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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고인을 보내며

남편 이주일씨와 있었던 애틋한 부부 사랑 이야기 공개한 제화자

■ 글·이영래 기자(laely@donga.com) ■ 사진·박해윤 기자

입력 2002.11.15 10:19:00

“성공한 후 더 극진해진 남편의 사랑에 지난 40년 정말 행복했습니다”
작년 11월 폐암 판정을 받은 후 9개월간의 투병생활을 이어오던 ‘코미디 황제’ 이주일씨가 지난 8월27일 향년 6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0월14일 고인의 49재를 마친 후, 부인 제화자씨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고인에 대한 회상, 애달픈 사부가.
남편 이주일씨와 있었던 애틋한 부부 사랑 이야기 공개한 제화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건만 눈물도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보내야 할 사람이 그 죽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백을 가슴속에 잡아둔 탓이다. 보내주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 탓일까, 영혼은 죽어 저승에 들지 못하고 중음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한다. 때문에 한 많고 눈물 많은 우리네는 49재라는 독특한 예를 지켜왔다. 49재는 망자가 드디어 완전히 사문에 들어가는 때이며 또 보내야 할 사람이 망자를 마음 속으로부터 보내는 때다.
10월14일, 고 이주일씨(62, 본명 정주일)의 49재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에서 유족과 친지, 선후배 개그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49재가 지난 이틀 뒤인 10월16일, 고 이주일씨의 부인 제화자씨(62)는 오래도록 닫아 걸었던 분당 자택 문을 비로소 열었다. 고인의 생전에, 또 투병 기간 중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에게 지면을 통해서나마 감사의 예를 올리고 싶다는 뜻에서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고인 생전에 저는 따로 아파트에 살았어요. 이제 고인이 떠나고 지킬 사람도 없어 제가 와 살고 있는 중입니다. 아파트는 이제 곧 정리할 거예요. 참, 신기하기도 하지. 정원사도 여전히 있고, 또 저도 여기 와 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고인이 그렇게 좋아하셨던 정원의 소나무들이 하나씩 말라죽고 있어요. 아마 아끼던 것이라 하나씩, 하나씩 가져가시나 보다 싶어 그냥 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62년 이주일씨가 군예대에 있던 시절 결혼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무명 시절 이들 부부는 매우 빈궁한 생활을 해야 했다. 군에서 희극배우 수업을 받은 이씨는 64년 서울로 올라와 약장수들의 쇼 MC를 맡으며 본격적인 희극인의 길에 들어섰고, 이후 유랑극단을 전전했다. 당시 그의 수입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생했던 거야 말로 다 못하죠. 돈 벌러 간다고 나가면 돈은 안 벌어오고 올 때 이(해충)만 한말 갖고 왔어요. (유랑극단 공연 가면) 한방에서 다 자니까 이가 득시글거리는 옷을 한보따리 싸서 가지고 오는 거예요. 바로 빨지는 못하고 그냥 제가 마당에 툭 던져놨다 이가 다 도망가고 나면 그다음날 물에 담가 빨았죠.”
한번 공연을 떠나면 언제 올지 기약이 없었다. 더욱이 몇달 만에 돌아와도 남편 이씨는 빈손인 때가 더 많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추석이 돼도 밥 한그릇 제대로 떠놓고 먹은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이들 부부는 빈곤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이런 생활상에 대해 이씨는 자신의 회고록 (한국일보에 연재)에서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험했으면 결혼 후 6년 만에 밥상을 들여놓았을 때 아내가 ‘더이상 여한이 없다’고 말했을까 싶다”고 기술하고 있다.
