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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여자의 근황

<화가의 우연한 시선>으로 돌아온 시인 최영미가 고백한‘마흔의 삶’

“30대엔 이기적으로 살았는데, 이젠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 글·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사진·조영철 기자

2002. 12. 11

“원래 인물화를 좋아했는데, 사람들에게 치인 뒤로 풍경화가 좋아졌다.” 시인 최영미씨가 막 펴낸 ‘따끈따끈한’ 미술 에세이 <화가의 우연한 시선> 속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낯을 많이 가려 사람들과의 만남을 힘들어하는 최씨는 올해 만으로 마흔을 맞이했다. “30대에는 이기적으로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가족이 가장 소중해졌다”고 고백하는 그를 만나 근황을 들어보았다.

으로 돌아온 시인 최영미가 고백한‘마흔의 삶’

최영미 시인은 신작 미술에세이에서 그림은 ‘사는 만큼’ 보인다고 말한다.

“우리집은 처음 공개하는 건데요….” 일산의 아파트로 찾아갔던 날. 곤란한 듯 말을 흐리던 최영미 시인(41)은 이내 결심한 듯 문을 열어줬다. 베란다를 통해 햇빛이 들어오는 자그만한 아파트. 찾아온 손님을 위해 차를 대접하겠다고 아픈 다리를 절룩이며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는 “괜찮다”는 기자의 만류에 겨우 자리에 앉았다. 까만 터틀넥을 입은 화장기 없는 얼굴은 여전히 곱기만 하다. 물이 끓자, 평소 커피를 안 마셔서 집에 인스턴트 커피도 없다고 난감해하던 그는 인스턴트 생강차 두포를 꺼내왔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혜성처럼 화려하게 문단에 입성했던 최영미 시인. 94년에 시집이 나왔으니 벌써 8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동안 두번째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와 미술관 기행집 <시대의 우울>을 펴냈으며 가나아트센터에서 미술 강좌를 진행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펴낸 책 역시 미술 에세이집. <화가의 우연한 시선>은 시인다운 감수성과 미술사학도다운 관찰력으로 읽어낸 ‘명작을 보는 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에 덧붙여 그는 ‘사는 만큼 보인다’고 말한다.
“마흔 못 넘긴다더니, 그 액땜 하느라 자꾸만 몸이 아픈가 봐요”
“시집은 내지 않고 미술 관련 일만 하는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시를 쓰나 미술에 대해 쓰나 결국 같은 거죠. 생각한 것을 표현하는 매체가 다를 뿐이라고 할까요. 글 쓰는 사람으로서 여전히 저의 관심은 ‘사람’이에요. 전 지금도 조각이나 미술작품을 보다가 거기서 언뜻 작가의 영혼을 만날 때 희열을 느끼거든요”라고 대답했다.
처음에 그는 책을 내자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고 잠시 망설였다.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기는 했지만, 과연 서양 미술사에 대해 한국의 작가로서 어떤 창조적인 글쓰기가 가능할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양미술에 대해 폭넓은 교양과 단단한 소양을 쌓은 서양인들이 봤을 때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에세이를 과연 쓸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그는 ‘관습적인 눈으로 미술 읽기’를 버리고 ‘시인 최영미의 눈으로 미술 읽기’를 해답으로 택했다.
“대부분의 미술교양서, 미술가 관련 저서를 보면, 저자 자신이 미술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씌어졌더군요. 전 제가 이해한 것이 틀릴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썼습니다. 어떤 그림의 경우 처음에 작품을 봤을 때와 나중의 해석이 너무나 달랐거든요. 그 오류의 과정마저도 솔직하게 드러내기로 했지요.”
그는 미술사 강의를 할 때마다 ‘어떤 게 좋은 그림인가’ ‘그림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책이 “정답은 아니나 하나의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미술사 강의를 무척 즐긴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최영미 시인은 웃으며 “맞다, 미술사 강의를 하는 동안 참 행복했다”고 말한다. 원체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그이지만, 오랜 시간 얼굴을 맞댄 수강생들에게 정이 꽤 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미술이 좋아서 온 분들이지만 그중에는 제 글의 애독자들이 더 많았어요. 자신들이 좋아하는 시인이 과연 어떻게 미술작품을 해석하나 듣고 싶어서 온 것이지요. 멀리 전주나 춘천에서 올라와 제 강의를 듣고 밤차로 내려가던 분들도 많았어요. 그 열정에 어떻게 부응해야 하나 걱정스럽기도 하고 감동하기도 했지요. 아마도, 그런 이유로 강의 준비가 더 충실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그만큼 미술을 통해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그였지만, 이번에 책을 내기까지 여러가지로 고생이 많았다. 불편한 왼쪽 손목(손목 부상을 방치하다가 결국 인대 손상이 왔다) 때문에 컴퓨터로 글을 쓸 수 없어 ‘원시적인 방법’인 손으로 원고를 써야만 했고, 어려서 교통사고를 당해 그다지 성치 않았던 다리까지 연거푸 다치는 바람에 바깥 출입조차 수월치 않아 교정을 볼 때도 출판사 직원이 서울과 일산을 오가야 했다.
“여름까지는 몸이 좋았어요. 많이 돌아다녀도 전혀 문제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늘 운동화만 신던 발에 호사 좀 시켜주자 하고 3cm 정도 굽의 단화를 샀는데, 그걸 신자마자 백화점에서 미끄러진 거예요. 한동안 걷지도 못했어요. 절뚝거리며 이제야 겨우 걷게 됐는데, 그것도 모자라 얼마 전에는 버스에서 내리다가 그만 문에 머리가 끼질 않나… 왜 이렇게 우환이 겹치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어린 시절부터 뇌리에 달라붙어 있었던 유년기의 일화를 끄집어낸다. 어렸을 때 우연히 최씨 집 앞을 지나다가 들린 그 점쟁이 아줌마는 물끄러미 최씨를 보더니 “얘는 마흔살 넘어까지 살기 틀렸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세세한 가족들의 개인사까지 다 맞추고 난 뒤였으니, 그 공포감이란 어떠했겠는가.
“올해가 만으로 마흔이잖아요. 아마도 마흔을 넘겨 멀쩡히 살려고 이렇게 액땜을 지독하게 하는 모양이에요.”
몸이 아플 때만큼 혼자라는 게 서럽게 느껴질 때가 없다는데… 기자가 찾아갔을 때 “선물로 받은 와인을 마시자”던 그는 코르크 마개조차 따기 힘들어 했다. 물론 여동생과 어머니가 서울에 살고 있지만 늘 도와줄 수는 없는 법. 그러던 중 벌어진 ‘변기 사고’는 ‘참사’라 부를 밖에.
“아파서 꼼짝도 못할 때 변기가 막힌 적이 있었어요. 뚫는 일이야 아저씨를 부르면 된다손 쳐도 그 뒤처리를 누가 하냔 말이에요. 여동생을 부를까, 아니 차라리 아줌마를 쓸까 별 고민을 다하다가 결국 저 혼자 하기로 했어요. 세상에… 청소를 끝내고 시간을 보니, 무려 1시간이 걸렸더군요. 아프지만 않았다면 10분이면 끝났을 일인데 말이죠. 눈물이 흔한 편이 아닌데, 정말 그 날은 눈물이 맺히더군요. 아, 이게 혼자 사는 대가구나 하고요.”

