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생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치인 플러스 알파인 사람입니다. 김선생님 자신도 자신이려니와 아버님 백야 김좌진 장군에 대해 떠오르는 기억은 어떤지요.
“제가 1918년 음력 5월생인데 아버님이 만주로 떠나신 게 3·1운동 전 해라고 하니까 만 한살 전입니다. 어머니는 늘 아버님이 독립대장인데 일본놈과 전쟁하러 갔다면서 우리나라가 독립하면 곧 돌아온다고 했죠. 어머님은 그런 이야기를 귀에 닳도록 하셔서 지금도 그 말이 들리는 듯합니다.”
-아버님이 사립학교를 만들어 학생들을 키우기도 했다는데….
“아버님은 안동 김씨 부잣집에서 태어나셨죠. 논밭도 엄청났고 어선도 30척이나 갖고 있고 집도 시종이 2백명 정도 되는 아흔아홉칸짜리였대요. 근데 아버님이 할머니에게 거짓부렁을 했단 말이에요. 홍성에서 유명한 관상쟁이를 돈으로 매수해서 ‘좌진 도련님한테는 큰 액운이 있습니다. 액운을 떼어줘야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기도하는 동안 누가 와서 무슨 얘기를 하면 잡귀가 끄는 거니까 절대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마곡사로 백일 불공을 드리러 가셨죠.
아버님은 그 사이 청지기를 불러 벽장 속에 있는 논문서 밭문서 어선문서 가지고 나오라고 시킨 후 마당에 멍석 깔고 앉아 시종 2백명을 앞에 놓고 일장연설을 하셨대요.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부릴 수는 없는 것이니 지금부터 논문서 밭문서 어선문서 전부 나눠 갖고 종문서는 불지르고 가라’면서 시종을 해방시켰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아흔아홉칸짜리 집을 때려 부수고 호명중학교를 만들었답니다. 제가 봤을 때 당시 위대한 분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아버님도 김선생님만큼 체격이 크셨죠.
“제가 여섯살 때 만주에 갔을 때 아버님 품에 안겨봤는데, 아버님은 키가 6척이 넘었는데 키만 훌쩍 크시고 살은 별로 없었어요. 하지만 아령을 해서 탱탱했어요. 그 품에서 몇달간 자봤는데 아버님은 잠자리에 누울 때 항상 총을 가지고 있었고 바지저고리는 물론 버선도 벗지 않은 채로 주무셨어요. 아버님은 얼굴이 백옥 같아서 티 하나 없는 미남자였습니다. 근데 저는 외탁을 해서 잘생기지도 못한 데다 마마를 앓아서 곰보딱지가 됐어요.
아버님은 될 수 있으면 저를 키워서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는데 정세가 워낙 험했어요. 당시 일본은 중국을 먹으려고 만주에 스파이란 스파이는 다 들여 보냈어요. 한국 사람으로 가장한 일본 앞잡이가 들어오고 마적이 들끓고 거기다가 무산대중을 토대로 한 소비에트 정권 바람까지 불어 조선민족이 둘로 갈라져 아주 혼란스러웠죠. 아버님은 씨앗이 저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런 곳에서 아들을 데리고 있을 수 없어 저를 다시 한국으로 보내셨죠.
그 시절에는 만주에서 벌어진 우리 아버님 전쟁에 관한 호외가 수도 없이 뿌려졌어요. 그러니 저희 집안이 곤란할밖에요. 지금 김일성 아들이 남한에 산다고 하면 참 요절날 것 아닙니까. 근데 일제시대에 독립군 총사령관의 아들이라고 하면 김일성 아들보다 더 꼴보기 싫을 거 아니오? 그래서인지 안동 김가가 계동에 많이 살았지만, 독립군 총사령관의 아들인 나를 안 보는 거예요. 어머니 밑에서 외짝으로 자라다가 아버님은 불행하게도 저격을 당해 세상을 떠나셨죠.
그때 혹시라도 할머니와 어머니가 밀정을 하는 줄 알고 잡아갔어요. 일제 때는 재판도 안하고 10년이고 20년이고 그냥 내깔려둔단(가둔다) 말이야. 할머니하고 어머니는 형무소에서 나와 1년 정도 있다가 다 돌아가셨어요. 외삼촌이 있었는데 만날 도박하고 술 먹고…. 그때 인력거 타고 학교 댕길 만큼 괜찮게 살았는데 식모하구 나 하나밖에 없으니까 외삼촌이 집 팔고 땅 팔아 먹고 도망가서 여덟살 먹은 놈이 하루아침에 거지 된 거지.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종로2가 장차구 다리 밑구녕에서 고아로 자랐습니다.
-그 때문에 아버님 어머님을 원망한 적은 없었나요?
“여덟살 먹은 놈이 뭐 아나요. 하지만 저는 아버님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았죠. 왜냐하면 저희 아버님이 형평사 초대 회장이었거든요. 형평사는 조선 5백년 동안 천민으로 차별을 받으면서 사대문 밖에서 서럽게 살아온 백정들이 모인 집단으로 안동 김씨 가문이 최고 양반인데, 거기서 백정조합 초대회장 나왔다고 하면 집안이 난리 나는 거 아닙니까. 근데 아버님은 안동 김씨들한테 공갈을 쳐서 돈을 만들어 형평사 사람들에게 사대문 안에다 푸줏간을 내준 거죠.
그때 형평사 부회장을 하던 원씨라고 하는 노인이 있었는데 그 분이 인사동에서 설렁탕집을 했거든요. 근데 내가 당시 종로2가 다리 밑구녕에서 거지생활을 하며 깡통 차고 밥 얻어먹으러 다니다 거지 중의 상거지 꼴로 그 집에 들어가 모기만한 소리도 ‘밥 좀 주세요’ 하는데 이 양반이 저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버선발로 뛰어나오며 ‘너 두한이 아니냐’ 하길래 ‘제가 두한입니다’ 그랬더니 “네가 얼마나 귀한 집 아들인 줄 아느냐’면서 저를 붙들고 우는 거예요. 그러고는 날 끌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 깎아주고, 그 사이 양복을 사와서 입히고 목욕탕에 데리고 가더니만 할아버지가 손수 씻겨주고 설렁탕 먹이고 갈비 먹이고 소고기 먹이고… 그렇게 원노인 밑에서 열일곱살까지 성장한 거예요.”
-그분한테서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그 노인이 장롱 밑에서 아버님 사진을 슬그머니 끄집어내더니 ‘이게 네 아버지다 잘 봐라’ 하시면서 잊어버리지 말라고 한달에 한번씩 보여줬어요. 그러면서 ‘너 공부는 하지 마라, 공부를 많이 하면 자기 이해타산이 빨라 조국보다 자기 자신이 편하게 잘살 궁리만 해서 친일파가 되거나 반일사상이 투철해져 위험하다’면서 공부 안해도 스스로 깰 때가 있으니까 밥 먹고 운동만 하라면서 하루에 50전씩 주는 거예요. 당시 설렁탕 한 그릇에 10전 받았고, 극장은 50전 할 때였어요. 그리고 그 집에서 날마다 설렁탕 먹고 고기 먹고 운동만 하니까 키가 쑥쑥 자라대요.
설렁탕집 앞에 서울에서 제일 큰 극장이 있었는데 나는 무료로 들어갔어요. 원노인이 매일 50전을 주었지만 제가 체질상 오야붕 기질이 있어서 그 돈으로 동네 아이들 불러서 파고다 공원 뒷골목에서 호떡 하나씩 사줬죠. 극장 구경은 가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지. 극장을 넘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죠. 극장 앞에 쌍과부집이라고 있었는데 5전을 주면 사다리를 빌려줘요. 50전짜리 영화를 5전만 있으면 보는 거죠. 여자 변소간이 15개가 길게 뻗어 있는데 그 변소간 중 하나에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연결 통로가 있었어요. 그 칸의 문에 못을 박고 ‘고장 변소’라고 써붙이고 나만 거기를 통해 들어갔어요. 그러다 한번 들켜 소리도 못 지르고 지독하게 맞은 적이 있는데 아마 제가 열세살 때일 겁니다.
그때는 영화가 소리는 안 나오고 변사가 대신 해주는 무성영화였는데 하나같이 때리고 부수고 칼 쓰고 총 쏘는 서부 활극이었어요. 여덟살 때부터 그런 것만 10년 동안 봤으니까 사람 때리는 것밖에 못 배웠단 말이야. 그걸로 주먹대장 된 거예요. 허허허….
원노인을 만난 뒤 조선극장 옥상에 매달아놓은 샌드백을 치고 철봉과 아령으로 몸을 다지면서 사람 치는 것만 10년 동안 배운 거예요. 열여덟살 때부터 완전히 주먹대장으로 나가 스무살 때 전국의 주먹대장으로 등장했죠. 원노인은 나 열아홉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때는 자립해야 했는데 먹고 살 도리가 없으니까 사람 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죠. 힘도 있고, 울분도 많고 그러니까 사람을 치기 시작한 거죠. 전국을 휩쓰는 거예요. 만주까지 휩쓸었죠”
-단순히 힘이 세다는 것만으로 주먹대장이 되는 건 아닐 텐데.
