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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이 불수록 내 영혼은 따뜻해져간다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신현림 ■ 사진·지재만 기자 ■ 장소협찬·비하인드

입력 2002.12.11 13:13:00

어느 노래말처럼 봄으로 오는 당신이라는 게 내게 있었던가. 자신에게 모든 것이라고 할 만한 당신이 있었는가. 분명 그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그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으로 슬퍼하고 괴로워하지 않는다.
세월이 주는 은혜가 있다면 어떤 고난에도 쉽게 실망하거나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수록  내 영혼은 따뜻해져간다
‘인생은 스스로 알든 모르든, 크든 작든 저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임을 사람들은 느끼고 있을까. 그리하여 예술이야말로 인생 그 자체보다 더 흥미롭거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축제임을.
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아름다움은 보여지는 것을 통해 꿈꾸는 것이야. 사람을 더 사람스럽게,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하는 것이라고.’
사나흘 후에 나올 내 책 서문의 일부다. 며칠 후에 막 구워진 빵처럼 따뜻할 책을 만질 생각하면 뿌듯하다. 다른 어느 때보다 오래도록 공들인 책이라 애착이 커서 더 그런 것 같다. 책을 낼 때마다 자식을 얻는 기분이다. 책 제목 하나를 지으려고 해도 아이 이름 짓듯이 얼마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가.
난 ‘현대미술이 왜 매혹적인가?’의 해답을 언제나 끝까지 가려는 정신에서 찾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제목을 정했다. 미치도록 열심히 살고 싶은 자들이여. 언제나 끝에서 끝까지 가보라. 온몸을 던져 일하고 탐구해보라. 그러면 빛나는 자신과 만나리라.
이렇게 인생의 일들은 결국 ‘이름’을 붙여야만 완성되는 것 같다. 지나간 모든 세월은 책 한권의 제목으로 남고, 살아갈 내 많은 꿈은 아이 하나로 자라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그 묘함이 인생을 더 깊이 있게 바라보게 한다. 살다 보면 묘하지 않은 인연이 없다. 어떻게 내가 이 사람과 만나게 되었을까. 나의 부모, 나의 형제, 나의 친구들… 관계된 사람뿐만 아니라, 문득 어떤 장소에서 여기 서 있는, ‘내 자신’이 낯설어질 때가 있다.
그 낯섬을 지우고 일체감을 느끼기 위해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통해 나를 들여다 보고 나의 꿈을 접어 날린다.
몸 밖으로 거친 바람소리가 흐르고, 가슴엔 여자의 마음을 휘감는 노래가 조금씩 사무쳐온다. 수증기처럼 젖어드는 슬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데이빗 보위의 . 어떤 이에겐 대수롭지 않은 겨울바람이, 다른 이에겐 절절하게 와 닿는 겨울바람일 수도 있다. 어떤 이에게 대수롭지 않은 노래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절절히 와닿은 를 듣는다. 내 방식으로 해석한 노래가사를 마음에 비추면서.

나를 사랑해주세요
나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
멀리 날아가게 해주세요
당신과 날아가고 싶은데
사랑은 바람과 같은 것이죠
그 바람은 거칩니다
좀더 나를 애무해주고,
나의 갈망을 채워주세요
그 바람이 당신의 심장으로 날아들게 해주세요
바람이 거칩니다
당신이 나를 만집니다 만돌린 소리를 듣습니다
당신의 키스로 나의 삶은 시작됩니다
당신은 나에게 봄입니다
나에게 모든 것입니다
당신은 모르시나요 당신은 삶 그 자체라구요
내 인생의 전부입니다
나무에 나뭇잎이 매달린 것처럼
나에게 다가오세요 나에게서 떠나지 마세요
우리는 바람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죠
바람은 거칠어요


나는 나에게 물었다. 봄으로 오는 당신, 자신에게 모든 것이라고 할 만한 당신이 있었는가를. 분명 그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그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으로 슬퍼하고 괴로워하지 않는다. 세월이 주는 은혜가 있다면 어떤 고난에도 쉽게 실망하거나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뎌짐’이라 얘기할 수도 있으나, 지혜로워지는 거라 위로하고 싶다.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어도 봄으로 오실 당신을 꿈꿀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절박할 만큼 삶은 여유롭지 못하다. 생존하기도 바쁘다는 말이 궁색할 수 있으나, 현실은 현실이니까. 그래도 이런 간절함이 밴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격정이 천천히 몰려온다는 것. 기쁜 일이다.