으로 돌아온 시인 최영미가 고백한‘마흔의 삶’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햇빛속의 여인>. 혼자 서있는 중년의 여인에게 최씨는 자신을 투영한다.

사람들은 특출한 미모에 서울대 출신이라는 화려한 학벌, 그리고 베스트셀러 시인이라는 직함까지 달고 있는 그가 퍽 유복할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그는 ‘누런 바셀린 크림 한통으로 온 식구가 겨울을 날 정도로’ 가난을 겪어봤고 지금도 아파트 전세금에 절절 매는 ‘서민’이다. 그런 사연도 모르고 가해지는 ‘오해’의 시선들을 대할 때면 그는 곧잘 가슴이 콱 막힌다.
“시집이 많이 팔렸을 거라고 하지만, 벌써 8년전 얘기예요. 몸이라도 건강하면 1년에 한번씩 꼬박꼬박 책을 써내서 인세라도 챙길 텐데, 그것도 안되고요. 이 나이 되도록 내 집조차 없고요.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성격과 고집때문에 트러블을 자초한 일도 많아요. 일간지 기자들과 원고 때문에 불편한 일도 종종 있었고…. 이러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고쳐지질 않네요.”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후 그에게 가해진 삐딱한 시선들은 그를 움츠러들게 만들었고, 그걸 숨기기 위해 그는 도리어 공격적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자기방어본능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걸 또 다른 시비거리로 삼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여자 혼자 사는 비애를 느낀다. ‘직장이 있는가’ ‘결혼을 했는가’ 등으로 잣대를 세워놓고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제재를 가하는 이 나라. ‘혼자 살겠다고? 그럼 대가를 치러!’하고 압력을 가하는 사회에 대해 그는 “그저 내가 자유를 누리는 대가려니”하고 초연히 견뎌보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탈리아의 미술사가 바사리를 거론했다.
“르네상스 시절 미술 작가들은 누구나 후원자에게 매어 있는 몸이었어요. 바사리는 이탈리아인들이 <신곡>을 쓴 단테 못지않게 높이 평가하는 화가이자 미술사가인데, 그가 자신의 후원자인 매디치가의 코지모공에 바친 헌사를 보면 당시 작가라는 신분이 얼마나 비천했었나 알 수 있어요. 스스로 ‘각하의 가장 비천한 신하’로 낮추면서 ‘존귀하신 각하께 저 스스로를 바치면서 각하의 손에 공손하게 키스합니다’라고 쓴 구절은 그야말로 압권이죠. 전 우리 시대 작가의 위치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의 소박한 꿈은 자신 명의의 조그만 집 한채를 장만하는 일이다. 그래서 한평생 자식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께 오랫동안 해보지 못한 맏딸 노릇을 제대로 해보려는데, 경제적인 부분이 해결이 되질 않는다.
“30대 때만 해도 저만 생각하고 살고 싶었어요. 실제로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아오기도 했고요. 그런데 나이 들어가니까 가족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겠네요.”