“그때는 요즘 깡패들처럼 무기를 쓰는 게 아니라 순전히 주먹으로 했거든요. 체격은 타고났고, 다음은 담력이에요. 암만 힘이 세도 겁이 많으면 안되거든. 간땡이가 강철같이 굳어서 겁이 없어야지. 담력 있고 용맹 있고 날래고 하니까 천하무적이죠. 싸움을 잘하는 사람한테는 권투고 레슬링이고 당수고 유도고 간에 안돼요. 싸움이라고 하면, 요즘 중국영화에서 보면 휙휙 나는 거 있죠. 제가 한번 휙 나가 치면 20명 30명씩 나가떨어졌거든요. 그리고 웬만한 주먹이나 몽둥이로 맞아도 쓰러지지 않아야 돼요.”
-그런데 김선생님 손이 몹시 작습니다.
“술집에 가면 기생들이나 사람들이 내 손을 자꾸 쳐다봐요. 김선생 손은 수박덩이 같을 줄 알았는데 열일곱 먹은 소년 손처럼 예쁘다면서요. 사실 곰보만 아니면 나도 미남인데….”
-우미관 뒷골목 이야기도 끊임없이 오르내리던데요.
“구마적과 신마적이 있었어요. 가타(어깨) 오야붕들이죠. 구마적 기운이 얼마나 셌는가 하면 요새 자동차보다 두배 무거운 옛날 자동차 있죠. 그게 빵꾸(펑크)가 나면 왼손으로 든 채로 빵꾸 때울 때까지 오른손으로 담배 피우는 사람이죠. 손가락으로 잣을 깨고 동전을 깨고 그래요. 6척 장사였죠. 그 사람한테 붙잡히면 대롱대롱 매달려서 죽거든요. 신마적도 만만치 않았어요.
그런 구마적 신마적을 잡지 못하면 종로 협객 사회에서 오야붕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자신은 있었지만 구마적은 저보다 7년 정도 위였으니까 그래도 선배인데 대중 앞에서 때릴 수는 없었죠. 구마적은 고씨였는데 ‘사람이 많은 데서 고형이 맞으면 곤란하니 갑시다’ 하면서 밤에 조선극장 뒷마당으로 갔습니다. 그러면서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보다 세고 형편이 좋은 사람을 때려야지, 아침밥도 못 먹는 아이들, 극장에서 거적때기 깔고 자는 아이들을 때려 갈빗대를 부러뜨리는 그런 사람을 선배로 존경할 수 없어 당신 내가 좀 때려야겠다’ 경고하고 두발로 안면을 내질러버렸습니다. 그 소문이 신마적에게 들어간 거예요. 신마적은 스물넷으로 구마적보다는 조금 젊은데, 그 사람은 대학 중퇴를 해서 좀 인텔리예요.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방법으로 물리쳤어요.
그 외에도 여러 싸움패들이 있어요. 시구문패, 동대문패, 서대문패, 사지골패, 한강장사패… 역도 잘하는 놈, 철봉 잘하는 놈, 싸움 잘하는 놈, 박치기 잘하는 놈…. 그때가 어깨들의 춘추전국시대였어요. 그것을 쫓아가서 다 깨버리는 거예요. 역기 번쩍번쩍 들고 체격 좋아도 휙휙 날면서 발길로 차면 다 나가떨어졌어요. 싸움이라는 게 열번 때리면 한번은 맞고 그러는데 싸움은 그저 담력이 세야 하고 맷집도 좋아야 합니다. 나도 맞으면 떨어지니까. 그리고 날래야 합니다. 나는 이 세 가지 조건이 다 구비돼 있으니까 전국을 휩쓸어 스무살 때 전국 오야붕이 된 거죠. 그때 저를 잇뽕이라 했죠. 미국식으로 원 펀치란 소리지.”
-일본 야쿠자 세력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일본 야쿠자 한국지부가 지금의 충무로 1가에서 5가까지 주름잡았는데, 오야붕이 다 다르죠. 제일 먼저 붙은 것은 하야시 구미(패)였죠. 이들의 나와바리(구역)는 명동 입구로 그 건너편에 아사히 비루 회관이 있었는데 그곳엔 전부 일본 여자들만 있었죠. 그곳에 술을 먹으러 갔어요. 하야시 꼬붕(부하)들이 있다고 하지만 덮어놓고 시비를 걸 수는 없었죠. 그때 우리 권투계에서 유명한 권투선수들을 데리고 갔는데 일본 여자들이 권투선수가 왔다고 무척 좋아했죠. 그때 권투 선수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걸 본 일본 하야시 패거리들이 아니꼽다 싶어 우리쪽으로 사라(접시)를 던졌어요. 제가 기다린 바거든요. 그런데 권투하는 사람들은 싸움이 안돼요. 링에서 글러브 끼고 있을 때 이야기지. 저쪽은 두뼘 반짜리 칼을 갖고 있거든요. 일본 사람 특기가 칼 빼들고 찌르는 거 아닙니까.
내가 ‘왜 남의 술자리에 접시를 던지느냐’면서 ‘한번 붙어볼까’ 했더니 어느새 7~8명이 빙 둘러싸는 거예요. 그 가운데로 쓱 들어갔어요. 요즘 중국영화에서 보는 그 식이지. 단도를 들고 빙 둘러쌀 때 그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기운이 세서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간땡이가 크지 않으면 안되죠. 푹 찌르면 그냥 죽잖아요. 쓱 들어갈 때 벌써 두명은 뜨는(해치우는) 거예요. 들어가면서 한놈은 오른발에 떴고, 빙 돌면서 갈기니까 다른 한명이 떠버렸거든. 대여섯명 남았잖아요. 상대가 칼 들고 달려들 때 슬쩍 비키면서 발로 탁 치면 상대방 몸이 빙 돌아요. 그때 옆으로 빠지는 듯하면서 왼발로 옆구리를 치면 퍽 하고 쓰러지거든. 그렇게 대여섯명이 다 뻗었죠. 그 전에 정보를 입수한 순사들이 호루라기 불면서 들어왔어도 칼이 번쩍번쩍 하니까 접근을 못해요. 보기에 영화 같거든. 하지만 진짜니까 순사들도 겁이 나서 멍 하니 쳐다보고만 있는 거죠. 하지만 일본 야쿠자들은 깨끗해요. 졌다는 판단을 하면 깨끗이 물러나요. 단도를 앞에 탁 갖다 놓고 ‘형님’ 하면서 바닥에서 절을 하길래 ‘좋다, 가라’ 그랬죠.
그뒤에 중간 오야붕을 만나 한판 붙자고 했어요. 그때 ‘나는 맨손이니까 단도까지는 괜찮지만 비겁하게 일본도나 곡괭이는 들고 나오지 말라’는 조건을 내걸고 아침 6시에 장충공원에서 붙기로 했죠. 유도4단으로 제 오른팔인 김무옥을 비롯해 6명과 함께 갔어요. 행여 저들이 일본도를 가지고 들어올지 모르니까 파이프는 준비해 가자고 했죠. 손잡이에 고무를 감아서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배는 광목 감듯 호스로 칭칭 둘렀어요. 세겹을 감으면 웬만한 칼로 찔러도 잘 들어가질 않거든요. 혹 심장하고 복부를 다치면 치명적이니까요. 구두를 신어서도 안돼요. 권투선수들이 신는 신발 같은 걸 신어요. 그냥 신발은 벗겨지니까. 맨주먹으로 들어가다 보면 손이 찢어질 수가 있으니까 가죽장갑은 꼭 껴야 돼요.
약속시간에 현장에 갔는데 안개가 껴서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뭐가 번쩍 해요. 아니나 다를까 일본놈들이 곡괭이를 들고 온 거예요. 그중에는 일본놈에게 붙어 사는 한국놈들도 있어요. 슬쩍 치니까 곡괭이 하나가 떨어지는데 맞아서 떨어질 때 일본놈들은 ‘이타이이타이’ 하지만 한국사람들은 ‘아야야야’ 하잖아요. 평소 일본놈처럼 행세하다가 맞으면 본질이 나오는데 정작 일본놈보다 그런 놈들이 더 밉거든.
3명씩 나눠 붙어서 등을 지고 휘두르고 때리기를 40분 정도 하니까 햇빛이 장충공원을 비추면서 안개가 쓱 걷히는 거예요. 일본놈들이 나래비로 쓰러져 있는 가운데 일본도를 턱 쥐고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는데 바로 총 오야붕인 하야시였어요. 중간 오야붕은 그 옆에 서 있었구.
그때 내가 ‘당신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 단도까지는 괜찮지만 곡괭이나 일본도는 안 쓰기로 했는데 뭐냐. 당신 언제부터 이렇게 비겁했느냐. 칼 놓고 다시 하자’고 했더니 하야시가 칼을 버리고 일대일로 붙으라고 명령했어요. 우리는 6명, 저들은 수십명이었는데 순식간에 10여명이 즐비하게 나가떨어지니까 안되겠거든. 하야시가 그만 하라고 명령을 하더니 나를 보며 ‘긴또깡(김두한), 나와 형님 동생으로 친하게 지내지 않겠느냐’면서 자기 집으로 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갔더니 꼬붕들이 영화에서처럼 일본도를 쭉 들고 서있더군요.
내가 당시 스무살이고 그 사람(하야시)이 한 쉰쯤 됐는데 머리도 희끗희끗 했어요. 술 한잔 하면서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됐는데 그때부터는 해코지하지 않았어요. 대접상 형님 동생 할 뿐이었지 원칙적으로 주먹으로는 내가 이긴 거예요. 그뒤 설렁탕 한 그릇에 10전 하고, 담배 한갑이 10전, 냉면이 15전 할 때, 하야시가 한 달에 1천원씩 보내줬어요. 당시 인사동에서 1천원짜리 집을 사려면 지금(69년) 돈으로 3천만원짜리야. 대신 구역은 침범하지 마라 이거죠. 말하자면 일본놈한테 세금을 받은 거죠. 당시 조선총독 월급이 1만원인데 내 수입이 2만7천원 정도 됐단 말이에요.”
