삶

키가 너무 커서 힘겨운 삶 사는 전 국가대표 농구선수 김영희

“거인병에 걸려 죽으려고도 해봤지만 죽음을 겁내지 않으니 세상 사는 게 오히려 편하네요”

■ 기획·최미선 기자(tiger@donga.com) ■ 글·김순희(여성동아 리포터) ■ 사진·김형우 기자

입력 2002.12.18 12:34:00

‘너무 커서도 안되고 너무 작아서도 안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쉽게 조절되는 것이 아니다. 전 국가대표 농구선수 김영희씨는 큰 키 때문에 80년대 농구코트를 주름잡았고, LA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농구의 은메달 획득에 핵심적 역할을 하며 스타로 부상했지만 농구코트를 떠난 그에게 남겨진 것은 고통스러운 삶 그 자체였다.
키가 너무 커서 힘겨운 삶 사는 전 국가대표 농구선수 김영희
“거인 아줌마. 거인 아줌마.” 경기도 부천시 오정동 인근 놀이터에 김영희씨(40)가 나타나자 그곳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거인 아줌마’하고 불러대며 그를 에워쌌다. 들고 있던 식빵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던 그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아직 ‘처녀’인 그를 두고 아이들이 ‘거인 아줌마’라고 불러도 그는 전혀 섭섭하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을 외계인 취급하지 않고 달려와 안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제가 지나가면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경계를 하곤 했어요. 그 시선들이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늘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어요. 언젠가는 ‘거인 아줌마’가 왔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아이가 있어서 놀이터에 있는 아이들을 다 불러모아서 물어봤어요. ‘너희들은 키 작은 사람이 좋니? 키 큰 사람이 좋니?’라고 물었더니 ‘키 큰 사람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며칠 후 동네 꼬마아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거인 아줌마가 옛날에는 아주 유명한 농구선수였다”고 설명했다. 스무명쯤 되는 아이들은 “그게 사실이냐”고 되물으면서 경계의 눈빛을 멈추었다. 그날부터 그는 동네 아이들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키 205cm. 우리나라에서 여자로서는 가장 큰 키로 알려진 김영희씨는 80년대 한국 여자농구계를 주름잡았다. 이름보다는 ‘코끼리 센터’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그에게 ‘큰 키’는 신이 내려준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농구선수’일 때뿐이었다.
“그때는 키 때문에 고민할 겨를이 없었어요. 오히려 큰 키 때문에 농구를 할 수 있었고, 농구선수로서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별로 고민하지 않았죠. 선수생활을 그만두면 어떻게 살까 하는 고민을 막연하게 하긴 했지만 피부에 와닿을 만큼 절실하지는 않았거든요.”
“저의 큰 키는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어요”
부산 동주여중 1학년 때 183cm였던 그는 ‘키’ 때문에 농구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태어났을 당시 너무 작고 여려서 할머니가 건강하게 자라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올릴 만큼 연약했던 그는 다섯살 때까지는 보통 아이들에 비해 작은 편에 속했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또래 아이들보다 한뼘쯤 컸던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는 물만 주면 쑥쑥 자라는 콩나물처럼 자라기 시작했다.
“키가 크다는 이유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때 실업팀인 한국화장품과 인연을 맺었어요. 아마 중학생이 실업팀에서 뛴 것은 농구계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일 겁니다. 역시 큰 키 때문에 숭의여고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행운을 얻었어요. 그때는 내 인생의 전부가 농구라 여겼기 때문에 키가 크다는 사실이 고마웠어요.”
79∼87년 한국화장품(97년 팀 해체) 소속 선수로 뛰었던 그는 84년 LA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농구가 은메달을 획득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고, 그해 점보시리즈에서 한국 여자농구 사상 최고인 60득점을 하면서 개인타이틀 5관왕에 올랐다.
