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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세상의 딸들에게

여성운동가 양해경이 말하는 여자로서 당당하게 사는 법

■ 기획·최미선 기자(tiger@donga.com) ■ 글·박진숙 ■ 사진·지재만 기자

2002. 11. 21

“여자는 시집만 잘가면 최고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해요!” 어느 날 갑자기 “여자다운 것은 뭐고 남자다운 것은 뭔가요?” 하고 딸이 진지하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주어야 할까?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 남자와 어떻게 다른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리고 여자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길을 제시해줄 방법은 없을까? 최근 사춘기 소녀들을 위한 책, <나, 열세살 여자>를 펴낸 여성운동가 양해경씨가 자신의 오랜 상담 경험을 토대로 ‘여자로 당당하게 사는 법’을 제시했다.

여성운동가 양해경이 말하는 여자로서 당당하게 사는 법
“우리의 딸들이 ‘여자’라는 것을 의식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여자이니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행동도 소극적이 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여자인 내가 이렇게 해도 될까’ ‘여자인 내가 학생회장을 할 수 있을까’ 등의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12, 13세가 되었을 때 남자아이들은 자신이 남자라고 인식하는 순간부터 당당해지고, 여자아이들은 여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위축되기 시작하는 것을 많이 봤어요. 여자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여자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 인식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15년간 한국여성민우회에서 가족문제와 성문제를 상담해온 양해경씨(48)가 사춘기 소녀들을 위한 여성학 책을 펴내 눈길을 끌고 있다. 양씨는 지금은 대학생이 된 큰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자신에게 묻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어느 날인가 아이가 저에게 갑자기 ‘할머니는 왜 나에게 고추 하나 달고 나오지 그랬냐고 해? 연속극에서도 아들을 낳으면 할머니가 기뻐하는데 딸이면 안 좋아하잖아. 왜 그런 거야? 엄마도 나 낳았을 때 딸이라서 기분이 별로였어?’ 하고 묻는 거예요. 그때 내 딸도 드디어 우리 사회에서 여자와 남자를 차별한다는 것을 눈치 채기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자신이 스스로 자아를 쌓아나가기 이전에 이미 기성세대를 통해 남녀가 차별되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나, 열세살 여자>는 양씨 스스로 두 딸을 키우며 겪은 경험담과 오랜 기간 여성운동을 하면서 얻은 해결방안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엄마는 명절 때 할머니 댁에 가면 왜 일만 하나요?’ ‘주부는 집에서 놀기만 하는 사람인가요?’ ‘딸은 나중에 부모님을 모시면 안되나요?’ ‘왜 어린 남동생이 먼저 호주가 되야 하나요?’ 등 10대 사춘기 소녀들이 궁금해 하는, 우리 사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내용을 문답 형식으로 풀어나가면서 남성 위주의 불평등한 풍토를 지혜롭게 타파해 나가는 발판을 만들어주고 있다. 무엇보다 여자들도 남자에게 기대지 말고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경제력을 가져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미혼모가 있으면 미혼부도 있다고 알려준다. 평범한 것 같지만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내용들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그림과 함께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어 아이들에게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눈에 들어오게 해준다.
“상담을 하다보면 대부분의 여성들이 이미 실타래가 얽히고 꼬인 것처럼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상담을 하러 옵니다. 문제가 발생한 초기에 찾아오면 쉽게 해결할 문제도 시간을 놓쳐서 풀기 어려워진 경우를 볼 때마다 참 안타까웠죠. 그만큼 초반엔 자신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질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 경우를 보면서 저는 아이들이 자아에 눈뜨기 시작할 무렵부터 성에 관한 올바른 지식, 그리고 여자로서 당당하게 살아나가는 태도를 배웠다면 이런 일은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을 종종 했어요.”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도 있듯 처음에 그저 한두번 참고 넘어가는 사안이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돌이킬 수 없는 문제로 불거지는 게 곧 여성문제라고 지적하는 양씨.
“일상생활에서 보면 아주 작은 것이 차별의 밑바탕이 되는 것들이 많아요. 예를 들어 남녀가 데이트할 때 데이트 비용은 으레 남성이 내는 것으로 생각하는 여자들이 많아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런 작은 행동들이 가지고 오는 결과는 평등해야 할 남녀관계가 불평등하게 이어지는 거지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여성의 자아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작은 일부터 바로잡아 주자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어릴 때부터 습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양씨는 87년 한국여성민우회의 창립 멤버로 시작해서 15년 동안 오로지 여성의 권익을 찾기 위한 길을 고집하며 살아왔다. 지난해까지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 성상담소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성매매 방지법 제정운동·청소년 성범죄자 신상공개운동에 앞장서왔던 일이 가장 보람 있었다며 차분히 얘기하던 양씨는 청소년 성매매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성범죄자 신상공개는 좀더 자세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주소지가 불분명하게 나오면 애매한 피해자만 생기게 되지요. 때문에 저는 사진과 정확한 주소까지 공개하자는 운동을 계속해 나갈 겁니다. 이것은 단지 가해자를 처벌한다는 의미보다 예방의 효과를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입니다. 누구든 ‘걸리면 뜨거운 맛을 확실하게 본다’고 한다면 청소년들의 성을 돈으로 사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 아닙니까.”
검사들 사이에서도 양씨에게 적발된 사례는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된다는 농담이 오갈 정도로 그는 청소년 성매매 근절을 위해서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뛰어가는 열정을 쏟아왔다. 밖으로는 성범죄자 신상공개에 애를 쓰고 안으로는 성폭행 피해자들의 상담을 해오면서 양씨가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은 성폭행당한 딸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였다고 한다. ‘여자가 성폭행을 당하면 망신이다, 여자가 그럴 만한 빌미를 준 건 아닌가’ 하는 사회와 부모들의 편견 때문에 아이들이 이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여고 2학년생이 잘 아는 3학년 남학생에게 노래방에서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어요. 여학생 두명과 남학생 두명이 함께 노래방에 갔다가 자기 친구와 남학생 한명이 잠깐 나간 사이 10분만에 성폭행을 당한 거예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거지요. 피해 여학생이 상담소에 찾아와 신고를 하면서 가장 먼저 당부한 말이 ‘엄마, 아빠 모르게 해주세요’였어요. 아직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딸에게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며 야단을 치거든요. 잘못은 남학생이 한 건데도 말이죠. 일반적으로 성폭행 사건은 부모가 개입하면 사태가 더 심각해져요. 이 아이의 경우도 남학생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는데 부모가 야단을 치니까 안 가르쳐주는 거예요. 피해 여학생이 말을 안하면 가해자는 처벌받기 어렵거든요.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을 때 아이가 기댈 곳은 부모밖에 없어요. 때문에 부모는 아이에게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일단 보듬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에게 두번 상처를 주지 않아요.”
이는 비단 딸을 기르는 부모만 바뀌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이땅의 아들을 둔 부모 또한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한다고 양씨는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어떤 도시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학생 여러 명이 또래 여자친구를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지요. 그때 남자아이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다가 부모가 개입하니까 모르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부모가 아들에게 해가 될까 싶어 발뺌을 하도록 시킨 겁니다. 이런 아이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면 또 다시 성폭행하지 않겠어요? ‘남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는 한 성폭행 사건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다행히 두 사건 모두 가해자들은 처벌을 받았지만 양씨는 이때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사회에서 성폭행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느꼈다고 한다.
아울러 양씨는 이땅의 부모들이 딸을 당당하게 키우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어려서부터 씩씩하게 자라는 딸을 보면 자랑스럽게 여기기보다는 ‘저렇게 선머슴처럼 커서 나중에 시집이나 제대로 갈까?’ 하는 마음이 더 우선한다는 것.
“우리 부모 세대에게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가부장적인 의식이 아이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전달되는 예가 참 많아요. 아이에게 책을 사줄 때도 아이의 성향과 무관하게 아들에게는 용감한 왕자이야기를, 딸에게는 용감한 왕자에게 사랑받는 아름다운 공주 이야기를 고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잖아요. 그런 것들이 딸들에겐 무의식적으로 남자한테 사랑받는 여자가 최고요, 스스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여자는 팔자가 센 걸로 치부되곤 했고요. 요즘도 아이들에게 책을 골라주는 부모가 상당히 많아요. 부모들이 먼저 ‘검열’하지 말고 아이에게 믿고 맡겨야 합니다. ‘내 딸이 이런 책을 읽어도 될까’가 아니라 ‘그래, 이런 책도 읽어야지’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야 평등한 성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키울 수 있어요.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말로만 전할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먼저 당당하게 만들어줘야지요.”