-종로경찰서 고등계 미와 형사와의 악연도 유명하다던데요.
“미와는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이었는데 그 사람한테 걸려 고문당하면 거의 죽음이었어요. 그 사람도 나를 잘 알거든요. 어머니 할머니 계실 때 우리집에도 왔으니까요. 미와가 나를 압록강 건너 만주는 못가게 했어요. 요시찰을 붙여놓은 거죠. 독립군 사령관 아들이니까. 어쨌든 경무국장, 경기도 경찰국장, 미와하고 술을 먹는데 그 술자리에서 미와가 내 얘기를 일일이 수첩에 적는 거예요. 기분이 대단히 나쁘더라고요. 술도 한잔 먹었겠다, 버릇을 한번 고쳐야겠다 싶어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당신 상관을 모시고 술을 먹는 이 마당에 수첩에 뭘 적느냐’면서 맥주병을 깨뜨려 던지려고 했더니 나머지 사람들이 참으라고 하면서 미와를 나무라더군요.
8월15일(해방되던 날)이 딱 되니까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게 미와가 튀면 안된다 싶어 총을 들고 미와 집으로 뛰어갔는데 사위와 손자들만 있고 미와는 없는 거예요. 조선인 식모를 협박해서 지하실 방공호에 있는 걸 알아냈어요. 거적 같은 것을 둘러쓰고 숨어있는 미와를 끌고 나와 대한민국 수립을 위해 군적도 없고 명예도 없이 죽은 사람들을 위한 위령탑이 서있는 곳에서 죽여 파묻어버렸어요. 순국 선열에 대한 복수를 제가 했죠.
-일본 헌병을 때려눕혀 구속된 적도 있었다면서요.
“아마추어 레슬링 전 동양 챔피언이던 황병관이라는 친구하고 종각 뒷골목에 있는 술집에 갔었죠. 그런데 황병관은 일본인들한테도 대인기였어요. 그때는 한국사람으로 출전한 게 아니고 일본을 대표해서 나갔거든요. 게다가 황병관은 며칠 뒤 학도병으로 나갈 상황이었어요. 그때 일본 헌병들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황병관하고 시비가 붙었죠. 그런데 헌병 중위가 칼을 쓱 빼드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사람 하나 죽이겠다 싶어 그놈하고 다른 한놈을 두발로 차버렸죠.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당시 군인을 때리면 즉결재판을 받는지라 황병관과 함께 도망쳐 봉은사 암자에서 석달을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을철 단풍이 으스스 하던 때 나와 보니 그 놈들이 그때 부하들을 모두 데려다가 고문을 한 겁니다. 팔다리가 부러진 부하들이 그때까지 병원에 다니고 있어 미안한 마음에 술집에 데리고 가 한잔 마시고 있는데 헌병이 새까맣게 들어와요. 또 싸울 수가 없어서 ‘내가 장본인으로 내 부하들은 죄가 없다, 나하고 가자’ 그랬더니 구루마에다 나를 칭칭 묶어서 헌병대로 끌고가 감옥에 가두더라고요.
그리고 며칠후 수갑을 채우고 얼굴에 검정보자기를 씌워 가지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거야. 검정보자기를 벗으니까 컴컴한 지하실이었는데 거기에는 뼈다귀만 남은 사람 7~8명이 매달려 죽어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았지만 나에게 겁을 주려고 일부러 고무로 만들어 놓은 거였어요. ‘전쟁통에 군인을 때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너도 저렇게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때 상관이 들어오더니 ‘너냐?’ 하면서 몽둥이로 머리를 냅다 쳐서 피가 주루룩 흘렀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죄목이냐? 죽는 놈도 알고 죽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때렸겠느냐. 사정을 들어 보고 그래도 죄가 되면 그때 죽이라’고 했죠. ‘천황폐하가 군인에게 칼을 하사할 때 적의 목을 치라는 것이었을 텐데 며칠 있으면 전쟁터에 나가 일본을 위해 싸울 학도병이 너네 적이냐? 그때 내가 참으라고 말로 했다면 내 목도 잘려나갔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됐겠느냐’며 다그쳤죠. 내가 군인을 때린 것은 나빴지만 천황이 내려준 고귀한 검에 아군의 피를 묻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임시방편으로 때린 거라고 하면서 그래도 그게 죄라고 하면 벌을 달게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를 다시 감옥에 넣더라구. 그 순간 휴~ 하고 한숨이 나오면서 ‘이제 살았구나’ 했습니다.
그 이튿날 헌병 대좌가 오더니 ‘뭐 좀 시켜다주랴?’ 하길래 ‘설렁탕을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두 그릇 시켜주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한가지 조건을 들어주면 내보내준다’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했더니 자기들이 유도하는 사람 대여섯명을 뽑았는데. 내가 자기들 보는 앞에서 세명을 쓰러뜨린다면 내보내주고 그렇지 않으면 나를 한참동안 여기에 가두겠다는 거야. 좋다고 했죠. 그 다음날, 이놈들이 어디서 뽑아왔는지 키는 장대처럼 큰데다 어깨가 딱 벌어진 놈들만 데리고 왔어요. 그때 내가 속으로 빙그레 웃었지. 너희 같은 고깃덩어리쯤이야 문제되지 않는다 이말이야 하면서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때려만 본 놈은 맞는 매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거든, 경찰이나 헌병은 남을 때려만 봤기 때문에 거꾸로 한번 맞으면 치명적이거든….
그래서 ‘이거 하다가 혹시 내가 죽으면 상관없지만 그 반대가 되면 나중에 나더러 사람 죽였다며 또 잡아넣을 것 아닙니까?’ 했더니 괜찮다며 대좌가 껄껄 웃어요. 그 사람 생각에는 다들 키가 8척이나 되는 몸뚱이로 김두한이 두배만 한데, 설마 김두한이한테 지랴 싶었던 거예요. 많은 일본놈들이 보는 앞에서 덩치들과 마주섰는데 그 몸뚱이 큰놈 하나가 대번에 달려드는 거예요. 들어오는 걸 단번에 두발로 면상을 치니까 얼굴이 터져 피를 흘리면서 고꾸라졌죠.
그러니까 둘째 놈이 들어온 거야. 거기는 키가 먼저 놈보단 조금 작은데 절구통 같았어요. 먼저 놈이 졌으니까 두번째 놈은 좀더 신중을 기할 거 아니오. 그런 놈한테 발만 붙잡히는 날이면 끝장이지. 그럴 땐 나도 머리를 써야 해요. 내가 먼저 느닷없이 공격하는 것처럼 움직이면 상대방이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일단 방어 차원에서 움직이게 돼 있어요. 사실 내 공격은 그것을 감안해서 두번째로 날리는 게 진짜거든. 급소를 향해 냅다 치니까 뚝 떨어져나가는 거야, 그러니 상대방이 식은땀이 줄줄 날 거 아닙니까? 그때 내가 대좌 앞에서 ‘이번에는 하나를 죽여야겠습니다. 무사도라고 하는 것이 한번 싸울 때는 여유를 두지만, 그 다음부터는 죽이는 것입니다. 사령관 용서하십시오’라며 궤변을 늘어놓으며 공갈을 쳤죠. 그랬더니 ‘됐다, 관둬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요.”
-어딘가에서 보니까 김선생답지 않게 연애를 한번 했다고 하는데…. 끝내 첫사랑에 그치고 말았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한국 주먹계도 휩쓸었고, 일본 야쿠자 휘어잡았고, 그리고 경찰, 헌병대까지 주먹으로 쳤으니 제가 우리나라 주먹계에서는 최고 오야붕 아닙니까. 제 위에는 없습니다. 육박전으로 하면 내가 최고였지만, 아버님 어머님 다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에 거지생활하며 먹고 살기 힘들었고, 공부도 못했고. 소학교 1학년 다닌 것이 내가 공부한 전부 아니오. 기운과 용맹은 펄펄 넘치는 남자였지만 그때는 여드름이 투둑투둑 나고, 눈은 쬐그만 데다 곰보딱지인데, 여자가 보면 반할 거 하나도 없거든. 그런데다 늘 어디서 어떤 놈이 치고 들어올지 모르는 판국에 술 먹고 여자 따라다니고 그러면 아무래도 약해진단 말씀이야. 완전히 성장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는 몸을 추려야 하거든요.
그런데 하루는 부하들이 구경을 가자고 해서 가는데, 서대문 로터리로 가면 백범 선생 경교장 맞은편에 동양극장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연극극장으로는 동양극장 그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영화관이고. 그때 한국산으로는 유일무일한, 그 뭐냐,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든가? 그걸 했거든요. 한국사람들은 어째 그렇게 울고 짜는 것을 좋아하는지. 사랑에 속고 돈에 운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하여간 그 조그만 극장이 빽빽이 차는 거예요.
2층에서 구경을 하는데 찔찔 짜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나올 때 보니까 이건 전부 초상집에 갔다온 사람들 같아. 나는 집에서도 라디오를 12시 안에는 못 틀게 합니다. 아침에 틀었다가 찔찔 짜는 거 들으면 그날 재수가 없거든. 비극을 좋아하는 국민은 절대 잘되는 법이 없어요. 외국영화를 보면 아침부터 깔깔 웃고 재미있고 즐거운데 말이야. 아, 밖에서 골치 아프지, 안에서 골치 아프지, 그런데다 라디오에서도 찔찔 울지, 극장에 가도 우는 사람 천지지, 그래서 나는 비극 같은 건 아예 안 보는데, 그거하고는 담쌓았는데 부하들이 가자니 어쩌겠어요.