“농구선수로서의 그만한 영광을 누려보기도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당시에 저를 몰라보는 사람이 없었고 큰 키에 대한 콤플렉스보다는 자신감에 차 있던 때였어요. 그러나 저에게 영광을 안겨줬던 큰 키는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남동생(35)은 한국인 남자 평균 신장에 해당하는 173cm, 그의 아버지는 165cm, 엄마는 163cm로 ‘보통 사람’의 수준을 넘지 않았다. 그의 몸과 키가 계속 커져 가는 것은 ‘거인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주변사람들이 ‘식구들 중에 유독 너만 왜 그리 크냐’고 물으면 ‘내가 우리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다 뺏어 먹어서 이렇게 크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했어요. 내가 거인병인지조차도 몰랐고 키가 2m를 넘으면 유능한 농구선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춘기 때 치료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는 현역 시절에는 202cm였지만 지금은 205cm. 아직도 키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끊이지 않고 샘솟는 성장호르몬 때문에 뇌종양이 생겨 87년 코트에서 쓰러져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다시 코트에 복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그런데 병원에 있는 동안 당뇨병과 위궤양 등 합병증이 찾아와서 절 괴롭혔죠. 그때부터 병마와 싸우기 시작했고 내 삶의 전부라 여겼던 농구코트를 떠나게 되었어요. 아파서 힘들었던 것도 있지만 농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어요. 내가 세상에서 잘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농구뿐이었거든요.”
그는 은퇴를 해도 딱히 할 일이 없었고 동료 선수들이 은퇴를 선언하며 결혼소식을 알려 올 때마다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결혼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았다. 보통 사람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체격이 컸던 터라 자신과 어울릴 만한 남자도, 자신을 좋아할 남자도 없다고 미뤄 짐작했기 때문이다.
“저를 데리고 살려면 우선 집도 커야 하고, 차도 커야 하고 모든 것들이 다 커야 하는데…. 유지비가 좀 많이 들겠어요?(웃음) 저를 데리고 살 남자가 없다고 단정지은 지 오래됐어요. 나도 여잔데 그렇게 마음먹기까지 어찌 제 속이 편하기만 했겠어요. 보통 사람들처럼 가정을 꾸리면서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싶은 기본적인 욕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죠. 결혼에 대한 꿈은 오래전에 접은 터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았지만 엄마는 선수시절부터 딸이 여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어요.”
“시집도 못 가는 딸이 되어 엄마에게 고통을 안겨줬다”는 그는 5년 전에 뇌의 종양이 다시 커져서 두번째 수술을 받았지만 머릿속에 큰 혹 하나는 제거하지 못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결핵까지 걸려 이가 하나 둘씩 빠지기 시작하더니 앞니가 네개나 빠지고 말았다.
“지금 결핵은 나았지만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에요. 무릎이 아파서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거든요. 치과 치료도 받아야 하고 아픈 곳도 치료받아야 되는데 치료비가 적잖이 들어가서 그게 쉽지 않네요.”
인터뷰 당일 그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국가대표시절 태릉선수촌에서 한때 같은 방을 썼던 전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소속 농구선수 김순애씨(38)였다. 김씨가 “언니, 살이 참 많이 빠졌네요. 몸이 많이 아프다면서요”라고 인사말을 건네자 배시시 웃던 그는 “괜찮아. 정말 오래간만이다. 잘 지냈어” 라고 대답하고는 이내 후배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얘가 네 아들이야? 좋겠다. 넌, 엄마도 되고…” 라고 말끝을 흐리면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후배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부러움이 묻어났다.