“어르신이 코미디언으로 이름이 나고 몇개월 지나서였어요. 제가 좀 아팠는데 혹 위암 아닌가, 죽을 병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랬더니 바로 절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게 했어요. 며칠 후 당신 혼자 검사 결과를 보러 가더니 새벽이 돼도 들어오질 않는 거예요. 새벽 3시쯤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왔는데 절 끌어안고 울더라고요.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내가 죽는 게 아닌가 겁이 났다고. 그런데 큰병이 아니라고 해서 너무 기분이 좋았대요. 그래서 기분이 좋아서, 좋아서 (그녀는 고인과의 추억을 더듬다가 치밀어 오르는 울음에 중간중간 말을 멈췄다) 약주를 드시고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남편 이주일씨와 있었던 애틋한 부부 사랑 이야기 공개한 제화자
약 20여년에 걸친 무명생활은 이씨가 지난 80년, 동양방송 코미디 프로그램 에 출연하면서 끝이 났다. 당시 그는 브라운관에 얼굴을 드러낸 지 2주일 만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한국 코미디의 간판 스타로 떠올랐다. 이씨의 아내 사랑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유명해지면서 저 호강도 많이 시켜줬어요. 비행기를 타도 비즈니스클래스 태워주고. 90년엔가, 한번은 무슨 행사 때문에 브라질에 갔는데 주최측에서 너무 안 좋은 호텔을 제공했어요. 그랬더니 일행 틈에서 절 몰래 데리고 나오더라고요. ‘내가 그 고생을 시켰는데 당신을 이런 데서 재울 수 없다’면서 그분들 몰래 다른 호텔로 데리고 간 거예요. 다음날 다른 동료 연예인분들 뵈는데 미안해 얼굴을 못 들겠더라고요.”
부인 제씨는 생전에 고인이 보여준 사랑을 하나하나 되새기느라 눈 주위가 붉어졌다.
“공연이든 사업 때문이든 외국여행을 가시면 꼭 선물을 사 가지고 오셨어요. 매년 몸이 부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이즈를 잘 아는지 꼭 맞는 옷을 사오더라고요. 선물이라고 달랑 던져주는 게 아니에요. 옷을 사오면 그걸 입혀놓고 그 앞에서 패션쇼를 시켜요. 맘에 든다고 그러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어요.”
고인에게나 부인 제씨에게나 가슴속에 남는 가장 큰 한은 91년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뜬 아들 창원씨의 일이다. 창원씨가 세상을 뜬 후, 창원씨의 몇몇 친구들은 결혼했다고, 애를 낳았다고 인사차 꾸준히 그들 내외를 찾았다. 그러나 한때 두 사람은 집에 찾아온 아들 친구들에게 “자네들 보면 더 생각나고 힘드니까, 제발 오지 말라”고 크게 역정까지 낸 바 있다. 지금도 그에겐 그런 기분이 남아 있는 듯했다. ‘우리 아들이 살아 있다면 지금 저럴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 아직도 슬픔이 치밀어 오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씨의 영결식 때 창원씨의 친구들이 또 여럿 몰려와 상주를 자처했다. 개중엔 아는 얼굴도 있고, 또 처음 보는 얼굴들도 있었다. 그는 처음 본 아들 친구들에게 ‘어떤 친구냐’고 물었다가 한참 동안 울어야 했다. 친한 친구들 중 몇몇은 속 깊게도 “우릴 보면 어머니가 더 힘들어할 테니 아예 나타나지 말자”고 다짐했었다는 것. 그런 그들이 11년 만에 나타난 것이었다.
“너무 많은 분들이 그래도 그분 가는 길 봉송해주시고, 아껴주시고…. 그분들에게 너무 감사드려요. 고인은 할 일이 많은 분이신데 쓸데없는 저희들은 내버려두시고 왜 고인을 데려가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고인을 사랑해주신 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49재를 맞는 날부터 눈물이 많아졌다고 했다. 누가 무슨 말만 해도 눈물이 흘러내린다고, 이제야 그분이 정말 가셨나 보다며 인터뷰 도중 그녀는 자주 말을 끊고 오열했다. 무엇보다 가슴에 남는 건 미안함, 죄스러움이다. 왜 더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을까, 아프다고 누워있는 사람 밥 잘 안먹는다고 왜 구박했을까 하는 자책들.
누구에게나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고인은 갔다. 그녀 또한 마음속의 고인을 이제 보내줘야 하지 않을까?

여성동아 2002년 11월 4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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