그래서 심드렁하게 보고 저녁 무렵 극장에서 나와 종로로 가고 있는데 언덕길에서 사람들이 모여선 ‘어머, 저거 어떻게! 어떻게!’ 하면서 웅성거리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 싶어 들여다 봤더니, 서너명의 체격 좋은 놈들이 얌전해 보이는 사람을 발길로 차고 때리는 거예요. 옆에 있는 처녀들이 ‘오빠 어떻게! 오빠 어떻게!’ 하길래 내가 들어가서 ‘이리와! 임마! 주먹으로 한번 쳐서 떨어지면 그만이지 왜 짓밟어!’ 그랬더니 나보고 왜 끼어드는냐는 거예요. 그래서 ‘너 뭐야! 왜 약한 놈을 건드려’ 하면서 몇대 탁탁 치니까, 쭉 뻗었단 말이야. 그래 가지고 내가 ‘여보, 젊은 친구!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일어나시오. 일어나시오’ 하며 일으켜 세워 툭툭 털어주니까 주변에서 ‘아유 그 양반 근사하고 멋있네’ 하는 거야. 근데 그 옆에 있는 어떤 사람이 ‘저 사람이 서울 종로통의 오야붕 김두한이야!’ 그런단 말이야. 어떻게 해요. 그래서 그냥 쓱 걸어 올라가는데 처녀들이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며 나직하게 인사를 하길래 ‘뭐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하며 슬슬 걸어 내려왔죠.
근데 아까 두들겨 맞았던 사람이 계속 쫓아와서는 ‘선생님 죄송하지만 아까 제가 맞는 걸 말려주셔서 고마운데, 저희 누이동생들하고 잠깐 집에 가서 수박이라도 잡수시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남자 뒤에 서 있는 여자들을 슬쩍 보니까 곱상하게 생긴 얼굴을 다소곳하게 수그리고, 순박하게 있는데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그동안 술집에 다니면서 진하게 분칠한 얼굴에 거짓 웃음이 가득한 여자들은 많이 봤잖아요. 뭐 화류계 여자라 해서 순정과 진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거짓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여자들을 대하다가 암흑가 뒷골목의 무서운 주먹대장이 순결한 처녀를 탁 보니까, 나도 순정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갔단 말이에요.
그 집에 가서 그 사람들 어머니하고 아버지에게 인사하는데 좀 부끄럽더라고. 그때 내 모습이 머리는 빡빡 깎고, 여드름에 곰보딱지에다가 남자끼리 봐도 정나미 떨어지는 얼굴이었으니… 물론 지금도 미남은 아니지만. 하여간 그렇게 해서 수박을 먹고 ‘감사합니다. 가겠습니다’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여동생들 중 언니인 박양이 마중을 나와요. 그래도 그냥 서로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그걸로 헤어졌는데, 집에 와서 잠자리에 누워 가만히 생각하니까 옥양목 저고리에 비로도 치마에다가 순박한 얼굴 모습이 떠올라 괜히 가슴이 쿵쾅쿵쾅거리더라고요.
그런데 언제 만날 틈이 있어야지. 그래서 내 왼팔인 문영철을 보내 가지고 오빠를 불러내라고 했죠. 그 오빠가 보성전문학교 1학년이에요. 그렇게 저녁에 불러내서 빠(술집)에 턱하니 데리고 갔단 말이에요. ‘우리 자주 만납시다’ 하면서 처남되는 사람한테 돈도 50원 주면서….”
-여자 오빠를 처남이라고 불렀나요?
“그럼요. 처남은 채 안됐지만. 그때 순사 월급이 27원인데 50원이면 큰돈이거든요. 그때 설렁탕이 10전이었잖우(설렁탕 좋아하기로 소문난 김두한답게 그는 돈의 가치를 비교할 때마다 설렁탕 값은 빼놓질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 오빠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놓고 밑에 있는 꼬붕(부하)들한테 ‘이 자식한테 주먹 쓴다는 얘기 절대하지 말아라’ 하며 단단히 일러두었어요. 주먹대장이라고 그러면 도망가거든요. 그때 당시 암흑가 뒷골목의 오야붕이라고 하면 다들 부르르, 벌벌 떤단 말이에요. 여급들한테도 코치를 했죠. 밖에 다니면서 말조심하라고요. 누가 나에 대해 물으면 ‘김선생님 멀쩡하고 순박하다’라고 얘기하라고요, 허허 제가 그랬단 말이에요. 세계가 다르니까.
그러곤 어느날 처남 될 사람을 불러 가지고 한강에 보트놀이 가자고 했더니 여동생들을 데리고 나왔어요. 하나는 문영철이 맡고, 나는 언니 되는 사람을 맡아 다같이 한강 보트장으로 갔어요. 지금껏 주먹질은 많이 했어도 내가 데이트를 해봤어야 말이죠. 그러니까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여름철에 백색 양복에다가 까만 넥타이 꽉 매고 가서 속으로 고생했지.
지금은 버드나무가 없지만 그때는 버드나무가 많이 있었어요. 배를 타고 한강 건너 노량진 쪽으로 가는데 노량진패들이 200kg이나 되는 역기를 번쩍번쩍 들고 있는 거예요. 그때 제가 모른 척하고 그냥 보트나 탔으면 연애를 계속할 수 있었을 텐데. 처남 되는 사람이 ‘지난번에 선생님이 주먹으로 때리는 것을 보니 근사하던데, 저걸 한번 들어 보시죠’ 한단 말이야, 사람 치는 것하고 역기 드는 것하고 다르거든요. 그렇다고 못 든다고 할 수는 없고 한번 들긴 들어봐야 한다는 생각에 들어가서 ‘어, 실례합니다만 잠깐만 들어봅시다’ 하면서 웃옷을 벗어서 박양한테 들고 있으라며 건네주곤 역기를 들긴 들었는데…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번쩍 들려다가 엉덩이가 삐걱하는 바람에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탁 놓았단 말이에요. 근데 그때 역기가 쇠로 만든 게 아니라 시멘트에다 자갈을 섞어 만든 거라 바닥에 떨어지면서 부서진 거예요.”
-주먹은 그렇게 잘 쓰면서 어떻게 역기 드는 데 실패했는지….
“역기를 들면 몸에 근육이 많이 붙으니까, 펀치 들어가는 손이 느려져요. 상대방을 탁 때릴 때 주먹 들어가는 게 눈보다 빨라야 돼요. 눈 깜빡 하는 게 반초 아닙니까? 주먹이 들어가는 속도는 반초의 반이 되어야 돼요. 4분의 1초 만에 상대방을 건드리는 거죠. 그만큼 속도가 빨라야 상대가 고꾸라지는 거예요. 근데 역도를 하면 팔에 근육이 붙어 둔해져서 주먹질 쓰는 사람한테는 안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보트만 타고 돌아왔으면 괜찮을 텐데… 역기를 떨어뜨려 박살이 나자 가슴에 시커먼 털이 부숭부숭한 남자들이 ‘야, 이 자식아! 역기를 들려면 잘 들지 이게 뭐야? 여자만 데리고 다니면 제일이야!’ 이러면서 덤벼드는 거예요. 그냥 역기를 망가뜨려서 미안하다며 한 10원 집어주면 됐을 텐데…. 사람 본질이 그렇질 못하잖아요. 덤벼드는 사람을 슬쩍 피하면서 나도 모르게 딱 쳤는데 급소를 맞아 푹 꼬꾸라지는 거예요. 그랬더니 다른 놈들이 ‘아이고 이 놈이 사람 친다’ 하면서 또 들어오길래 서너명을 줄줄이 쓰러뜨렸단 말이야, 아 그랬더니 여자가 내 옷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거예요. 산통 다 깨진 거죠.
그리고 요새 세상에는 그저 사귀자마자 뽀뽀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기 전에 어린애 배고 하는 벼락치기 제트기 시대라지만 그때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순진했거든, 손 한번 못 쥡니다. 그러니까 요리집에 가서도 기생들 손도 제대로 만지지 못했어요. 그저 눈치 너머로 봐 가지고 여자들 처분만 기다리는 거지요.
하여간 그날 역기 하나 때문에 스타일 다 구기고 정체 들통나고, 건진 게 하나도 없었지요. 그러다가 박양이 타자 배우러 학원에 다닌다는 걸 오빠를 통해 알았어요. 그래서 학원 근처 주차장에서 기다리다가 저녁때쯤 나올 것 같으면 나타나 거기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행세했죠. ‘아이고 박양, 어디 가는가, 오래간만일세’ 하면서 말을 붙였더니 겁을 먹는 거예요. 안되겠다 싶어 지금 미도파 자리에 있던 경자옥이라는 백화점에 가서 화장품도 사주고 옷도 사주면서 달랬거든. 그때는 거기가 최고였거든. 그러다보니까 서로 정도 들면서 괜찮게 지냈는데…. 그놈의 헌병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잡혀 들어갔잖아요. 그때 벌컥 뒤집혔지. 이후 풀려나와 보니까 박양네 집에서 안되겠다며 박양을 다른 사람하고 강제로 약혼식을 치르게 한 후 나를 못 만나게 하느라 경기도 안성에 있는 외갓집으로 보내버렸어요. 그래서 없어져버렸어요. 그러니 어떻게 해. 딸을 달라고 공갈 협박할 수도 없는 거고. 제대로 연애 한번 못 해보고 이 주먹 하나 때문에 스타일만 구길 대로 구기고, 제대로 연애 한번 못 해보고 끝난 게 제 첫사랑입니다.”