키가 너무 커서 힘겨운 삶 사는 전 국가대표 농구선수 김영희

김영희씨는 동료선수들이 은퇴를 선언하며 결혼소식을 알려올 때마다 남모르게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한다.

“국가대표 선수 중에 영희언니가 가장 컸고 제가 가장 작았어요. 그땐 키 큰 언니가 참 부러웠었는데…. 두 사람이 신발을 빨아서 나란히 창가에 세워두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한번씩 쳐다보곤 했어요. 언니 신발이 군함만큼 컸거든요. 그때 330mm를 신었던 것 같아요. 언니 키에 맞는 침대가 없어서 침대 끝에 소파를 덧붙여 놓았는데도 다리를 오므리고 자던 모습이 기억이 나네요.”
그는 후배와 함께 선수시절을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그 시절엔 키 작은 네가 하나도 부럽지 않았는데….” 여전히 말끝을 흐린 그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은퇴하고 나서 한국화장품에서 대리점을 개설해줬어요. 몸이 좀 나아지면서 90년부터 한 3년 동안 그 일에 매달리기도 했는데 5년 전쯤 아버지가 암에 걸리셨어요. 엄마는 여전히 완치되지 않은 제 병수발하랴, 아버지 돌보랴 참 힘드셨을 거예요. 저 몰래 눈물 흘리면서 ‘우리 딸 불쌍해서 어쩌나’라고 걱정하던 엄마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어요. 운동을 그만둔 이후 친한 친구도 없이 살아온 저에게 엄마는 엄마이기 이전에 삶의 동반자이자 친구였거든요. 저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어요.”
98년 뜻하지 않게 쉰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엄마를 따라 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식음을 전폐했다. 때문에 127kg였던 그의 체중이 90kg 밑으로 떨어졌다. “엄마 없이는 살고 싶은 이유도,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한 그의 눈가에 물기가 서렸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1년여 동안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서 힘들게 살았어요. 아니, 죽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아픈 아버지와 저를 남겨놓고 어찌 엄마가 눈을 감았을까 싶어요. 엄마는 제 병수발을 하다가 지쳐서 돌아가셨거든요.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에 (엄마를) 따라 죽겠다고 몸부림치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올케와 함께 저를 붙잡고 대성통곡을 하더라고요. 제발 죽지 말라고 밤낮으로 애원을 하대요.”
남동생 때문에 다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은 그는 먹을 것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몸을 추스리면서 동생 내외와 함께 아버지 병수발을 도왔다. 그가 선수시절 번 돈과 한국화장품 대리점을 넘기면서 받은 권리금 등은 자신과 부모님의 치료비로 다 써버렸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의 여덟평짜리 단칸방에서 혼자 살고 있는 그는 양말 수선과 전자부품을 조립하던 부업도 한달여 전에 그만뒀다. 손놀림이 빨라야 하는 일인데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고 다리 관절염도 심해져 몸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선수시절에 잦은 무릎 부상으로 인해 고생을 했는데 그때의 후유증이 아닌가 싶다”면서 씁쓸해했다.
“건강 되찾아 동네 꼬마아이들에게 농구 가르치고 싶어요”
“2년전 이맘때 하늘도 무심하게 아버지도 제 곁을 떠났어요. 저보다 남동생 내외가 고생이 많았어요. 누구보다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올케가 참 고마워요. 제가 아플 때, 아버지가 아플 때 친형제보다도 자식보다도 더 살갑게 보살펴줬거든요. 아버지까지 돌아가셨으니 남동생은 나를, 나는 남동생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가 코트를 떠나자 아쉬운 것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당장 몸에 맞는 옷이 없어 문제였고 발에 맞는 신발이 없어 선수시절에 신던 운동화를 아껴 신어야만 했다. 코트를 떠난 그에게 남겨진 것은 예전의 화려한 명성 대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낯선 눈빛뿐이었다.
“운동을 그만둔지 몇년이 지나다보니 아껴 신던 운동화도 다 떨어져 신을 신발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신발 만드는 회사 몇 군데를 돌아다녔어요. 제 신발은 특수하게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다들 돈을 줘도 만들어 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풀이 죽은 채로 마지막으로 (서울의) 명동에 있는 ‘랜드로바’ 매장에 찾아갔는데 생각지도 않게 죽을 때까지 무료로 신발을 만들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웠죠. 신발 한 켤레 만드는 비용이 1백20만원이 드는데 6년 전부터 여름용 샌들과 단화를 만들어주고 있어요.”
그에게 무관심하기는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운동경기를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인 공로는 그에게 쥐어진 ‘훈장’ 몇개가 전부였다. 함께 코트를 누볐던 선후배들도 제각각 살기에 바빠 그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제와서 누구를 탓하지는 않아요.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하고 살아야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아요. 제가 타고 난 운명인 걸요. 이제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죽고 싶다는 생각을 접고 나니 세상이 달라져 보이더라고요. 동네사람들을 보면 제가 먼저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해요. 예전에는 제가 얼마나 무뚝뚝했는지 몰라요. 이곳에 이사온 지 4년쯤 됐는데 지금은 이 동네에서 저를 몰라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명물’이 되었어요(웃음).”
자신의 정원을 아이들에게 내준 동화 속 ‘거인아저씨’처럼 동네 아이들의 좋은 친구로 살고 싶다는 ‘거인아줌마’는 “앞으로 할 수만 있다면 후배들을 가르치는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동네 꼬마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쳐주고 싶다”면서 밝은 미소로 소박한 꿈을 내비쳤다. 그가 건강을 되찾아 소박한 그의 꿈이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성동아 2002년 12월 4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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