오늘 한 선배가 내게 이랬다.
“남자가 돈만 벌어다 주면 뭐해, 남성적인 매력이 느껴져야지.”
“언니, 배부른 소리시네요. 돈도 못 벌어다 주는 남편을 둔 여인네들은 어쩌고요.”
이렇게 대꾸하자, 언니는 감기 걸린 목소리를 길게 흘리면서 “그래, 그것도 괴롭겠지만, 어디 장동건은 아니래도, 성적 매력이 없더라도 얼굴 좀 제대로 생겼어야지” 한다. 언니의 말에 내가 웃자 그 선배는 다시 투덜거린다.
“진짜야. 웃을 일이 아니야. 남성적 매력 없는 남자랑 사는 것도 고문이라니까.”
각 집마다 문제 하나씩은 다 있어서 누군가의 절박한 문제는 또 다른 누군가에겐 배부른 소리가 되기도 한다. 계절이 바뀌듯 고민의 종류가 바뀌고 해가 바뀌면 다른 고민이 생기고 만다. 끝없는 고민들의 바통터치.
혼이 나가도록 고민에 휩싸여 지내다가 너무 쓸쓸해질 때 비로소 그 차가운 기운이 싫어 고민으로부터 빠져 나온다. 결국 언젠가는 다 지나가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견딜 만한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수록  내 영혼은 따뜻해져간다
오늘은 유난히도 추위를 타는구나. 나는 옷을 껴입을 만큼 입고서도 추워 떨며 길을 다녔다. 단풍이 지다만 마른 낙엽이 간간이 굴러가고 찬 바람이 내 몸을 휘감는다.
행인들 발길 잦은 도시의 거리. 눈 앞에 무척 크고 화려한 선물센터에 전시된 크리스마스 트리와 눈사람이 보였다. 유리창 너머 눈사람모자에서 하얀 인조 눈발이 높지 않게 공중으로 솟구쳤다. 눈사람한테 흰 눈발이 쏟아졌다. 결국 눈사람이 인조 눈을 자신에게 뿌려대는 모습 같아 웃음이 나왔다. 눈 오는 풍경을 눈사람 스스로 연출하는 요즘 세상이 안쓰러우면서도 정겹다. 반짝이는 유리창을 바라보던 내 마음속에 어릴 때의 안방 풍경이 밀려든다. 한척의 배처럼 내 가슴의 해안에 닻을 내린다.
언니와 여동생, 남동생과 함께 장난치며 놀던 안방.
그 안방 속에는 붉은 빛이 도는 자주색 자개옷장이 있었지. 가운데 큰 거울이 달려 있는 옷장. 우리가 자주 숨던 은밀한 장소. 지금도 그 옷장은 버려지지 않았다. 고향집 한 구석을 지키고 있으니 옷장은 기억할 것이다.
어머니 옷과 아버지 옷을 걸어두는 옷장문을 열면 대걸레처럼 죽 늘어진 검은 가발. 아, 그때 그 가발도 그대로 있을 것이리라. 1960년대 영화배우 남정임이 머리를 단장하던 것과 흡사한 가발과 당대 유행일 때 어머니가 쓰신 낡은 가발이었을 것이다. 가발은 우리 형제들에게 신비롭고 때론 괴기스럽지만 아주 흥미로운 놀이기구였다. 가발이나 가면은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 언니는 종종 방의 불을 끄고 그걸 뒤집어 쓰고 우리를 놀리기 일쑤였다. 그런 장난만 있었던 건 아니다. 간간이 남동생에게 여자 옷을 입히고 가발을 씌우는 장난도 그 즐거움이 컸다. 그렇게 어린 시절 나는 이 방과 이 옷장, 이 놀이에서 성장하였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추억의 단편들. 특히나 바람 불고 추위가 몰아치면 즐거운 추억은 난로처럼 마음을 데운다. 누군가의 말처럼 기억은 우리 내부의 노래,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지나갈 때 지나가는 알 수 없는 문자들과 향기로 가득한 오솔길이다.



오늘 한 소설가 선배가 대학교수로 초빙되었는데, 못하겠다고 거절했다는 얘길 들었다. 다들 의아해했으나 속으로 난 참으로 훌륭한 결단이라 생각했다. 교단이란 공간은 의외로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롭게 나만의 교육철학을 펼치는 것으로 결코 끝나지 않는다. 교수간의 알력이 심한 경우도 있고 나같이 단순한 인간에게는 어렵기 짝이 없는, 고도의 인간관계를 원하는 곳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너도 박사학위 받아서 교단에 자리잡지 그러니?”
선배 말에 빙긋 웃다가 나는 손을 마주 대고 비볐다. “제가 이걸 못 하잖아요. 워낙 주변머리가 없다 보니, 어른들한테 인사 다니거나 어디에 소속되는 건 답답하거든요.”
“솔직히 나도 그것 땜에 교수직을 반납했어.”
시간이 지날수록 새삼 반납하길 잘했다는 선배가 참 현명하고 넉넉해 보였다. 그는 자유를 아는 사람이다. 진정한 자유는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을 위해, 보다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데서 오는 것 아닐까. 나 역시 새 의자의 안락함보다 오래된 책상에 머물러 있는 고독한 시간을 택하는 건 그런 이유다.
잘했어, 잘했어, 스스로 타이르면서.


여성동아 2002년 12월 4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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