“제가 1918년 음력 5월생인데 아버님이 만주로 떠나신 게 3·1운동 전 해라고 하니까 만 한살 전입니다. 어머니는 늘 아버님이 독립대장인데 일본놈과 전쟁하러 갔다면서 우리나라가 독립하면 곧 돌아온다고 했죠. 어머님은 그런 이야기를 귀에 닳도록 하셔서 지금도 그 말이 들리는 듯합니다.”
-아버님이 사립학교를 만들어 학생들을 키우기도 했다는데….
“아버님은 안동 김씨 부잣집에서 태어나셨죠. 논밭도 엄청났고 어선도 30척이나 갖고 있고 집도 시종이 2백명 정도 되는 아흔아홉칸짜리였대요. 근데 아버님이 할머니에게 거짓부렁을 했단 말이에요. 홍성에서 유명한 관상쟁이를 돈으로 매수해서 ‘좌진 도련님한테는 큰 액운이 있습니다. 액운을 떼어줘야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기도하는 동안 누가 와서 무슨 얘기를 하면 잡귀가 끄는 거니까 절대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마곡사로 백일 불공을 드리러 가셨죠.
아버님은 그 사이 청지기를 불러 벽장 속에 있는 논문서 밭문서 어선문서 가지고 나오라고 시킨 후 마당에 멍석 깔고 앉아 시종 2백명을 앞에 놓고 일장연설을 하셨대요.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부릴 수는 없는 것이니 지금부터 논문서 밭문서 어선문서 전부 나눠 갖고 종문서는 불지르고 가라’면서 시종을 해방시켰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아흔아홉칸짜리 집을 때려 부수고 호명중학교를 만들었답니다. 제가 봤을 때 당시 위대한 분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아버님도 김선생님만큼 체격이 크셨죠.
“제가 여섯살 때 만주에 갔을 때 아버님 품에 안겨봤는데, 아버님은 키가 6척이 넘었는데 키만 훌쩍 크시고 살은 별로 없었어요. 하지만 아령을 해서 탱탱했어요. 그 품에서 몇달간 자봤는데 아버님은 잠자리에 누울 때 항상 총을 가지고 있었고 바지저고리는 물론 버선도 벗지 않은 채로 주무셨어요. 아버님은 얼굴이 백옥 같아서 티 하나 없는 미남자였습니다. 근데 저는 외탁을 해서 잘생기지도 못한 데다 마마를 앓아서 곰보딱지가 됐어요.
아버님은 될 수 있으면 저를 키워서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는데 정세가 워낙 험했어요. 당시 일본은 중국을 먹으려고 만주에 스파이란 스파이는 다 들여 보냈어요. 한국 사람으로 가장한 일본 앞잡이가 들어오고 마적이 들끓고 거기다가 무산대중을 토대로 한 소비에트 정권 바람까지 불어 조선민족이 둘로 갈라져 아주 혼란스러웠죠. 아버님은 씨앗이 저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런 곳에서 아들을 데리고 있을 수 없어 저를 다시 한국으로 보내셨죠.
그 시절에는 만주에서 벌어진 우리 아버님 전쟁에 관한 호외가 수도 없이 뿌려졌어요. 그러니 저희 집안이 곤란할밖에요. 지금 김일성 아들이 남한에 산다고 하면 참 요절날 것 아닙니까. 근데 일제시대에 독립군 총사령관의 아들이라고 하면 김일성 아들보다 더 꼴보기 싫을 거 아니오? 그래서인지 안동 김가가 계동에 많이 살았지만, 독립군 총사령관의 아들인 나를 안 보는 거예요. 어머니 밑에서 외짝으로 자라다가 아버님은 불행하게도 저격을 당해 세상을 떠나셨죠.
그때 혹시라도 할머니와 어머니가 밀정을 하는 줄 알고 잡아갔어요. 일제 때는 재판도 안하고 10년이고 20년이고 그냥 내깔려둔단(가둔다) 말이야. 할머니하고 어머니는 형무소에서 나와 1년 정도 있다가 다 돌아가셨어요. 외삼촌이 있었는데 만날 도박하고 술 먹고…. 그때 인력거 타고 학교 댕길 만큼 괜찮게 살았는데 식모하구 나 하나밖에 없으니까 외삼촌이 집 팔고 땅 팔아 먹고 도망가서 여덟살 먹은 놈이 하루아침에 거지 된 거지.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종로2가 장차구 다리 밑구녕에서 고아로 자랐습니다.
-그 때문에 아버님 어머님을 원망한 적은 없었나요?
김두한의 아버지 김좌진 장군.
그때 형평사 부회장을 하던 원씨라고 하는 노인이 있었는데 그 분이 인사동에서 설렁탕집을 했거든요. 근데 내가 당시 종로2가 다리 밑구녕에서 거지생활을 하며 깡통 차고 밥 얻어먹으러 다니다 거지 중의 상거지 꼴로 그 집에 들어가 모기만한 소리도 ‘밥 좀 주세요’ 하는데 이 양반이 저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버선발로 뛰어나오며 ‘너 두한이 아니냐’ 하길래 ‘제가 두한입니다’ 그랬더니 “네가 얼마나 귀한 집 아들인 줄 아느냐’면서 저를 붙들고 우는 거예요. 그러고는 날 끌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 깎아주고, 그 사이 양복을 사와서 입히고 목욕탕에 데리고 가더니만 할아버지가 손수 씻겨주고 설렁탕 먹이고 갈비 먹이고 소고기 먹이고… 그렇게 원노인 밑에서 열일곱살까지 성장한 거예요.”
-그분한테서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그 노인이 장롱 밑에서 아버님 사진을 슬그머니 끄집어내더니 ‘이게 네 아버지다 잘 봐라’ 하시면서 잊어버리지 말라고 한달에 한번씩 보여줬어요. 그러면서 ‘너 공부는 하지 마라, 공부를 많이 하면 자기 이해타산이 빨라 조국보다 자기 자신이 편하게 잘살 궁리만 해서 친일파가 되거나 반일사상이 투철해져 위험하다’면서 공부 안해도 스스로 깰 때가 있으니까 밥 먹고 운동만 하라면서 하루에 50전씩 주는 거예요. 당시 설렁탕 한 그릇에 10전 받았고, 극장은 50전 할 때였어요. 그리고 그 집에서 날마다 설렁탕 먹고 고기 먹고 운동만 하니까 키가 쑥쑥 자라대요.
설렁탕집 앞에 서울에서 제일 큰 극장이 있었는데 나는 무료로 들어갔어요. 원노인이 매일 50전을 주었지만 제가 체질상 오야붕 기질이 있어서 그 돈으로 동네 아이들 불러서 파고다 공원 뒷골목에서 호떡 하나씩 사줬죠. 극장 구경은 가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지. 극장을 넘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죠. 극장 앞에 쌍과부집이라고 있었는데 5전을 주면 사다리를 빌려줘요. 50전짜리 영화를 5전만 있으면 보는 거죠. 여자 변소간이 15개가 길게 뻗어 있는데 그 변소간 중 하나에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연결 통로가 있었어요. 그 칸의 문에 못을 박고 ‘고장 변소’라고 써붙이고 나만 거기를 통해 들어갔어요. 그러다 한번 들켜 소리도 못 지르고 지독하게 맞은 적이 있는데 아마 제가 열세살 때일 겁니다.
그때는 영화가 소리는 안 나오고 변사가 대신 해주는 무성영화였는데 하나같이 때리고 부수고 칼 쓰고 총 쏘는 서부 활극이었어요. 여덟살 때부터 그런 것만 10년 동안 봤으니까 사람 때리는 것밖에 못 배웠단 말이야. 그걸로 주먹대장 된 거예요. 허허허….
원노인을 만난 뒤 조선극장 옥상에 매달아놓은 샌드백을 치고 철봉과 아령으로 몸을 다지면서 사람 치는 것만 10년 동안 배운 거예요. 열여덟살 때부터 완전히 주먹대장으로 나가 스무살 때 전국의 주먹대장으로 등장했죠. 원노인은 나 열아홉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때는 자립해야 했는데 먹고 살 도리가 없으니까 사람 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죠. 힘도 있고, 울분도 많고 그러니까 사람을 치기 시작한 거죠. 전국을 휩쓰는 거예요. 만주까지 휩쓸었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김두한.
“그때는 요즘 깡패들처럼 무기를 쓰는 게 아니라 순전히 주먹으로 했거든요. 체격은 타고났고, 다음은 담력이에요. 암만 힘이 세도 겁이 많으면 안되거든. 간땡이가 강철같이 굳어서 겁이 없어야지. 담력 있고 용맹 있고 날래고 하니까 천하무적이죠. 싸움을 잘하는 사람한테는 권투고 레슬링이고 당수고 유도고 간에 안돼요. 싸움이라고 하면, 요즘 중국영화에서 보면 휙휙 나는 거 있죠. 제가 한번 휙 나가 치면 20명 30명씩 나가떨어졌거든요. 그리고 웬만한 주먹이나 몽둥이로 맞아도 쓰러지지 않아야 돼요.”