으로 돌아온 시인 최영미가 고백한‘마흔의 삶’

최시인은 넓은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그림을 보는 지금 나를 숨막히게 하는 건 바로 그 시선이다. 누군가, 언젠가 그녀를 쳐다보았겠지. 그토록 사랑스럽게 그토록 뜨겁게… 그런 애틋한 시선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살아 있다는 것의 기쁨과 허망함이 내 안에서 교차된다. 아쉽고도 안타까운 순간이다. 이 그림의 모델은 누구였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녀도 죽고 그도 죽고… 오로지 화가의 따뜻하면서도 잔인한 시선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화가의 우연한 시선> 중에서)
그의 책 <화가의 우연한 시선>은 고대 이집트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시인 최영미’ 눈에 포착된 21명의 대표 작가와 작품을 거명하고 있다. 화가의 삶과 작품의 연관성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그는 마지막 장을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햇빛 속의 여인’에 할애하고 있다. 벌거벗은 여인이 한손에 담배를 들고 빛 속에 서 있다. 침대를 제외하면 가구 한점 없는 황량한 방안에서 여인은 마치 하나의 가구처럼, 뿌리 뽑힌 나무토막처럼 바닥에 붙박여 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노란 빛 그림자는 차라리 여인을 ‘농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빛을 빙자한 네모 속에 못 박힌 여자. 시인의 눈은 담배를 쥔 손가락에서부터 손목을 지나 팔뚝까지 뻗친 붉은 색을 놓치지 않는다. 피를 연상케 하는 저 붉은 줄. 현대를 살아가는 한 여인의 상처와 고독, 그리고 싸늘한 실존을 다룬 이 그림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햇빛 속의 여인이 그의 또 다른 자아였듯이, 빈방은 바로 그였습니다. 빈방은 바로 나였습니다.”
휑뎅그레한 방안에 혼자 서 있는 중년의 여인. 그 여인에게서 최씨는 자신을 투영한다.
“몸도 불편한데 혼자 살지 말고 좋은 사람을 찾으라는 말도 듣지만, 전 반대예요. 누가 저처럼 아픈 사람과 함께 살려 할까요. 저 역시 짐이 되면서 사는 일은 못 견딜 거예요.”
생강차 한잔을 다 마시고 ‘책걸이 기념’으로 와인 한잔을 비우니 거의 인터뷰가 끝나갔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서양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풍경화를 가장 좋아한다고 책에 썼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사람들에게 치인 뒤라 그런지 인물화보다는 풍경화가 좋더군요.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나 프랜시스 베이컨의 인물화에도 오래 머물렀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 풍경화예요. 그것도 예전엔 엘 그레코의 <톨레도 풍경>처럼 으스스하고 황량한 분위기의 그림을 좋아했지만 요즘은 모네나 터너의 ‘눈을 즐겁게 하는 풍경’을 좋아해요. 전에는 달착지근하다고 멀리했던 편안함까지 이제는 받아들이게 된 거죠. 어머니의 방을 따로 마련해 드릴 만큼 넓은 아파트로 이사가면,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건초마차>를 걸어드리고 싶어요. 싱거울 정도로 편안한 전원 풍경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저도 늙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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