양씨 또한 두 딸의 엄마이긴 하지만 자신이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아이들을 유별나게 신경 써서 키운 건 없다고 한다. 다만 대학 졸업을 앞두고 현재 외국의 대사관에서 인턴사원으로 근무하는 큰딸과 대학생인 둘째딸에게 강조하는 점은 한가지 있다.
“딸들에게 스스로 경제권을 가지기 전에는 결혼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렇게 이야기해주면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경제력을 키우려는 동기를 부여하게 되죠. 경제력이 없는 사람은 경제력이 있는 사람에게 치사하지만 어쩔 수 없이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저는 남편에게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행여 ‘너는 딸이니까’라는 말을 하지 않도록 하게 했어요. 그래서 우리 딸들은 지금까지도 ‘여자이기 때문에’라는 생각을 안하고 살아요.”
양씨는 이화여대에서 사회학을,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뒤 바로 여성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여성운동이란 실제로 소외당하며 살아가는 여성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 부딪혀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후배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한국여성민우회를 그만두고 현재 여성부가 임명한 남녀평등의식 교수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녀평등이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 남자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성역할에 대한 남자들의 의식이 보수적이거든요. 이것은 남자들이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짐을 벗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도 바뀌지 않는 겁니다. 아침식사 준비는 덜 피곤한 사람이나 일찍 잔 사람이 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육아 때문에 부부 중 한 사람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면 월급이 적은 사람이 그만두는 게 바람직한 거고요. 모든 부부가 동등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식구들을 먹여 살릴 책임을 반씩 나눈다면‘가장’의 짐을 벗을 수 있겠지요. 남자들이 합리적인 생활방식으로 생각을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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