-그런데 김선생님 손이 몹시 작습니다.
“술집에 가면 기생들이나 사람들이 내 손을 자꾸 쳐다봐요. 김선생 손은 수박덩이 같을 줄 알았는데 열일곱 먹은 소년 손처럼 예쁘다면서요. 사실 곰보만 아니면 나도 미남인데….”
-우미관 뒷골목 이야기도 끊임없이 오르내리던데요.
“구마적과 신마적이 있었어요. 가타(어깨) 오야붕들이죠. 구마적 기운이 얼마나 셌는가 하면 요새 자동차보다 두배 무거운 옛날 자동차 있죠. 그게 빵꾸(펑크)가 나면 왼손으로 든 채로 빵꾸 때울 때까지 오른손으로 담배 피우는 사람이죠. 손가락으로 잣을 깨고 동전을 깨고 그래요. 6척 장사였죠. 그 사람한테 붙잡히면 대롱대롱 매달려서 죽거든요. 신마적도 만만치 않았어요.
그런 구마적 신마적을 잡지 못하면 종로 협객 사회에서 오야붕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자신은 있었지만 구마적은 저보다 7년 정도 위였으니까 그래도 선배인데 대중 앞에서 때릴 수는 없었죠. 구마적은 고씨였는데 ‘사람이 많은 데서 고형이 맞으면 곤란하니 갑시다’ 하면서 밤에 조선극장 뒷마당으로 갔습니다. 그러면서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보다 세고 형편이 좋은 사람을 때려야지, 아침밥도 못 먹는 아이들, 극장에서 거적때기 깔고 자는 아이들을 때려 갈빗대를 부러뜨리는 그런 사람을 선배로 존경할 수 없어 당신 내가 좀 때려야겠다’ 경고하고 두발로 안면을 내질러버렸습니다. 그 소문이 신마적에게 들어간 거예요. 신마적은 스물넷으로 구마적보다는 조금 젊은데, 그 사람은 대학 중퇴를 해서 좀 인텔리예요.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방법으로 물리쳤어요.
그 외에도 여러 싸움패들이 있어요. 시구문패, 동대문패, 서대문패, 사지골패, 한강장사패… 역도 잘하는 놈, 철봉 잘하는 놈, 싸움 잘하는 놈, 박치기 잘하는 놈…. 그때가 어깨들의 춘추전국시대였어요. 그것을 쫓아가서 다 깨버리는 거예요. 역기 번쩍번쩍 들고 체격 좋아도 휙휙 날면서 발길로 차면 다 나가떨어졌어요. 싸움이라는 게 열번 때리면 한번은 맞고 그러는데 싸움은 그저 담력이 세야 하고 맷집도 좋아야 합니다. 나도 맞으면 떨어지니까. 그리고 날래야 합니다. 나는 이 세 가지 조건이 다 구비돼 있으니까 전국을 휩쓸어 스무살 때 전국 오야붕이 된 거죠. 그때 저를 잇뽕이라 했죠. 미국식으로 원 펀치란 소리지.”
-일본 야쿠자 세력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일본 야쿠자 한국지부가 지금의 충무로 1가에서 5가까지 주름잡았는데, 오야붕이 다 다르죠. 제일 먼저 붙은 것은 하야시 구미(패)였죠. 이들의 나와바리(구역)는 명동 입구로 그 건너편에 아사히 비루 회관이 있었는데 그곳엔 전부 일본 여자들만 있었죠. 그곳에 술을 먹으러 갔어요. 하야시 꼬붕(부하)들이 있다고 하지만 덮어놓고 시비를 걸 수는 없었죠. 그때 우리 권투계에서 유명한 권투선수들을 데리고 갔는데 일본 여자들이 권투선수가 왔다고 무척 좋아했죠. 그때 권투 선수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걸 본 일본 하야시 패거리들이 아니꼽다 싶어 우리쪽으로 사라(접시)를 던졌어요. 제가 기다린 바거든요. 그런데 권투하는 사람들은 싸움이 안돼요. 링에서 글러브 끼고 있을 때 이야기지. 저쪽은 두뼘 반짜리 칼을 갖고 있거든요. 일본 사람 특기가 칼 빼들고 찌르는 거 아닙니까.
내가 ‘왜 남의 술자리에 접시를 던지느냐’면서 ‘한번 붙어볼까’ 했더니 어느새 7~8명이 빙 둘러싸는 거예요. 그 가운데로 쓱 들어갔어요. 요즘 중국영화에서 보는 그 식이지. 단도를 들고 빙 둘러쌀 때 그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기운이 세서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간땡이가 크지 않으면 안되죠. 푹 찌르면 그냥 죽잖아요. 쓱 들어갈 때 벌써 두명은 뜨는(해치우는) 거예요. 들어가면서 한놈은 오른발에 떴고, 빙 돌면서 갈기니까 다른 한명이 떠버렸거든. 대여섯명 남았잖아요. 상대가 칼 들고 달려들 때 슬쩍 비키면서 발로 탁 치면 상대방 몸이 빙 돌아요. 그때 옆으로 빠지는 듯하면서 왼발로 옆구리를 치면 퍽 하고 쓰러지거든. 그렇게 대여섯명이 다 뻗었죠. 그 전에 정보를 입수한 순사들이 호루라기 불면서 들어왔어도 칼이 번쩍번쩍 하니까 접근을 못해요. 보기에 영화 같거든. 하지만 진짜니까 순사들도 겁이 나서 멍 하니 쳐다보고만 있는 거죠. 하지만 일본 야쿠자들은 깨끗해요. 졌다는 판단을 하면 깨끗이 물러나요. 단도를 앞에 탁 갖다 놓고 ‘형님’ 하면서 바닥에서 절을 하길래 ‘좋다, 가라’ 그랬죠.
그뒤에 중간 오야붕을 만나 한판 붙자고 했어요. 그때 ‘나는 맨손이니까 단도까지는 괜찮지만 비겁하게 일본도나 곡괭이는 들고 나오지 말라’는 조건을 내걸고 아침 6시에 장충공원에서 붙기로 했죠. 유도4단으로 제 오른팔인 김무옥을 비롯해 6명과 함께 갔어요. 행여 저들이 일본도를 가지고 들어올지 모르니까 파이프는 준비해 가자고 했죠. 손잡이에 고무를 감아서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배는 광목 감듯 호스로 칭칭 둘렀어요. 세겹을 감으면 웬만한 칼로 찔러도 잘 들어가질 않거든요. 혹 심장하고 복부를 다치면 치명적이니까요. 구두를 신어서도 안돼요. 권투선수들이 신는 신발 같은 걸 신어요. 그냥 신발은 벗겨지니까. 맨주먹으로 들어가다 보면 손이 찢어질 수가 있으니까 가죽장갑은 꼭 껴야 돼요.
약속시간에 현장에 갔는데 안개가 껴서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뭐가 번쩍 해요. 아니나 다를까 일본놈들이 곡괭이를 들고 온 거예요. 그중에는 일본놈에게 붙어 사는 한국놈들도 있어요. 슬쩍 치니까 곡괭이 하나가 떨어지는데 맞아서 떨어질 때 일본놈들은 ‘이타이이타이’ 하지만 한국사람들은 ‘아야야야’ 하잖아요. 평소 일본놈처럼 행세하다가 맞으면 본질이 나오는데 정작 일본놈보다 그런 놈들이 더 밉거든.
3명씩 나눠 붙어서 등을 지고 휘두르고 때리기를 40분 정도 하니까 햇빛이 장충공원을 비추면서 안개가 쓱 걷히는 거예요. 일본놈들이 나래비로 쓰러져 있는 가운데 일본도를 턱 쥐고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는데 바로 총 오야붕인 하야시였어요. 중간 오야붕은 그 옆에 서 있었구.
그때 내가 ‘당신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 단도까지는 괜찮지만 곡괭이나 일본도는 안 쓰기로 했는데 뭐냐. 당신 언제부터 이렇게 비겁했느냐. 칼 놓고 다시 하자’고 했더니 하야시가 칼을 버리고 일대일로 붙으라고 명령했어요. 우리는 6명, 저들은 수십명이었는데 순식간에 10여명이 즐비하게 나가떨어지니까 안되겠거든. 하야시가 그만 하라고 명령을 하더니 나를 보며 ‘긴또깡(김두한), 나와 형님 동생으로 친하게 지내지 않겠느냐’면서 자기 집으로 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갔더니 꼬붕들이 영화에서처럼 일본도를 쭉 들고 서있더군요.
내가 당시 스무살이고 그 사람(하야시)이 한 쉰쯤 됐는데 머리도 희끗희끗 했어요. 술 한잔 하면서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됐는데 그때부터는 해코지하지 않았어요. 대접상 형님 동생 할 뿐이었지 원칙적으로 주먹으로는 내가 이긴 거예요. 그뒤 설렁탕 한 그릇에 10전 하고, 담배 한갑이 10전, 냉면이 15전 할 때, 하야시가 한 달에 1천원씩 보내줬어요. 당시 인사동에서 1천원짜리 집을 사려면 지금(69년) 돈으로 3천만원짜리야. 대신 구역은 침범하지 마라 이거죠. 말하자면 일본놈한테 세금을 받은 거죠. 당시 조선총독 월급이 1만원인데 내 수입이 2만7천원 정도 됐단 말이에요.”
-종로경찰서 고등계 미와 형사와의 악연도 유명하다던데요.
“미와는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이었는데 그 사람한테 걸려 고문당하면 거의 죽음이었어요. 그 사람도 나를 잘 알거든요. 어머니 할머니 계실 때 우리집에도 왔으니까요. 미와가 나를 압록강 건너 만주는 못가게 했어요. 요시찰을 붙여놓은 거죠. 독립군 사령관 아들이니까. 어쨌든 경무국장, 경기도 경찰국장, 미와하고 술을 먹는데 그 술자리에서 미와가 내 얘기를 일일이 수첩에 적는 거예요. 기분이 대단히 나쁘더라고요. 술도 한잔 먹었겠다, 버릇을 한번 고쳐야겠다 싶어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당신 상관을 모시고 술을 먹는 이 마당에 수첩에 뭘 적느냐’면서 맥주병을 깨뜨려 던지려고 했더니 나머지 사람들이 참으라고 하면서 미와를 나무라더군요.
8월15일(해방되던 날)이 딱 되니까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게 미와가 튀면 안된다 싶어 총을 들고 미와 집으로 뛰어갔는데 사위와 손자들만 있고 미와는 없는 거예요. 조선인 식모를 협박해서 지하실 방공호에 있는 걸 알아냈어요. 거적 같은 것을 둘러쓰고 숨어있는 미와를 끌고 나와 대한민국 수립을 위해 군적도 없고 명예도 없이 죽은 사람들을 위한 위령탑이 서있는 곳에서 죽여 파묻어버렸어요. 순국 선열에 대한 복수를 제가 했죠.
-일본 헌병을 때려눕혀 구속된 적도 있었다면서요.
“아마추어 레슬링 전 동양 챔피언이던 황병관이라는 친구하고 종각 뒷골목에 있는 술집에 갔었죠. 그런데 황병관은 일본인들한테도 대인기였어요. 그때는 한국사람으로 출전한 게 아니고 일본을 대표해서 나갔거든요. 게다가 황병관은 며칠 뒤 학도병으로 나갈 상황이었어요. 그때 일본 헌병들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황병관하고 시비가 붙었죠. 그런데 헌병 중위가 칼을 쓱 빼드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사람 하나 죽이겠다 싶어 그놈하고 다른 한놈을 두발로 차버렸죠.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당시 군인을 때리면 즉결재판을 받는지라 황병관과 함께 도망쳐 봉은사 암자에서 석달을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을철 단풍이 으스스 하던 때 나와 보니 그 놈들이 그때 부하들을 모두 데려다가 고문을 한 겁니다. 팔다리가 부러진 부하들이 그때까지 병원에 다니고 있어 미안한 마음에 술집에 데리고 가 한잔 마시고 있는데 헌병이 새까맣게 들어와요. 또 싸울 수가 없어서 ‘내가 장본인으로 내 부하들은 죄가 없다, 나하고 가자’ 그랬더니 구루마에다 나를 칭칭 묶어서 헌병대로 끌고가 감옥에 가두더라고요.
그리고 며칠후 수갑을 채우고 얼굴에 검정보자기를 씌워 가지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거야. 검정보자기를 벗으니까 컴컴한 지하실이었는데 거기에는 뼈다귀만 남은 사람 7~8명이 매달려 죽어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았지만 나에게 겁을 주려고 일부러 고무로 만들어 놓은 거였어요. ‘전쟁통에 군인을 때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너도 저렇게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때 상관이 들어오더니 ‘너냐?’ 하면서 몽둥이로 머리를 냅다 쳐서 피가 주루룩 흘렀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죄목이냐? 죽는 놈도 알고 죽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때렸겠느냐. 사정을 들어 보고 그래도 죄가 되면 그때 죽이라’고 했죠. ‘천황폐하가 군인에게 칼을 하사할 때 적의 목을 치라는 것이었을 텐데 며칠 있으면 전쟁터에 나가 일본을 위해 싸울 학도병이 너네 적이냐? 그때 내가 참으라고 말로 했다면 내 목도 잘려나갔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됐겠느냐’며 다그쳤죠. 내가 군인을 때린 것은 나빴지만 천황이 내려준 고귀한 검에 아군의 피를 묻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임시방편으로 때린 거라고 하면서 그래도 그게 죄라고 하면 벌을 달게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를 다시 감옥에 넣더라구. 그 순간 휴~ 하고 한숨이 나오면서 ‘이제 살았구나’ 했습니다.
그 이튿날 헌병 대좌가 오더니 ‘뭐 좀 시켜다주랴?’ 하길래 ‘설렁탕을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두 그릇 시켜주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한가지 조건을 들어주면 내보내준다’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했더니 자기들이 유도하는 사람 대여섯명을 뽑았는데. 내가 자기들 보는 앞에서 세명을 쓰러뜨린다면 내보내주고 그렇지 않으면 나를 한참동안 여기에 가두겠다는 거야. 좋다고 했죠. 그 다음날, 이놈들이 어디서 뽑아왔는지 키는 장대처럼 큰데다 어깨가 딱 벌어진 놈들만 데리고 왔어요. 그때 내가 속으로 빙그레 웃었지. 너희 같은 고깃덩어리쯤이야 문제되지 않는다 이말이야 하면서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때려만 본 놈은 맞는 매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거든, 경찰이나 헌병은 남을 때려만 봤기 때문에 거꾸로 한번 맞으면 치명적이거든….
그래서 ‘이거 하다가 혹시 내가 죽으면 상관없지만 그 반대가 되면 나중에 나더러 사람 죽였다며 또 잡아넣을 것 아닙니까?’ 했더니 괜찮다며 대좌가 껄껄 웃어요. 그 사람 생각에는 다들 키가 8척이나 되는 몸뚱이로 김두한이 두배만 한데, 설마 김두한이한테 지랴 싶었던 거예요. 많은 일본놈들이 보는 앞에서 덩치들과 마주섰는데 그 몸뚱이 큰놈 하나가 대번에 달려드는 거예요. 들어오는 걸 단번에 두발로 면상을 치니까 얼굴이 터져 피를 흘리면서 고꾸라졌죠.
그러니까 둘째 놈이 들어온 거야. 거기는 키가 먼저 놈보단 조금 작은데 절구통 같았어요. 먼저 놈이 졌으니까 두번째 놈은 좀더 신중을 기할 거 아니오. 그런 놈한테 발만 붙잡히는 날이면 끝장이지. 그럴 땐 나도 머리를 써야 해요. 내가 먼저 느닷없이 공격하는 것처럼 움직이면 상대방이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일단 방어 차원에서 움직이게 돼 있어요. 사실 내 공격은 그것을 감안해서 두번째로 날리는 게 진짜거든. 급소를 향해 냅다 치니까 뚝 떨어져나가는 거야, 그러니 상대방이 식은땀이 줄줄 날 거 아닙니까? 그때 내가 대좌 앞에서 ‘이번에는 하나를 죽여야겠습니다. 무사도라고 하는 것이 한번 싸울 때는 여유를 두지만, 그 다음부터는 죽이는 것입니다. 사령관 용서하십시오’라며 궤변을 늘어놓으며 공갈을 쳤죠. 그랬더니 ‘됐다, 관둬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요.”
-어딘가에서 보니까 김선생답지 않게 연애를 한번 했다고 하는데…. 끝내 첫사랑에 그치고 말았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한국 주먹계도 휩쓸었고, 일본 야쿠자 휘어잡았고, 그리고 경찰, 헌병대까지 주먹으로 쳤으니 제가 우리나라 주먹계에서는 최고 오야붕 아닙니까. 제 위에는 없습니다. 육박전으로 하면 내가 최고였지만, 아버님 어머님 다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에 거지생활하며 먹고 살기 힘들었고, 공부도 못했고. 소학교 1학년 다닌 것이 내가 공부한 전부 아니오. 기운과 용맹은 펄펄 넘치는 남자였지만 그때는 여드름이 투둑투둑 나고, 눈은 쬐그만 데다 곰보딱지인데, 여자가 보면 반할 거 하나도 없거든. 그런데다 늘 어디서 어떤 놈이 치고 들어올지 모르는 판국에 술 먹고 여자 따라다니고 그러면 아무래도 약해진단 말씀이야. 완전히 성장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는 몸을 추려야 하거든요.
그런데 하루는 부하들이 구경을 가자고 해서 가는데, 서대문 로터리로 가면 백범 선생 경교장 맞은편에 동양극장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연극극장으로는 동양극장 그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영화관이고. 그때 한국산으로는 유일무일한, 그 뭐냐,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든가? 그걸 했거든요. 한국사람들은 어째 그렇게 울고 짜는 것을 좋아하는지. 사랑에 속고 돈에 운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하여간 그 조그만 극장이 빽빽이 차는 거예요.
2층에서 구경을 하는데 찔찔 짜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나올 때 보니까 이건 전부 초상집에 갔다온 사람들 같아. 나는 집에서도 라디오를 12시 안에는 못 틀게 합니다. 아침에 틀었다가 찔찔 짜는 거 들으면 그날 재수가 없거든. 비극을 좋아하는 국민은 절대 잘되는 법이 없어요. 외국영화를 보면 아침부터 깔깔 웃고 재미있고 즐거운데 말이야. 아, 밖에서 골치 아프지, 안에서 골치 아프지, 그런데다 라디오에서도 찔찔 울지, 극장에 가도 우는 사람 천지지, 그래서 나는 비극 같은 건 아예 안 보는데, 그거하고는 담쌓았는데 부하들이 가자니 어쩌겠어요.
그래서 심드렁하게 보고 저녁 무렵 극장에서 나와 종로로 가고 있는데 언덕길에서 사람들이 모여선 ‘어머, 저거 어떻게! 어떻게!’ 하면서 웅성거리는 거예요. 그래서 뭔가 싶어 들여다 봤더니, 서너명의 체격 좋은 놈들이 얌전해 보이는 사람을 발길로 차고 때리는 거예요. 옆에 있는 처녀들이 ‘오빠 어떻게! 오빠 어떻게!’ 하길래 내가 들어가서 ‘이리와! 임마! 주먹으로 한번 쳐서 떨어지면 그만이지 왜 짓밟어!’ 그랬더니 나보고 왜 끼어드는냐는 거예요. 그래서 ‘너 뭐야! 왜 약한 놈을 건드려’ 하면서 몇대 탁탁 치니까, 쭉 뻗었단 말이야. 그래 가지고 내가 ‘여보, 젊은 친구!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일어나시오. 일어나시오’ 하며 일으켜 세워 툭툭 털어주니까 주변에서 ‘아유 그 양반 근사하고 멋있네’ 하는 거야. 근데 그 옆에 있는 어떤 사람이 ‘저 사람이 서울 종로통의 오야붕 김두한이야!’ 그런단 말이야. 어떻게 해요. 그래서 그냥 쓱 걸어 올라가는데 처녀들이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며 나직하게 인사를 하길래 ‘뭐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하며 슬슬 걸어 내려왔죠.
근데 아까 두들겨 맞았던 사람이 계속 쫓아와서는 ‘선생님 죄송하지만 아까 제가 맞는 걸 말려주셔서 고마운데, 저희 누이동생들하고 잠깐 집에 가서 수박이라도 잡수시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남자 뒤에 서 있는 여자들을 슬쩍 보니까 곱상하게 생긴 얼굴을 다소곳하게 수그리고, 순박하게 있는데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그동안 술집에 다니면서 진하게 분칠한 얼굴에 거짓 웃음이 가득한 여자들은 많이 봤잖아요. 뭐 화류계 여자라 해서 순정과 진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거짓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여자들을 대하다가 암흑가 뒷골목의 무서운 주먹대장이 순결한 처녀를 탁 보니까, 나도 순정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갔단 말이에요.
그 집에 가서 그 사람들 어머니하고 아버지에게 인사하는데 좀 부끄럽더라고. 그때 내 모습이 머리는 빡빡 깎고, 여드름에 곰보딱지에다가 남자끼리 봐도 정나미 떨어지는 얼굴이었으니… 물론 지금도 미남은 아니지만. 하여간 그렇게 해서 수박을 먹고 ‘감사합니다. 가겠습니다’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여동생들 중 언니인 박양이 마중을 나와요. 그래도 그냥 서로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그걸로 헤어졌는데, 집에 와서 잠자리에 누워 가만히 생각하니까 옥양목 저고리에 비로도 치마에다가 순박한 얼굴 모습이 떠올라 괜히 가슴이 쿵쾅쿵쾅거리더라고요.
그런데 언제 만날 틈이 있어야지. 그래서 내 왼팔인 문영철을 보내 가지고 오빠를 불러내라고 했죠. 그 오빠가 보성전문학교 1학년이에요. 그렇게 저녁에 불러내서 빠(술집)에 턱하니 데리고 갔단 말이에요. ‘우리 자주 만납시다’ 하면서 처남되는 사람한테 돈도 50원 주면서….”
장남의 돌을 맞아 서울 낙원동 집에서 부인 김부미씨와 함께한 모습
“그럼요. 처남은 채 안됐지만. 그때 순사 월급이 27원인데 50원이면 큰돈이거든요. 그때 설렁탕이 10전이었잖우(설렁탕 좋아하기로 소문난 김두한답게 그는 돈의 가치를 비교할 때마다 설렁탕 값은 빼놓질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 오빠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놓고 밑에 있는 꼬붕(부하)들한테 ‘이 자식한테 주먹 쓴다는 얘기 절대하지 말아라’ 하며 단단히 일러두었어요. 주먹대장이라고 그러면 도망가거든요. 그때 당시 암흑가 뒷골목의 오야붕이라고 하면 다들 부르르, 벌벌 떤단 말이에요. 여급들한테도 코치를 했죠. 밖에 다니면서 말조심하라고요. 누가 나에 대해 물으면 ‘김선생님 멀쩡하고 순박하다’라고 얘기하라고요, 허허 제가 그랬단 말이에요. 세계가 다르니까.
그러곤 어느날 처남 될 사람을 불러 가지고 한강에 보트놀이 가자고 했더니 여동생들을 데리고 나왔어요. 하나는 문영철이 맡고, 나는 언니 되는 사람을 맡아 다같이 한강 보트장으로 갔어요. 지금껏 주먹질은 많이 했어도 내가 데이트를 해봤어야 말이죠. 그러니까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여름철에 백색 양복에다가 까만 넥타이 꽉 매고 가서 속으로 고생했지.
지금은 버드나무가 없지만 그때는 버드나무가 많이 있었어요. 배를 타고 한강 건너 노량진 쪽으로 가는데 노량진패들이 200kg이나 되는 역기를 번쩍번쩍 들고 있는 거예요. 그때 제가 모른 척하고 그냥 보트나 탔으면 연애를 계속할 수 있었을 텐데. 처남 되는 사람이 ‘지난번에 선생님이 주먹으로 때리는 것을 보니 근사하던데, 저걸 한번 들어 보시죠’ 한단 말이야, 사람 치는 것하고 역기 드는 것하고 다르거든요. 그렇다고 못 든다고 할 수는 없고 한번 들긴 들어봐야 한다는 생각에 들어가서 ‘어, 실례합니다만 잠깐만 들어봅시다’ 하면서 웃옷을 벗어서 박양한테 들고 있으라며 건네주곤 역기를 들긴 들었는데…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번쩍 들려다가 엉덩이가 삐걱하는 바람에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탁 놓았단 말이에요. 근데 그때 역기가 쇠로 만든 게 아니라 시멘트에다 자갈을 섞어 만든 거라 바닥에 떨어지면서 부서진 거예요.”
-주먹은 그렇게 잘 쓰면서 어떻게 역기 드는 데 실패했는지….
“역기를 들면 몸에 근육이 많이 붙으니까, 펀치 들어가는 손이 느려져요. 상대방을 탁 때릴 때 주먹 들어가는 게 눈보다 빨라야 돼요. 눈 깜빡 하는 게 반초 아닙니까? 주먹이 들어가는 속도는 반초의 반이 되어야 돼요. 4분의 1초 만에 상대방을 건드리는 거죠. 그만큼 속도가 빨라야 상대가 고꾸라지는 거예요. 근데 역도를 하면 팔에 근육이 붙어 둔해져서 주먹질 쓰는 사람한테는 안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보트만 타고 돌아왔으면 괜찮을 텐데… 역기를 떨어뜨려 박살이 나자 가슴에 시커먼 털이 부숭부숭한 남자들이 ‘야, 이 자식아! 역기를 들려면 잘 들지 이게 뭐야? 여자만 데리고 다니면 제일이야!’ 이러면서 덤벼드는 거예요. 그냥 역기를 망가뜨려서 미안하다며 한 10원 집어주면 됐을 텐데…. 사람 본질이 그렇질 못하잖아요. 덤벼드는 사람을 슬쩍 피하면서 나도 모르게 딱 쳤는데 급소를 맞아 푹 꼬꾸라지는 거예요. 그랬더니 다른 놈들이 ‘아이고 이 놈이 사람 친다’ 하면서 또 들어오길래 서너명을 줄줄이 쓰러뜨렸단 말이야, 아 그랬더니 여자가 내 옷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거예요. 산통 다 깨진 거죠.
그리고 요새 세상에는 그저 사귀자마자 뽀뽀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기 전에 어린애 배고 하는 벼락치기 제트기 시대라지만 그때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순진했거든, 손 한번 못 쥡니다. 그러니까 요리집에 가서도 기생들 손도 제대로 만지지 못했어요. 그저 눈치 너머로 봐 가지고 여자들 처분만 기다리는 거지요.
하여간 그날 역기 하나 때문에 스타일 다 구기고 정체 들통나고, 건진 게 하나도 없었지요. 그러다가 박양이 타자 배우러 학원에 다닌다는 걸 오빠를 통해 알았어요. 그래서 학원 근처 주차장에서 기다리다가 저녁때쯤 나올 것 같으면 나타나 거기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행세했죠. ‘아이고 박양, 어디 가는가, 오래간만일세’ 하면서 말을 붙였더니 겁을 먹는 거예요. 안되겠다 싶어 지금 미도파 자리에 있던 경자옥이라는 백화점에 가서 화장품도 사주고 옷도 사주면서 달랬거든. 그때는 거기가 최고였거든. 그러다보니까 서로 정도 들면서 괜찮게 지냈는데…. 그놈의 헌병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잡혀 들어갔잖아요. 그때 벌컥 뒤집혔지. 이후 풀려나와 보니까 박양네 집에서 안되겠다며 박양을 다른 사람하고 강제로 약혼식을 치르게 한 후 나를 못 만나게 하느라 경기도 안성에 있는 외갓집으로 보내버렸어요. 그래서 없어져버렸어요. 그러니 어떻게 해. 딸을 달라고 공갈 협박할 수도 없는 거고. 제대로 연애 한번 못 해보고 이 주먹 하나 때문에 스타일만 구길 대로 구기고, 제대로 연애 한번 못 해보고 끝난 게 제 첫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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